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먼저 달려든 것은 추영민이었다.
쐐애애액!
그는 엄청난 속도로 움직였고 순식간에 성현과의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곧 추영민의 검이 성현을 향해 휘둘렸다.
무시무시하게 빠른 쾌검에 성현을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 그 살기가 가득 머금어졌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성현이 잔발을 움직여 뒤로 물러섰고 추영민의 검은 허공을 갈랐다.
추영민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의 실력으로 성현을 베기는 어려웠다.
‘젠장!’
하지만 끝이 아니다.
성현은 긴장을 풀지 않고 시선을 옆으로 틀었다.
이유미의 공격이 남아 있었다.
“뒈져!”
그녀의 부엌칼이 성현의 어깨를 노리며 휘둘렸다.
성현이 몸을 트는 것으로 피했지만 그녀의 공격은 단발성이 아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녀의 공격은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대각선으로 짧게 끊어 치며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게 이유미의 무서운 점이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연계 공격.
‘잘난 척하더니!’
성현이 계속 뒤로 물러서자 이유미의 입꼬리가 휘어졌다.
별것 아니라고 판단한 거다.
추영민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방어를 염두에 두고 칼을 휘둘렀지만 지금은 오로지 공격 일변도다.
‘이것도 피해 봐라!’
파파파파팍!
이유미와 추영민의 합동 공격은 완벽했고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온 것처럼 깔끔했다.
하지만 더 대단한 것은 성현이다.
그 모든 공격을 피해 내고 있다.
세 사람의 싸움을 지켜보던 길창식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저…… 저…….”
길창식은 말했다.
이유미와 추영민이 랭커급이라고.
하지만 랭커급 두 명이 합동 공격을 하는데 여유를 부리는 사람이면.
“……누굽니까?”
길창식이 서은서에게 물었다.
하지만 서은서는 대답하지 않는다.
길창식이 다시 물었다.
“상위 랭커 중에 저런 몸놀림을 가진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누굽니까!”
보통의 계약자라면 상위 랭커의 전투를 분석하고 공부하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길창식은 그 공부가 도를 넘어섰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1~30위까지의 계약자는 머리카락만 보고서도 알아낼 수 있다고 자신할 정도였다.
좋게 말해 랭커 마니아.
당연히 그들의 전투는 모두 머릿속에 쑤셔 넣었다.
그런데 성현의 움직임은 그의 기억에 없었다.
길창식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누구지? 누구지?’
그러다가.
“서, 설마…….”
랭커에는 들지 않았지만 최근 떠오르는 가장 핫한 인물.
게다가 저 앞에 보이는 슈퍼카.
자신의 옆에 선 아름다운 여성.
그 모든 퍼즐을 맞춰 보면 딱 한 명이 떠올랐다.
아직은 모든 게 베일에 싸여 있지만 마녀와 싸워 이긴 사람.
길창식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 유…….”
서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 척하죠?”
길창식이 눈을 부릅뜨고 서은서를 바라봤다.
가면 속 그녀의 눈이 서늘하다.
그리고 길창식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입에 지퍼 채우고 있겠습니다.”
이 바닥에서 오래 사는 방법은 두 가지다.
상대보다 강하거나.
자존심을 부리지 않거나.
서은서가 가면을 쓰고 있지만 길창식은 이제 그녀의 정체도 예상하고 있었다.
페이트의 막내딸 앞에서 목에 힘을 주는 것은 지금 당장 죽고 싶다는 뜻.
길창식은 오래 살고 싶었기에 빠르게 꼬리를 내렸다.
서은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뭐든 말씀하십시오.”
“움직임만 봐도 알아요?”
“아, 네. 제가 랭커 마니아라서요.”
“그럼…… 저 사람과 싸워 이길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랭커 중에요?”
“네.”
길창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서가 부탁하지 않았어도 가늠해 볼 생각이었다.
누가 강한지를 따져 보는 것은 재밌기 때문이다.
길창식은 눈을 가늘게 뜨고 성현을 지켜봤다.
여전히 전투가 이어지는 중이었다.
“네가 나에 대해 뭘 알아!”
