96화
하지만 서은서와 무령의 예상은 틀렸다.
걸어 나온 것은 성현이었다.
그것도 가벼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모습으로…….
밖으로 나온 성현은 입구를 가득 채운 복면인을 죽 둘러봤다.
여유롭고 느긋한 시선이었다.
그리고 서은서와 무령의 앞에서 시선을 멈췄다.
“어? 기다리고 있었어요?”
성현의 대수롭지 않은 말투에 서은서가 눈을 깜빡였다.
“서, 서준식 본부장은요?”
그 질문에 성현이 고개를 틀었다.
서은서와 무령의 시선 역시 성현의 시선을 좇았다.
성현의 뒤, 성현이 질질 끌고 온 무엇인가가 보였다.
바로 넝마가 된 서준식이었다.
“서, 설마…….”
서은서가 말을 더듬었고 무령은 눈을 깜빡였다.
딱 봐도 일방적으로 짓밟혔고 의식까지 잃고 쓰러져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성현이 엄청난 속도로 강해졌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상대는 서준식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재능을 인정받았고 후계로 키워진 사람.
비슷한 연령의 사람 중 서준식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을 거다.
아니, 상식적으로 2명밖에 없다.
영웅이라 불리는 지연우와 국내 최대 길드 바이오의 후계자 마두식.
그런데, 오늘 서준식은 무명의 계약자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가, 가려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무령이 외쳤다.
복면인들이 서둘러 벽을 쌓았다.
다른 사람이 볼 수 없게 만드는 거다.
혹시 모를 카메라에 이 장면이 담기지 않아야 한다.
서준식이 성현에게 깨졌다는 것이 소문나면 페이트는 끝이다. 복면인들이 다급히 움직였다.
하지만 성현은 무심한 눈으로 서은서 앞에 서준식을 던져 둔 후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이 던전…… 내가 클리어해도 될까요?”
“네?”
“시험해 보고 싶은 게 남아서요.”
지금 성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몸에 담긴 마력의 힘.
얼마나 강할까?
회귀 전 자신과 비교하면 어느 정도 수준일까?
그래서 서준식과 싸우며 이런저런 기술을 사용해 봤다.
뢰피크르의 마력, 호칭과 지르힐의 권능.
하지만 서준식은 인간이었고 성현의 폭력을 견딜 수 없었다.
막 흥이 나는 찰나에 서준식은 의식을 잃고 기절해 버렸다.
그래서 던전에 있는 짐승을 상대로 마음껏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짐승이라면 사정을 봐주지 않고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안에 있는 아이템은 건들지 않을게요.”
“혼자 클리어하겠다고요?”
“서준식 본부장과 싸우면서 짐승이 상당히 죽어 나갔어요. 서준식 본부장이 안개 속에 독을 집어넣었거든요.”
“아…….”
“그럼, 해도 될까요?”
잠시 고민에 빠졌던 서은서가 다급히 입을 열었다.
“저, 저기……! 오늘 본부장과 싸운 것 비밀로 해 줄 수 있나요?”
성현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죠.”
“감사합니다. 그럼, 던전의 클리어를 허락하겠습니다.”
서은서가 허리를 굽혔고 성현은 몸을 틀어 던전으로 향했다.
던전의 거대한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닫혔다.
동시에 서은서는 무령에게 재빨리 지시했다.
“오빠는 길드 전용 병원으로 옮겨, 기밀을 유지하면서.”
“네.”
“일단 아버지께는 알리지 마. 유성현이 비밀로 해 주겠다고 했으니 나머지는 오빠에게 맡길 거야.”
“알겠습니다.”
“그럼, 움직여.”
서은서의 명령은 끝났고 무령은 복면인들을 지휘했다.
“길드 MB카 호출해. 이유는 던전에 A급 짐승 등장, A급 지휘부 부상. 신변 노출을 경계하고 200m 안으로 관계자 외 접근 금지.”
복면인들이 한 몸처럼 움직였다.
서은서는 들것에 실리는 서준식을 보고 있었다.
코뼈와 안구 그리고 광대가 함몰됐고 두개골이 파손됐으며 온몸이 찢겨 나갔다.
서은서의 시선이 안쓰럽게 변했다.
