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성현의 눈에 보인 것은 형광에 가까운 푸른 빛을 내뿜는 돌.
크기는 성인 남자의 주먹만 하다.
그 돌이 바닥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성현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게 왜 던전에 있는 거야?’
저 돌은 약 15년이 지나서야 사람들에게 공개된다.
즉, 지금 저 돌을 아는 사람은 성현뿐일 거다.
사람들은 저 돌을 이계의 피스라 불렀다.
그리고 피스의 권능은 크게 두 가지.
먼저 인간에게 엄청난 마력을 선물해 준다.
그리고 두 번째.
일정 개수의 피스를 모으면 이계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고 알려져 있다.
물론 지금도 창고를 통해 이계 시장으로 드나들기는 한다.
하지만 저 피스를 사용하면 판타지 소설의 포털처럼 이곳저곳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물론 성현이 사용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풍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저 피스를 처음 공개했던 사람이 지연우다.
성현이 알고 있던 권능의 사용법이 모두 거짓이라 해도 지연우가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반드시 이유가 있을 거다.
성현은 피스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단지 한 발 옮겨 방으로 향한 것뿐인데 농도 짙은 마력에 숨을 쉬기가 거북할 정도였다.
또 한 발 들어서자 물에 들어간 것처럼 걷는 것도 힘들어졌다.
게다가 엄청난 추위로 몸이 덜덜덜 떨린다.
마치 헐벗은 채로 북극에 남겨진 것 같다.
온몸에 마력을 두르고 있어도 마찬가지, 뼛속까지 얼어붙는 느낌이다.
성현은 잠시 걸음을 멈춘 후 눈을 가늘게 뜨고 생각에 빠졌다.
‘이건가?’
클리어되지 않는 던전에서 지연우가 찾아다닌 것.
그게 저 푸른 돌, 피스였던 것 같다.
저 피스를 처음 공개한 사람이 지연우였던 것을 생각해도 그렇고.
‘왜 이걸 찾아다녔고 어떻게 알고 있었지?’
성현의 생각은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닿은 곳은 지연우가 계약한 존재.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
플로르는 사람을 탐욕에 이르게 하는 존재다.
그녀가 지연우의 귀에 대고 속삭였을 거다.
“피스라는 게 있지만 찾지 마라. 그건 너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엄청난 힘을 보장해 주지만 욕심은 눈을 멀게하고 네 이성을 망가뜨릴 거다.”
보통 사람이라면 플로르의 말에 귀를 기울였겠지만 상대는 지연우다.
지연우는 극단적일 정도로 욕심이 많다.
그 말을 듣고 가만있을 리 없다.
‘플로르의 꼬임에 빠졌구나.’
성현은 한숨을 내뱉은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무리다.
엄청난 추위에 성현의 몸은 이미 뻣뻣하게 얼어붙었고 더 가까이 다가가면 동상처럼 변해 버릴 게 분명했다.
성현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완전히 방을 빠져나와 다시 문을 닫았다.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전진하기 위해 물러나는 것이다.
지금 할 일은…….
‘창고로.’
성현은 창고로 이동했고 곧바로 시장으로 달려갔다.
* * *
“……뭘 찾는다고요?”
“헬 파이어.”
꼬마가 배를 잡고 웃었다.
데굴데굴 구르다가 눈물까지 닦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정중한 태도를 취한다.
“고객님? 헬 파이어가 뭔지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어.”
말 그대로 지옥의 불꽃이다.
대상을 태워 없앨 때까지 또는 정해진 시간까지 끊임없이 타오른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헬 파이어를 찾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그가 회귀 전 피스가 공개되었을 때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당시, 지연우는 피스를 앞에 두고 사람들에게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존재의 명령을 듣고 살아야 합니까? 언제까지 기습적으로 나타나는 짐승을 보며 겁을 먹을 겁니까? 이 피스가 있으면 우리도 이계를 자유롭게 드나들며 전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때 지연우는 피스의 옆에 작은 촛불 하나를 켜고 있었다.
바로 헬 파이어였다.
놈은 헬 파이어를 장작불로 사용한 거다.
그게 없었다면 주변 사람들이 얼어 죽었을 테니까.
게다가 헬 파이어는 마력을 태우는 역할도 한다.
짙은 농도의 마력에서 조금은 편하게 숨을 쉴 수 있을 거다.
생각을 멈춘 성현이 꼬마를 바라봤다.
