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97화 (97/252)

97화

“카디르버라고?”

“오? 나를 알고 있나?”

“어. 알지.”

안다는 말에 카디르버는 반가운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하지만 성현의 주먹에는 힘이 콱 들어갔고 검은 마력이 일렁거렸다.

당장이라도 마력을 쏟아 내며 싸울 준비를 마친 거다.

존재, 그것도 군주급의 존재가 나타났다.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긴장해야 한다.

계약된 존재가 아니면 그 어떤 존재도 믿을 수 없다.

놈들은 인간과 다르다.

본능과 감정에 충실하며 이기적이다.

다른 존재의 계약자를 죽이고 그 계약자의 아이템을 빼앗는 게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성현의 적대적인 표정에 카디르버가 웃기 시작했다.

“진정해. 싸우자는 게 아니라 술 한잔 마시자고 온 거야. 믿어 봐.”

“거짓의 군주가 하는 말을 믿으라고?”

“오! 내가 거짓의 군주라는 것도 알고 있나? 서은서가 거기까지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잠깐!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지금 이야기하지 마. 난 맛있는 것을 가장 마지막에 먹는 성격이거든. 재밌는 것은 천천히 들어야지. 천천히, 느긋하게…….”

카디르버는 그 말을 끝으로 성현의 옆을 스쳐 거실에 준비된 와인 냉장고로 걸어갔다.

그리고 와인 하나를 꺼낸 후 들어 보였다.

“이거 어때? 꽤 괜찮은 술 같은데. 이게 싫으면 드라이한 맛으로 고를까?”

카디르버에게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용의 머리가 느물느물 웃고 있는 게 친근해 보인다.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다.

놈은 존재, 그것도 군주급, 언제 돌변해도 이상하지 않다.

경계를 푸는 순간 성현을 씹어 삼킬 수도 있다.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쯤 되자 카디르버가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왔는지 들어 보고 싶었다.

성현이 긴장을 풀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시지.”

카디르버가 빙긋이 웃으며 소파에 앉았다.

와인을 따고 잔을 채우는 게 꽤 능숙한 행동이다.

“존재도 술을 마시나?”

“난 마시지. 안 마시는 존재도 있겠지만. 그런데 계속 벽에 기대고 있을 텐가? 그만 앉지?”

성현이 카디르버와 마주 앉았다.

카디르버가 성현의 앞에 와인 잔을 내려 둔 후 길게 늘어진 수염을 만지며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지?”

“왜 왔지? 아니, 군주급 존재가 제물 없이 현신할 수 있나?”

카디르버가 낄낄 웃었다.

“궁금한가? 나도 마찬가지야. 자네가 궁금해. 그럼 우리, 번갈아 질문하고 답하는 것으로 할까? 거짓을 말하면 손목, 발목, 모가지 등등! 원하는 곳을 자르는 일종의 진실 게임! 푸하하하!”

카디르버의 목소리는 장난 같았다.

하지만 어느새 그의 손에는 잘 벼려진 도끼가 스르륵 나타나 있었다.

성현이 거짓을 말하면 당장이라도 손목과 발목을 자르겠다는 뜻이다.

성현은 눈을 찌푸렸다.

존재라는 게 그렇다.

제멋대로 행동하고 결정하고.

“군주급의 존재가 꽤 경망스럽네.”

“경망? 뭐, 이런저런 존재가 있는 법이지. 그런데,서은서나 서준식에게 이런 말은 하지 마. 내가 이래 봬도 걔들 앞에서는 꽤나 폼 잡고 있거든. 그리고 너도 마찬가지잖아? 인간 주제에 반말을 하고 있어. 그래, 어떻게 할 거야? 손목 자르기 할 거야? 쫄리면 뒈…….”

성현은 카디르버의 생각을 고스란히 따라 줄 생각은 없었다.

“괜찮네.”

성현이 품에서 작은 막대를 꺼냈다.

마력을 주입하자 순식간에 날카로운 창이 되어 카디르버의 눈동자를 향했다.

“난 그 눈동자를 파내 주지.”

카디르버가 잠시 움찔했다.