“잘난 맛에 살던 사람이…….”
그 목소리가 들렸는지 서준식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그 손이 서은서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서준식이 속삭이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은서냐?”
서은서가 서준식의 얼굴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어, 나야. 오빠.”
“나, 지금, 즐겁다.”
“어?”
“즐겁다고.”
그 말이 끝이었다.
서준식은 들것에 실려 서은서의 복면인들에게 가려진 채 MB카를 향해 옮겨졌다.
서은서는 멍했다.
서준식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뒤를 좇고 있었다.
‘즐겁다고?’
그런 말, 정말 어렸을 때 들어 본 적이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기억조차 희미한 어린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다.
서은서가 씁쓸하게 웃었다.
최근 서준식을 기억하면 항상 후계라는 단어만 입에 달고 살았다.
서은서의 시선이 천천히 던전의 문을 향해 틀어졌다.
그리고 ‘드드드득’ 소리와 함께 던전의 문이 열렸다.
‘어?’
서은서의 눈이 깜빡여졌다.
성현이 던전을 클리어해도 되냐고 물어본 게 약 30분 전이다.
그런데 벌써 성현이 나타났다.
짐승의 피를 뒤집어쓴 채, 무심한 눈으로 문 밖으로 나오고 있다.
“C급? 아니면 D급 정도 되겠네요. 던전의 주인은 말도 할 수 없는 C급 짐승이었고요.”
“아무리 D급 던전이라 해도 혼자 클리어했다고요?”
“네.”
“이 짧은 시간에?”
“네.”
“말도 안 돼…….”
서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 * *
“타세요.”
잠시 후, 던전의 간이 샤워장 앞.
짐승의 피를 씻어 내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온 성현의 앞에 서은서가 보였다.
빨간 오픈카의 문에 비스듬히 기대선 그녀가 손으로 조수석을 가리켰다.
성현이 조수석에 오르자 서은서도 운전석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첫 휴가의 첫날을 이렇게 써서 어떡해요?”
“포상 몇 개를 붙여서 나온 거라 시간은 많아요.”
“집에는?”
“내일 간다고 했어요.”
어머니께는 내일부터 휴가라는 말을 전했다.
오늘 간다고 말했으면 아침부터 계속 기다렸을 거다.
“그럼 오늘 자유인가요?”
“뭐, 그렇죠.”
“가요. 제가 술 한잔 살게요. 그동안은 고등학생이라 제가 좋은 술 한잔을 못 샀잖아요? 제가 맛있는 집 알아요.”
잠시 후, 포천을 벗어나 외곽 순환 고속도로로 들어서며 서은서가 입을 열었다.
“어땠어요?”
“어떤?”
“본부장과 전투요.”
서은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지만 내심 신경이 쓰였나 보다.
성현이 그녀를 슬쩍 보며 대답했다.
“이번에는 제가 일방적으로 이겼어요. 하지만 다음번은 잘 모르겠네요.”
“모르겠다니요?”
“서준식 본부장을 가로막고 있던 것, 자만심 그리고 아버지께 뭔가 보여 줘야 한다는 압박감, 그런 것을 다 털어 냈거든요. 앞으로 더 강해질 겁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지금처럼 일방적으로 이길 것 같지는 않아요. 몇 대는 맞고 이길 것 같아요.”
“몇 대는 맞는다? 그것도 자만심 아닌가요?”
“아뇨, 그건 능력이죠.”
서은서가 살짝 성현을 바라봤다.
만난 지 1년도 안 된 청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서은서가 마음만 먹으면 1초 안에 목숨을 끊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서준식을 언제든 이길 수 있다는 저 말이 거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능력처럼 보인다.
성현이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페이트 길드쯤 되면 짐승의 땅에 솟아나는 던전의 정보도 알고 있나요?”
“그럼요.”
“그 정보 주시겠어요?”
“토벌하게요?”
“네.”
“이번에도 혼자?”
“글쎄요. 초소장이랑 함께할 수도 있고요.”
오늘 서준식과 싸웠고 던전을 클리어했지만 모자랐다.
넘치는 힘을 발산하고 싶었다.
그리고 더 강해질 필요가 있다.