이유미가 성현을 향해 부엌칼을 휘둘렀고 성현의 눈빛이 씁쓸하게 변했다.
‘어떻게 아냐고?’
잘 알고 있다.
이유미와 추영민, 이들은 구악의 멤버다.
그리고 성현의 머릿속에 잠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마지막 터전이었던 동굴.
구악 토벌대를 피해 숨어 있던 곳인데, 발각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수천 명의 토벌대가 동굴을 향했고 이유미는 동료들을 탈출시키기 위해 혼자 그 앞에 섰다.
결과는 뻔하다.
그녀는 칼에 맞아 죽었다.
처량하게 쓰러졌고 적의 칼에 모욕을 당했다.
그녀의 마지막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리고 추영민.
이유미가 죽은 것을 보고 분노에 눈이 뒤집혔다.
그가 했던 마지막 목소리가 성현의 귓가를 스쳤다.
“난 원래 죽고 싶었어. 이참에 진짜 죽어 보지.”
죽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살기를 원했던 추영민은 토벌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역시 뻔했다.
성현이 본 것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었다.
성현이 창을 꺼내 들었다.
“조금 아플 거야.”
성현의 말에 이유미가 깔깔 웃었다.
“개소리!”
그녀는 성현의 경고를 무시하고 뛰어들었다.
그 순간 성현의 창이 휘둘렸고.
콰직!
이유미는 창이 휘둘리는 것도 볼 수 없었다.
허벅지 뼈가 부서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추영민이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성현의 팔을 노리며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성현의 창이 더 빠르다.
창을 빙글 돌린 후 쭉 밀어 넣었다.
칼의 움직임이 막히는 동시에 창을 아래로 찍었다.
콰직!
창은 놈의 손목을 가격했다.
동시에 추영민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검을 놓쳤고.
성현이 창을 비틀며 그의 정강이를 박살 냈다.
뻐억!
그렇게 단 한순간이었다.
추영민과 이유미는 바닥에 쓰러져 다리를 부여잡고 있었다.
“끄으으윽!”
고통 가득한 신음 소리만 울린다.
어이없을 만큼 쉽게 결정 난 승부.
기동성을 잃은 두 사람은 구석에 몰린 짐승처럼 성현을 경계했다.
성현이 그들의 앞으로 걸어가며 입을 열었다.
“너희는 끝까지 웃은 적이 없다.”
이유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미친 새끼야! 이렇게 해 놓고 어떻게 웃어! 정신병자 새끼.”
새끼, 새끼……. 입이 거칠다.
하지만 성현은 그녀의 거친 입을 신경 쓰지 않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네 아기, 소멸의 강에 가면 있을 거야.”
“뭐? 아기?”
이유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려왔다.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본다.
성현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난 언젠가 소멸의 강에 가야 해. 찾을 사람이 있거든.”
성현은 소멸의 강에 갈 생각이다.
소멸의 길을 택한 이서아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은 먼 이야기다.
소멸의 강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그 안에 정말 이서아와 같은 영혼이 있는지도 알 수 없어서다.
“하지만 계속 알아보는 중이야. 그러니까 기다려라. 가게 되면 네 아기도 찾아 줄게.”
이유미는 성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어쩌면 아기를 만날 수 있다는 것.
“행복하게 있어야지, 아기를 만나려면. 지금 그 모습으로 아기를 안을 수는 없잖아?”
이유미의 눈에서 참고 있는 눈물이 왈콱 쏟아졌다.
성현의 시선이 추영민에게 향했다.
추영민이 상당히 기대하는 눈빛으로 성현의 목소리를 기다린다.
하지만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네 아내는 없을 거야. 애초에 소멸된 게 아니니까.”
추영민의 아내는 죽었다.
짐승에게.
이 빌어먹을 세상에 태어난 죄다.
성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소멸의 강에 대해서는 잘 몰라. 하지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 또는 식물인간 그리고 소멸된 사람만 있다고 들었어.”
“나도 데려가줘.”
이유미였다.
그녀의 눈빛은 간절했다.
성현의 시선이 닿자 그녀가 말을 잇는다.