자신의 눈앞에 창이 들이밀린 것은 살면서 처음일 거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카디르버가 끌끌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럼 하나 더 꺼내지.”

테이블에 파란색의 수정 구슬이 나타났다.

카디르버가 수정 구슬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거짓을 말하면 이 파란색의 구슬이 새빨갛게 변할 거야. 동시에 팔목이든 눈동자든 썩둑 잘라 버리는 거지. 어때, 괜찮나?”

도끼와 창 그리고 푸른색의 구슬, 성현과 카디르버는 웃고 있지만 분위기는 한겨울 벌판처럼 서늘했다.

거실 바닥이 피바다가 되어야 끝날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하자.”

회귀를 했어도 존재의 세상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많다.

지르힐에게 물어봐도 대답 대신 씁쓸히 웃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카디르버를 만난 김에 알고 싶은 것을 모두 묻고 싶었다.

먼저 카디르버가 입을 열었다.

“왜 왔냐고? 너를 보러 왔지. 그럼, 이제 내 질문. 너와 계약한 존재가 지르힐이 맞나?”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숨길 필요는 없었다.

뢰피크르와 싸울 때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했으니 웬만한 존재는 그것만으로도 성현과 계약한 존재를 알아냈을 거다.

이번엔 성현이 입을 열었다.

“군주급 존재가 제물 없이 인간 세상에 나타날 수 있나?”

성현은 군주급 존재를 몇 번 봤다.

그중 마지막으로 봤던 것이 회귀 전 마주했던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

그녀는 수천 명의 피를 제물로 현신했었다.

카디르버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현신한 게 아니야. 음…… 인간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하자면 화상 통화 같은 거지. 홀로그램 화상 통화. 물론 이쪽의 홀로그램은 먹고 마시고 느낄 수 있다는 게 다르지만. 뭐, 내 권능 중 하나야. 그럼 다시 내 질문. 네 호칭이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인가?”

“맞아.”

카디르버가 다시 끌끌끌 웃었다.

“맛있겠어. 정말 먹고 싶어. 진심이야.”

카디르버가 뱀 같은 혀를 날름거리며 성현을 쏘아봤다.

그 눈빛에 지금 당장 성현을 뜯고 맛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렬했다.

하지만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었다.

“뭐, 됐고. 이번 질문은 내 차례지?”

“그래.”

카디르버가 허리를 펴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와인을 입에 대는 카디르버의 용대가리를 보며 성현이 조용히 물었다.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뭐지?”

카디르버가 빵 터진 것처럼 웃기 시작했다.

급기야 배를 잡고 소파에 누워 낄낄거렸다.

용대가리에서 눈물까지 흘린다.

“마법사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그 호칭을 받은 것인가? 인간들 사이에 로또 맞았다고 하지? 지금 자네가 그래. 그거 로또야! 푸하하하하!”

카디르버가 자세를 바로 한 것은 한참 후였다.

그리고 성현을 보며 겨우 입을 열었다.

“나도 자세히는 몰라. 예언으로만 들었으니까.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하자면 마법사는 창조주가 만든 최초의 존재야.”

“……!”

“뭐, 창조주는 그 후에도 계속 존재를 만들었지. 여왕, 군주, 각 존재에게 의미가 부여됐고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지배하는 2명의 신이 만들어졌어. 내가 알기로 창조주의 이야기는 거기가 끝이지. 그 후로 모습을 감췄어.”

성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2명의 신?”

“어, 그것도 알아?”

성현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빠졌다.

호칭을 부여받으며 마법사의 기억을 엿봤던 그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신을 모시는 양 군대가 처절하게 싸웠고 승자는 패자를 짓이겼다.

강간을 하고 빼앗고 죽이고.

그때 검은 갑주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그 남자가 바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그는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고 모두를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말 그대로 세상을 피로 물들였다.

그리고 혼자 남았을 때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구름 위에 앉아 체스를 두고 있던 2명의 신, 그중 여신이 마법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제법이네?

“제법이라…….”

그 목소리가 쓸쓸하게 들려왔다.

마법사는 들고 있던 창에서 핏물을 털어 내며 말을 이었다.

“나는 오늘 신을 죽일 거다.”

