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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00화 (100/252)

100화

어머니도 서은서를 알고 있었다.

며칠 전, 성현이 뢰피르크를 잡고 인터뷰를 하던 때, 그 옆에 서 있던 예쁜 아가씨.

페이트 길드의 막내딸이라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성현이 군대 가기 전에 계약했던 길드도 페이트라고 들었다.

계약금으로 지금의 집을 준 것도 바로 페이트 길드였고.

그런데, 그 페이트 길드의 서은서가 이곳에 와 있다.

심지어 성현의 옆에서 사근사근 웃고 있다.

어머니의 눈동자가 작게 떨려 왔다.

어쩐지 지금 이곳에서 성현을 데려갈 것처럼 여겨진다.

성현을 데려가서 무시무시한 마녀와 싸우게 할 것 같다.

어머니에게 페이트 길드는 두려움이었다.

그때였다.

서은서가 어머니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활짝 웃으며 쪼르르 달려왔다.

그러더니 정말 정중하게 폴더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서은서라고 합니다. 유성현 씨와는 함께 일하는 사람입니다.”

어머니도 엉거주춤 허리를 굽혔다.

“아, 네.”

서은서의 시선이 어머니의 옷으로 향했다.

“어머, 이거 고르신 거예요? 피부가 하야셔서 밝은 톤이 정말 잘 어울리세요. 여기에…….”

서은서가 눈을 가늘게 뜨고 어머니의 옷을 천천히 확인하더니 점원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여기, 스카프 하나 가져다주겠어요? 오렌지색있나?”

“네, 있습니다. 가져다드릴까요?”

“오렌지, 오렌지……. 아니다. 있는 것 다 가지고 와 주세요.”

“네.”

직원이 후다닥 스카프를 챙기러 이동했고 서은서의 시선은 다시 어머니에게 옮겨졌다.

“포인트로 스카프를 하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스카프는 제가 사 드릴게요.”

“아니, 아가씨가 왜…….”

어머니는 서은서가 불편했다.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만 서은서가 성현을 계약자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데 서은서가 주변을 살피더니 어머니께 속삭이듯 말했다.

“제가 성현 씨한테 잘 보여야 해요.”

“네?”

“성현 씨가 우리 회사에서 최고거든요.”

“최고요?”

“네, 최고.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얼마나 쫓아다녔는데요.”

어머니의 시선이 천천히 성현에게 옮겨졌다.

눈을 마주치자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서은서가 조용히 웃으며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오늘은 제가 모실게요. 허락해 주세요. 잘 보이고 싶어요.”

서은서는 정말 예쁘게 생겼다.

어지간한 영화배우가 옆에 서면 오징어가 될 거다.

하지만 도도한 눈매와 조금은 사나운 인상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기 어렵다.

그런 그녀가 활짝 웃고 있다.

목소리는 정말 나긋나긋하다.

게다가 어디에도 악의는 없어 보인다.

그녀의 눈짓에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리고 성현은 멀리 떨어져서 서은서와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성현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아이고…….’

서은서가 갑자기 왜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마찬가지로 어머니 앞에서 왜 사근거리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어머니가 좋아하는 것 같다.

서은서가 예쁜 옷을 골라 주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거면 됐다.’

게다가 서은서의 등장으로 매장 직원의 태도가 바뀌었다.

서비스 정신으로 똘똘 뭉쳐 있는 프로이기 때문에 서은서의 등장 전에도 친절하기는 했다.

하지만 서은서가 나타나자 싹 바뀌었다.

음료도 가져다주고 전시되어 있지 않았던 물건을 꺼내 와 추천하기도 한다.

게다가 모든 스카프를 가져와서 눈앞에 깔아 놓고 있다.

“저희 매장에는 12개의 종류가 있고요. 제일 많이 찾는 제품이 이겁니다.”

서은서는 직원의 말을 들으며 팔짱을 끼고 아이템을 감정하는 것처럼 신중하게 스카프를 본다.

그리고 하나씩 들어서 어머니의 목에 대보았다.

“피부가 좋으셔서 다 잘 어울리는데요?”

서은서의 칭찬에 어머니가 엷게 미소를 그리셨다.