던전에 깔려 있는 아이템을 잔뜩 손에 넣어 지금보다 더 빠르게 강해지고 싶었다.
‘앞으로 1년.’
그 안에 회귀 전 유성현을 넘어설 생각이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엄청난 속도로 권능 이해도를 올렸지만 10%대와 20%대의 성장 속도는 다르다.
단 1%를 올리기 위해 과거보다 10배의 노력은 해야 한다.
즉, 죽어라 막노동을 해도 레벨이 오르지 않는 정체 구간.
대부분의 계약자는 이 구간에서 두 손 두 발 들고 포기를 하고 만다.
온갖 영약을 처먹고 돈을 발라도 강해지는 게 티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은 달랐다.
회귀 전, 모두가 안 된다고 할 때 묵묵히 노력했고 맨땅에 헤딩하며 30%대로 들어섰었다.
‘지금은 방법도 알아.’
당시는 무조건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요령을 알고 있다.
물론 요령을 알고 있어도 끔찍한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회귀 전보다 수월할 거다.
“지연우가 움직이고 있어요.”
생각을 이어 가던 성현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래서 서은서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서은서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지연우가 원정대를 준비하고 있어요.”
“……원정대요?”
“존재에 대항하는 원정대. 이계의 세상으로 들어가 존재와 전쟁을 펼치겠다는 거죠.”
“그게 무슨…….”
“성현 씨가 마녀를 잡았기 때문이에요. 지연우 그 사람, 정의로운 척하지만 사실은 우상이 되고 싶을 뿐이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성현 씨에게 집중됐으니 참지 못했을 거예요.”
“하!”
우습지도 않았다.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관종이네.”
“네, 맞아요. 관종.”
서은서도 지연우에 대한 생각이 좋지는 않았다.
독을 다루는 페이트 길드와 정의의 용사님이 같은 라인을 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서은서가 말을 이었다.
“지연우와 그 원정대는 죽고 말 거예요. 몰살당하겠죠. 마녀를 우습게 보고 있어…….”
서은서는 뢰피크르를 겪었다.
뢰피크르는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두려워져서 절망을 느낄 정도로 강했다.
그런데 성현의 생각은 달랐다.
“지연우는 서은서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세요.”
“네?”
“그놈, 힘을 다 안 꺼내고 있어요.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꺼내 사용하고 있죠.”
“마녀는 못 이길걸요?”
“글쎄요.”
성현은 대답을 그만두고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원정대라…….’
회귀 전 알고 있던 미래에도 지연우는 원정대를 꾸렸다.
문제는 그 시기가 한참 후라는 거다.
당시는 이창민 중사가 반란을 일으키고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외부의 적을 만들면 내부는 하나가 된다나 뭐라나.
어쨌든 그 미래가 갑작스레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턱을 괸 성현이 한숨을 내뱉었다.
‘미래가 꼬이고 있나?’
* * *
서은서와 양껏 술을 마셨다.
재벌의 막내딸 치고는 소박하게 소주를 마신다.
물론 안주는 최고급 셰프의 손에서 만들어졌지만…….
그리고 서은서가 호텔도 잡아 줬다.
페이트 호텔 VIP실.
한강이 한눈에 보이는 곳으로 개별 실내 수영장까지 갖췄다.
“좋은 시간 되십시오.”
호텔 직원의 인사를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한숨 푹 잔 후 내일 집으로 가서 어머니를 뵈려고 했다.
그런데 거실 소파에 낯선 인물이 앉아 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인간, 하지만 얼굴은 용의 머리.
성현이 문 앞에 멈춰 서서 놈을 노려봤다.
“뭐지?”
성현이 마력을 집중하자 몸에 머물고 있던 알코올이 독한 냄새를 풍기며 싹 빠져나갔다.
지금껏 마셨던 술이 완벽히 깼으니 놈이 덤비면 충분히 반응할 수 있다.
용의 머리가 빙긋이 웃으며 양손을 들었다.
싸울 생각이 없다는 것을 보인 거다.
놈이 입을 열었다.
“술도 다 깬 것 같은데 술 한잔하겠나?”
“그쪽이 누구인지 소개부터 해야 하지 않나?”
“아, 카디르버라고 하는데…….”
거실에 있던 것은 거짓의 군주 카디르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