성현이 그때 봤던 것을 되새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신선처럼 수염을 늘어뜨린 노인과 예쁘게 생긴 여자?”

“맞아, 그것들이 신이야. 지금은 어딘가에 봉인되어 있을 거야.”

카디르버가 아는 것도 거기까지인 것 같다.

마법사가 어디에 있는지, 창조주가 어떻게 됐는지 모르고 있다.

카디르버가 슬쩍 웃으며 와인을 입에 댔다. 그사이 성현은 마법사가 건넨 마지막 목소리를 떠올렸다.

“……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자네에게 부탁하지. 나 대신 신을 죽여 다오. 내가 그럴 수 있는 힘을 줄 테니…….”

성현이 픽 웃었다.

지르힐은 존재의 세상을 멸망시켜 달라 한다.

마법사는 봉인된 신을 죽여 달라 하고 있다.

‘내가 뭐라고…….’

성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때 카디르버가 와인 잔을 내려 두며 말했다.

“이번에는 다시 내 차례. 너…… 어떻게 내가 거짓의 군주라는 것을 알고 있지? 인간들은 자신의 존재가 아니면 그것까지 알기는 어려울 텐데.”

“아, 미래를 알고 있어.”

“미래?”

“가까운 미래에 네 계약자 서은서가 내게 자신의 존재가 카디르버라는 것을 밝히거든. 그때 거짓의 군주라는 것까지 이야기를 하고.”

카디르버의 눈동자가 수정 구슬을 향했다.

푸른색, 진실이다.

카디르버가 입술을 핥았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해서인지 아니면 미래를 확실하게 아는 성현에 대한 놀라움인지 몰라도 긴장된 표정이 역력하다.

하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보였다.

나름 군주급의 존재인데 인간 앞에서 겁먹은 표정을 계속 보일 수는 없었다.

“미래를 본다……. 그럼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잠깐, 내 차례야. 그럼 너희는 뭐지?”

“너희라니?”

“존재.”

“우리 역시 생명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인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모두가 특별한 능력을 타고나고 영원히 살 수 있다는 점이지. 불의의 사고로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래서 몇몇 어머니들을 두고 복잡한 혈연으로 얽혀 있어. 뭐, 다른 것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것 같아. 인간마다 성격이 다르듯 존재도 마찬가지니까. 아, 어머니급의 존재는 모두 성격이 포악해. 물론 지르힐의 성격이 제일 거지 같겠지만.”

“지르힐이?”

“아니야? 그렇게 들었는데, 제일 거지 같다고?”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친절해.”

그러자 카디르버가 눈을 가늘게 뜨고 수염을 만지작댔다.

“뭐, 나도 들은 거니까. 어쨌든, 다시 내 질문. 미래, 난 어떻게 되지?”

“아, 죽어.”

“뭐?”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 그리고 존재의 단체 교. 그것들이 너를 씹어 먹거든.”

카디르버의 눈동자가 다시 수정 구슬로 향했다.

역시 푸른색.

성현의 말이 진실이라는 뜻이다.

“……내가 죽는다고?”

“어.”

“교에게?”

“정확히는 플로르에게.”

카디르버의 눈동자는 여전히 수정 구슬에 박혀 있었다.

하지만 바뀌는 것은 없다.

방금도 지금도 푸른색, 성현의 말은 진실이다.

카디르버가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느긋하니 소파에 기대더니 수염을 만지며 붉은 와인을 흔들었다.

그 눈동자가 마지막으로 성현에게 닿았다.

“너와 계약한 존재는 버림받은 악 지르힐. 다른 말로 신의 분노 지르힐, 또는 거지 같은 성격의 지르힐이라 불리지.”

갑자기 튀어나온, 뜬금없는 지르힐의 이야기에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카디르버는 상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에게 지르힐은 악마였고 저주였대. 그런데 교를 무너뜨리려면 지르힐밖에 답이 없는 것 같아. 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성격도 괜찮은 것 같고. 그래서 말인데…….”

카디르버가 잠시 뒷말을 줄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고 성현과 눈을 마주쳤다.

“지르힐을 구하러 가지 않을래?”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