“그래요?”

“네, 뭐가 좋을까요……. 이것도 잘 어울리고 저것도 마음에 들고.”

서은서는 시선을 다시 스카프로 향했다.

그러다가 불쑥 말했다.

“다 포장해 주세요.”

스카프 하나에 약 50만 원이다.

그것도 12개.

어머니와 성현이 ‘그렇게 다 필요 없는데.’라고 말하려 했지만 직원의 손이 더 빨랐다.

스카프 12개가 착착착 포장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서은서의 쇼핑은 끝나지 않았다.

어머니를 보며 입을 연다.

“스카프에 선글라스까지 하시면 더 잘 어울릴 것 같죠?”

직원의 얼굴에 자본주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요. 보여 드릴까요?”

“다 가져와 보세요.”

어머니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서은서가 어머니의 귀에 대고 또 속삭인다.

“잘 보여야 한다니까요.”

“성현이한테요?”

“네.”

어머니는 뭐가 좋은지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렇게 손에 쥔 쇼핑백이 바리바리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서은서의 경호원들이 집까지 배달해 주기로 했다.

쇼핑백을 들고 떠나는 경호원을 보며 성현이 미안한 표정으로 서은서를 바라봤다.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요? 아니면…….”

“고맙다고 하면 되죠.”

“고맙습니다. 진심이에요. 오랜만에 어머니가 즐거워하신 것 같아요.”

“저도 즐거웠어요. 전 엄마랑 이런 거 해 본 적이 없거든요.”

그녀의 표정이 조금 쓸쓸했다.

하지만 성현은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쇼핑은 많은 체력을 소모한다.

성현은 차라리 뢰피크르와 싸우는 게 편하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그렇게 백화점을 쏘다닌 지 약 3시간.

잠시 커피숍에 앉아 휴식을 취하기로 했을 때, 서은서가 물었다.

“그런데, 오늘 무슨 날이에요?”

어머니에게 새 옷을 선물했고 그 옷을 입고 계신다.

성현은 평소와 달리 정장을 입고 있고.

누가 보면 결혼식 가는 줄 알겠다.

성현이 커피 잔을 내려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가족사진을 찍으려고 하거든요.”

“아…… 어머니하고 둘이?”

묘한 미소를 짓는 서은서를 보며 성현이 단호히 말했다.

“어머니랑 둘이 갈게요. 하실 일 많으시죠?”

가만히 두면 사진관까지 쫓아 올 것 같았다.

그래서 곧장 철벽을 친 거다.

하지만 서은서의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서은서가 스트로로 커피를 천천히 휘저으며 성현만 들을 수 있도록 조용히 말했다.

“아뇨. 없어요. 그제였나? 누가 저희 오빠를 두들겨 팼네요. 그 나이에 어디서 얻어맞았는지 몰라도 병원에 입원했어요.”

“……!”

“그래서 오늘은 병원을 오가는 스케줄만 잡았어요. 제가 나름 좋은 동생이라서요. 그런데 오빠가 간병인을 구했네요. 해서 정말 할 일이 없어요.”

“…….”

“그런데 누구더라, 사람을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게? 아니, 몽둥이가 아니라 창이라고 했나?”

그 주인공은 성현이었다.

성현이 한숨을 푹 내뱉었다.

“서은서 씨?”

“사진은 몇 컷 찍으세요? 액자 사이즈는? 종류는? 콘셉트는? 정한 것 없죠? 아무것도?”

“네?”

성현이 당황하고 있을 때, 서은서의 시선이 어머니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눈을 찡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성현 씨가 이런 디테일한 것에 약해요.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허락해 주세요. 네?”

성현은 서은서의 얼굴에서 여우를 봤다.

꼬리가 아홉 달린 바로 그 여우.

“하나, 둘, 셋!”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좋습니다! 조금 더!”

사진작가는 어머니와 성현에게 여러 자세를 지시했다.

“얼굴 오른쪽으로! 그렇죠! 찍습니다!”

카메라 플래시가 또 펑, 펑 터진다.

그 모습을 서은서가 보고 있었다.

결국 서은서는 여기까지 쫓아왔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이번에도 도움이 됐다.