“내, 내가 직접 찾아야지. 내 아기…….”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녀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그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어! 이 정신병자 새끼야!”
또 새끼, 새끼…….
도대체 오늘 몇 번을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성현은 참았다.
회귀한 이유 중 하나.
구악 멤버의 행복이다.
그들은 성현을 구하기 위해 죽었다.
칼에 베였고 화살에 찔렸고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
“난 가야 해! 그 강이 어딘지는 몰라도 가야 한다고!”
그녀는 이제 다시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
존재의 커스터 마이징을 통하더라도 회복될 수 없다.
성현은 자식을 낳아 본 적이 없어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도와줄게. 나도 같이 간다.”
이번엔 추영민이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그가 이유미의 어깨를 다정하게 잡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현이 픽 웃었다.
‘행복해라.’
회귀 전, 두 사람은 서로 좋아했지만 각자의 이유로 서로를 멀리했다.
추영민에게는 짐승에게 잡아먹히며 사망한 아내, 이유미는 아기.
하지만 이번은 다를 것 같다.
두 사람은 조금 더 이른 시간에 가까워졌으니까.
그리고 이번에는 회귀 전처럼 불쌍하게 죽지 않을 거다.
“하우치.”
“네?”
“랭킹 1위 하우치한테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길창식의 말에 서은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길창식에게 성현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나 물어봤다.
그런데 갑자기 대한민국 No. 1 하우치라니.
“안 될 것 같다니요?”
“10분 안에 하우치가 이길 겁니다.”
“하!”
서은서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우치를 상대로 10분을 상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미친 평가였다.
서은서가 느릿하니 물었다.
“그럼 2, 3, 4위는?”
“사실 30위 이상은 하우치를 제외하고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연우만 해도 일부러 랭킹을 안 올리고 있어서 그 힘의 끝을 예상하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런데요?”
“하우치는 다르죠. 인간성이 쓰레기라 그렇지 그 실력은 진짜잖아요. 하우치라면 혼자 싸워도 마녀를 잡을 수 있을걸요?”
“그러니까…….”
“2위부터 30위 내의 사람은 누구와 싸워도 해볼 만하다는 겁니다. 확실하게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비슷할 것 같기는 합니다.”
길창식의 말이 정답은 아니다.
지연우처럼 그 실력을 숨기고 있는 사람은 분명 있으니까.
하지만 하우치라는 이름이 등장하자 서은서는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그 정도야?’
서은서는 사실 랭커에 관심이 없었다.
서준식이 후계에 오르며 랭커에 관심이 없던 이유와 같다.
랭커라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고 개인적인 힘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드의 마스터는 수백, 수천 명을 이끄는 단체의 장.
개개인의 싸움에 관심을 가질 만큼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자신의 길드에 랭커가 있다는 것은 뿌듯한 일이다.
조금 더 많은 의뢰가 들어올 테고 마케팅으로도 좋아서다.
“그런데, 어쩌죠?”
길창식의 말에 서은서의 시선이 틀어졌다.
“뭐가요?”
길창식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5명이 되어야 들어갈 수 있는데…….”
이유미와 추영민이 망가졌다.
저 몸 상태로 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창고로 이동해 회복을 하려 해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서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2명만 더 있으면 되는 거죠?”
잠시 후, 던전 앞에 선 것은 성현과 서은서, 길창식 그리고 무령과 또 1명의 복면인이었다.
무령과 복면인은 졸지에 던전 클리어에 참여하게 되었다.
길창식은 입을 ‘헤’ 벌린 채 무령을 보고 있다.
“보지 마라.”
무령이 낮게 말했지만 길창식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맞죠? 경호실장 무령.”
“하…….”
무령은 고개를 저으며 복면을 써 버렸다.
그리고.
“그런데, 괜찮으시겠어요?”
군인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일행을 바라봤다.
사망률이 90%에 가까운 위험한 던전이다.
그런데 급조된 5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합니다.”
군인이 말렸지만 서은서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군인은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고 던전을 들어가는 것은 성인 계약자라면 누구나 가능했다.
“허가하겠습니다.”
군인들이 총을 치웠고 일행은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거무튀튀한 문이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