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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98화 (98/252)

98화

카디르버가 욕망이 가득한 눈으로 성현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사실 죽는 것 따위는 상관없어. 무섭지도 않고.”

이미 오랜 시간을 살아왔고 지겨울 만큼 존재했다.

카디르버가 계속 입을 열었다.

“널 찾아온 진짜 이유, 지르힐을 구출하고 싶어서야.”

성현이 눈을 찌푸릴 때 카디르버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붉은 안개가 피어오르며 탑 모양을 만들어 낸다.

카디르버가 붉은 안개로 만들어진 탑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계속 말했다.

“지르힐은 이곳에 갇혀 있지. 하지만 난 이곳에 갈 수가 없어. 발길이 허락되지 않은 곳이거든.”

“그래서?”

“넌 가능해. 존재가 아닌 인간이니까. 이곳에서 지르힐을 꺼내는 거야.”

“그럼?”

“세상이 멸망하겠지. 아, 너희 세상 말고 우리 세상이 멸망할 거야. 내가 도울 거니까.”

카디르버가 뱀 같은 혀로 마른 입술을 핥으며 와인 잔을 손에 들었다.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쪽 세상을 없애겠다고?”

“어.”

“그러니까 같이하자고?”

“아니, 해야 할 거야.”

“뭐?”

카디르버가 푸른 구슬을 성현의 앞으로 쭉 밀며 입을 열었다.

“질문이다. 넌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가?”

“……!”

“그동안 서은서의 눈동자를 통해 네 행보를 쭉 지켜봤어. 넌 벼랑 끝에 선 것처럼 아등바등 행동했고 죽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몸을 던졌어. 결과로 인류 역사상 가장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지. 그런데, 세상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는 법. 난 네가 왜 그렇게 이 악물고 움직이는지 궁금했어. 그리고 추측했지. 그 결과 ‘미래를 보는 예지 능력, 그 능력으로 끔찍한 무엇인가를 봤을 거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질문이다. 네 행동의 의미는 세상의 구원인가?”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늘한 눈으로 카디르버를 바라볼 뿐이다.

그러자 카디르버가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답해.”

카디르버의 손이 도끼로 향한다.

대답하지 않으면 성현의 손목을 잘라 버리겠다는 뜻이다.

같은 편이 되자고 하더니 지금은 또 손목을 자르려 하고, 정말 존재의 성격은 예측 불가였다.

그렇게 싸늘한 분위기가 공간을 채울 때 성현이 킥킥킥 웃었다.

카디르버가 눈을 찌푸린다.

“왜 웃지?”

“카디르버…… 마지막 질문이 뭐였는지 기억해 봐. 네가 물어봤어, 미래에 네가 어떻게 되는지. 난 그 답을 했으니 이제 내가 질문할 차례야.”

“……!”

“그러니까 도끼 내려놔, 창으로 네 목을 쑤시기 전에.”

성현이 살벌하게 웃으며 창을 쥐었다.

성현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인다.

군주급의 존재를 상대로 싸워 이기겠다는 눈빛이다.

황당한 표정으로 성현을 살피던 카디르버가 크게 웃기 시작했다.

“푸하하하하!”

“민망하지? 웃음으로 넘기려 하지 마.”

한참을 웃던 카디르버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아, 미안. 그런데 하나 알려 줄게. 네가 미래에 무엇을 봤는지, 세상을 왜 구원하는지 몰라도 날 돕는 게 좋을 거야.”

“이유는?”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 그리고 교. 그놈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신들만 남기고 다른 모든 차원의 생명체를 없애려 하고 있어.”

“뭐?”

“창조주가 남긴 세상을 정리하고 자신들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 하거든. 만들어진 신이 아니라 진짜 신이 되고 싶은 거야.”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카디르버가 와인 잔을 내려 두며 계속 말했다.

“인간의 세상에 던전이 왜 나타나고 짐승이 왜 나타날까? 플로르와 교가 창조주의 힘이라 불리는 에느가인을 찾기 위해 차원의 틈을 부쉈기 때문이야.”

“…….”