어떤 콘셉트로 찍을지, 어떤 액자를 사용하지, 성현이었다면 결정 장애로 한참이나 고민했을 거다.

서은서는 희미한 미소를 보이며 성현과 어머니가 사진 찍는 것을 보고 있었다.

‘부럽네.’

서은서에게도 어머니는 있다.

그 어머니가 친어머니가 아니라 문제다.

그리고 그녀에게 어머니란 존재는 페이트 길드의 마스터가 되는 과정에서 넘어야 할 벽이다.

어쩌면 그녀의 손으로 부숴야 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녀는 성현과 성현 어머니의 관계가 정말 부러웠다.

“한 번 더!”

셔터가 눌렸다.

콘셉트는 크게 두 가지, 지금까지는 어머니가 의자에 앉고 뒤에 성현이 서 있는 가족사진의 정석을 찍는 중이다.

“오케이! 자, 고생하셨습니다. 다음 갈게요! 옷 갈아입고 저쪽으로 이동해 주세요.”

이제 캐주얼한 사진이 남았다.

어머니와 성현 모두 청바지에 흰 남방을 입고 찍는 거다.

탈의실로 이동하며 어머니가 성현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안심이 돼.”

“네?”

성현이 고개를 틀어 어머니를 바라봤다.

어머니가 엷게 웃고 있었다.

“저 아가씨, 서은서. 페이트 길드의 막내딸. 네가 계약한 회사 맞지?”

“……알고 계셨어요?”

성현은 어머니에게 서은서가 누구인지 시시콜콜 소개하지 않았다.

괜히 재벌 집 딸이라 하면 부담을 가질 것 같아서다.

서은서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 자신이 누구인지 떠벌리지 않았다.

그저 같은 회사라고 소개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TV로 봤지.”

어머니가 고개를 틀어 뒤를 바라봤다.

서은서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현과 어머니의 뒤를 조용히 쫓고 있다.

어머니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과하지 않고 가볍지 않고 나서지 않고 배려해 주고 예쁘네…….”

“…….”

“조금은 안심이야.”

어머니는 성현이 계약자가 된 후 제대로 된 잠을 잔 적이 없다.

짐승도 무섭지만.

“인간이 제일 악마 같다며?”

인간이 가장 무섭다는 말, 그것은 계약자들의 세상에서도 진리였다.

배신하고 속이고 버리고.

1천만 원짜리 아이템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어느 통계에서는 짐승에게 죽는 것보다 인간에게 죽는 경우가 많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어머니는 성현이 그런 세상에서 어떻게 견딜까 걱정됐다.

“그런데 저 아가씨를 보니까 조금은 마음이 놓여.”

적어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고 가뜩이나 무서운 세상,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힐 것 같지는 않아서다.

성현이 힐끗 서은서를 바라봤다.

눈을 마주친 그녀가 활짝 웃었다.

그녀 역시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피곤할 법도 하다.

그런데 오히려 묻는다.

“필요한 것 있어요?”

“괜찮아요.”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하나, 둘!”

셔터 소리와 함께 플래시가 터지며 모든 촬영이 끝났다.

사진작가가 사람 좋게 웃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사진은 다 찍었는데……. 서비스 컷 하나 찍어 드릴까요? 저기 서은서 씨 맞죠? 아까부터 들러리로 다니셨잖아요.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은데, 서은서 씨랑 이렇게 셋이 어때요?”

“네?”

성현과 서은서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사진을 찍으러 와서 가족이 아닌 사람과 사진을 찍는 게 조금 이상하게 생각돼서다.

하지만 어머니가 성현의 옷깃을 잡아끌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비스라잖아.”

사진작가가 어머니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어머니가 말씀 잘하셨네. 서비스는 받아야죠!”

어머니가 가운데 서고 서은서와 성현이 양옆에 섰다.

조금은 어색한 가운데 사진작가가 손짓으로 두 사람의 위치를 지정했다.

“서은서 씨, 조금만 더 어머니 곁으로 그렇죠. 아드님은 고개 약간만 드시고요. 좋습니다.”

정말 다정한 모습이 연출됐다.

사진작가가 흐뭇하게 미소 지으며 큰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모습이 렌즈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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