“에느가인은 왜 찾으려 하는 걸까? 누군가는 존재의 왕이 되기 위해, 누군가는 완벽한 불멸을 위해, 그리고 누군가는 신이 되기 위해.”

“…….”

“그런데 그 신이 되려면 가장 필요한 게 뭐 같아? 제물, 그것도 인간의 아기, 순결한 생명! 교는 인간의 아기를 씹어 먹으며 신이 될 에너지를 얻지.”

성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러고 보니 회귀 전 지연우는 인간의 아기를 교에게 바쳤었다.

단지 상징적인 것인 줄 알았는데 그 이유가 신이 되기 위한 의식이었다니…….

카디르버가 낄낄낄 웃으며 말을 이었다.

“결국 인간은 모두 죽고 말 거다. 그 피가 의식의 일환으로 쓰일 거다. 그런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면 나와 함께해. 난 전쟁을 일으킬 거야. 지긋지긋한 거짓의 평화를 끝낼 생각이야.”

“…….”

“플로르와 교, 가만히 놔두면 위험해. 때로는 평화를 위한 전쟁은 불가피한 거야.”

말을 마친 카디르버가 와인 잔을 입에 댔다.

성현의 대답을 기다리는 거다.

순간 성현이 앞에 있던 구슬을 카디르버의 앞으로 밀었다.

카디르버의 눈동자가 구슬로 향할 때 성현이 물었다.

“말 참 많네, 내가 질문할 차례라니까. 질문한다. 지금까지 네가 한 말은 진실인가?”

“어.”

카디르버가 슬쩍 웃었다.

* * *

-카디르버가?

“어, 그런 제안을 했지만 대답은 안 했어.”

성현은 카디르버가 돌아간 후 창고로 와서 지르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생각에 빠졌다.

-교 그리고 플로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성현이 손을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교와 플로르가 아니다.

그들의 목적을 알고 있다 해도 성현이 막을 수 없다.

지금은 힘을 키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

언젠가는 다 쓸어버릴 수 있을 거다.

-그럼 중요한 게 뭐지?

“구하러 갈까?”

-……?

존재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는 탑 그곳에 지르힐이 갇혀 있다.

그리고 그곳은 위험하며 인간에겐 미지의 공간.

죽을 확률이 100%에 가깝다.

하지만 성현은 지르힐이 원하면 구하러 갈 생각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이기적인 이유를 말하면 지르힐이 풀려나야 성현은 더 강해진다.

그녀의 모든 힘을 얻을 수 있어서다.

또 다른 이유로 회귀 전 성현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외톨이로 살았다.

그런 성현의 마음을 유일하게 보듬어 준 것이 지르힐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구하고 싶었다.

물론 그녀가 원한다는 전제하에 말하는 거다.

다시 말하지만 그곳은 가혹할 정도로 위험하다.

“어떻게 생각해?”

지르힐이 빙긋이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됐다. 들어오다가 죽을 거다.

“카디르버가 길을 가르쳐 준다고 했어. 그럼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카디르버는 거짓의 군주. 놈은 모든 게 허구로 이뤄진 존재, 애초에 진실이라는 게 없다.

“너무 비약하는 거 아니야?”

-아니, 놈은 그 진심도 거짓일 수 있다. 흥미를 잃으면 나 몰라라 등을 돌리는 게 그놈이다. 즉, 카디르버가 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하던 도중 흥미를 잃으면 그대는 혼자 이계에 남겨지게 되는 거다.

지르힐이 구하러 갈 수도 없다.

성현은 이계라는 곳, 그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공간에 혼자 남는 거다.

그럼, 죽는다.

반드시…….

지르힐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도움이 없어도 난 곧 자유를 되찾을 거다. 그때, 웃으며 보도록 하지.

“……자유를 되찾아?”

성현은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때도 이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버림받은 악이었으며 영원히 그 탑에 갇혀 있을 운명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빛을 가만히 바라보니 평소보다 더 찬란한 금빛이다.

“되찾아?”

-그래. 그러니까 기다려라.

“그러지.”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의 신뢰로 가득한 눈빛에 지르힐이 미소를 그리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카디르버의 제안, 모두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나를 구하러 온다는 것을 제외하고 존재의 세상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 그것은 생각을 해 보자.

지르힐도 경계하고 있었다.

플로르와 교.

신이 되기 위한 작업과 아기를 제물로 사용해 욕망을 이루려는 것.

예정된 끔찍한 미래다.

그것을 막으려면 카디르버의 도움이 필요하다.

비록 놈이 거짓으로 이뤄진 삶을 살고 있지만 그는 군주급의 존재.

인간 세상에서도 페이트라는 거대한 조직과 계약되어 있다.

즉, 어디서든 대단한 영향력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거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잠시 후, 창고를 떠나려는 성현을 향해 지르힐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도 그대의 상대는 뢰피크르인가?

“어.”

성현은 뢰피크르의 피를 흡수했다.

그리고 뢰피크르의 권능을 조금이지만 사용할 수 있게 됐다.

그 첫 번째가 꿈을 통제하는 것, 잠을 자면서도 수련을 할 수 있게 된 거다.

그리고 매일 밤 꿈속의 대전 상대는 본의 아니게 뢰피크르였다.

최근 싸워 본 상대 중 그녀가 가장 강했고 이미지가 확실하게 박혀 있어서다.

그래서 성현은 생생한 모습의 그녀를 끄집어내 매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성현의 꿈속.

성현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에 섰다.

긴장된 한숨을 토해 낼 때 그 앞으로 뢰피크르가 저벅저벅 다가온다.

싸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며 성현이 창을 펼쳤다.

비록 꿈속이지만 뢰피크르와 약 이백 번은 싸운 것 같다.

현실에서는 이겼지만 꿈속에서는 달랐다.

잔재주를 부리지 않고 본 실력으로 싸우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오늘은 이겨야겠다고 마음먹으며 창을 머리 위로 들고 붕붕붕 돌리기 시작했다.

그 풍압에 모래 바람이 휘날렸다.

“와라!”

그 말과 동시에 뢰피크르가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애애액!

엄청난 속도다.

성현이 뢰피크르의 머리를 노리고 창을 휘둘렀다.

부아아악!

그 순간 뢰피크르는 이미 성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주먹이 성현의 옆구리를 노린다.

콰직!

둔탁한 소리가 났지만 맞은 것은 아니다.

성현이 몸을 비틀며 창으로 막아섰다.

“후…….”

며칠 전만 해도 이런 공격에 무방비로 당했다.

하지만 그동안 성현도 늘었다.

이 정도 공격은 막을 수 있었고 곧바로 성현의 공격이 시작됐다.

창을 짧게 짧게 찔러 넣으며 뢰피크르를 뒤로 물러서게 만들었다.

그렇게 거리가 벌어지면 본격적으로 창의 무대다.

* * *

“또 졌네.”

잠에서 깨어난 성현은 하품을 하며 아쉬움을 내뱉었다.

이번에는 거의 이겼다고 생각했는데 뢰피크르가 던진 불덩이에 맞으며 쓰러지고 말았다.

“끝까지 집중해야 해.”

성현은 침대에서 일어나 곧장 샤워실로 들어갔다.

물줄기를 맞으며 몸을 씻어 낸 성현은 집에 가기 위해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부재중 통화가 네 통이나 와 있다.

모두 서은서다.

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곧 서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나셨어요?

성현의 눈동자가 힐끗 거실로 향했다.

테이블에 와인 병이 널브러져 있다.

“아, 네. 그런데 어제 와인 세 병을 꺼내 먹었거든요?”

카디르버가 세 병이나 마시고 떠났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와인인데, 날름날름 먹고 갔다.

계산은 자신의 계약자가 하니까 걱정하지 마라나 뭐라나.

-괜찮아요. 더 드셔도 되는데.

역시 재벌의 클래스는 달랐다.

와인에 적힌 가격표가 100만 원에 육박하는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있다.

성현이 와이셔츠의 단추를 채우며 물었다.

“그런데 어쩐 일로?”

-저와 계약한 존재에게서 메시지가 왔어요.

어제 성현을 만나고 간 카디르버가 곧장 서은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떤 메시지를 보냈을지 살짝 걱정되기 시작했다.

성현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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