꼬마가 성현을 보며 어이없다는 듯 낄낄낄 웃고 있다.
“지구를 태워 잡수시려고요?”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있어, 없어?”
“없다면요?”
“찾으러 가야지.”
성현의 시선이 틀어졌다.
시선이 닿은 곳은 시장의 2층으로 향하는 문.
이계의 시장은 수없이 높은 빌딩과 같다.
높이 올라갈수록 더 좋고 희귀한 물건을 구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현이 지금껏 1층에 머문 것은 이 꼬마가 웬만한 것은 다 해결해 줬기 때문이다.
성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거래 상인을 바꿔야겠지.”
“하…….”
꼬마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그리고 부싯돌 하나를 꺼내 탁 내려 뒀다.
“10분짜리고요. 일단 불이 붙으면 10분 동안은 얼음의 여왕이나 바다의 군주에게 가져가도 끌 수 없어요. 가격은 100골드.”
100골드, 현금으로 따지면 10억.
“단골이니까 싸게 해 주는 거예요.”
개소리다.
발품을 팔면 8억 정도에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갱이 되는 것 같았지만 던전은 곧 사라진다.
그 안에 피스를 손에 넣어야 했다.
“콜.”
“불꽃을 담을 촛대는?”
불꽃을 만들어도 문제다.
그것을 놓아둘 촛대가 필요하다.
그게 아니면 헬 파이어는 던전을 불살라 버릴 거다.
“줘.”
“30골드.”
“콜.”
순식간에 13억이 사라졌다.
하지만 아직 성현의 주머니는 넉넉했다.
지난번 뢰피크르를 상대할 때 얻었던 돈이 충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꼬마가 손뼉을 짝 쳤다.
“부자 단골손님이 계셔서 저는 정말 행복해요.”
“그리고.”
“어? 필요한 게 또 있나요?”
“진통제, 있는 것 싹 다 줘.”
“엥?”
꼬마가 눈을 깜빡였다.
가지고 있는 진통제는 100개 정도.
그런데 이렇게 많은 진통제를 원한다는 것은…….
“설마, 헬 파이어로 불을 지르고 불나방처럼 불에 뛰어 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죠? 미친 것도 아니고.”
꼬마는 이상한 상상을 하고 있다.
그동안 성현의 행동이 상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아서다.
성현이 픽 웃었다.
“됐고, 줘.”
꼬마는 진통제를 탈탈 털어 성현에게 넘겼다.
그렇게 성현이 진통제를 가방에 넣고 있을 때다.
꼬마가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고객님?”
“말해.”
“구경하고 싶은데…….”
“뭘?”
“지금 호갱, 아니 고객님께서 하려는 것요.”
꼬마는 정보 상인이다.
그리고 지르힐을 돕고 있다.
성현을 통해 왕가의 재건이라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고 싶어서다.
그래서 성현이 하려는 해괴망측한 행동이 무엇인지 꼭 보고 싶었다.
꼬마의 간절한 눈빛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발…….”
성현이 조용히 웃었다.
“관람료 180골드.”
“네?”
180골드는 18억에 이른다.
헬 파이어와 촛대, 진통제를 판 돈을 합쳐도 손해다.
꼬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도둑놈도 아니고!”
“도둑놈?”
“하! 서울이란 동네는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더니.”
꼬마는 흥분했지만 성현은 느긋했다.
팔짱을 끼고 천천히 흥정을 시작했다.
“기분이다. 150골드.”
“저기요? 150골드는 땅 파면 나옵니까?”
“싼 거야.”
“싸다고요?”
“생각해 봐. 내 존재를 제외하면 너 혼자 단독 관람이야. 그리고 내가 뭘 하려고 헬 파이어를 샀을 것 같아? 궁금하지 않아? 어쩌면 또 기가 막힌 것을 보게 될지도 몰라. 149골드.”
꼬마는 마른침을 삼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사기꾼 새끼.”
* * *
성현은 다시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천장에 꼬마의 눈동자가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꼬마는 결국 기나긴 흥정 끝에 145골드를 주고 말았다.
성현이 천장을 보며 빙긋이 웃었다.
꼬마의 관람을 허락한 이유는 별것 없다.
성현은 꼬마가 왕가 재건을 원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힘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앞으로 성현이 할 일에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가자.’
던전이 사라지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15분.
그 안에 피스를 제압해야 한다.
성현은 한숨을 깊게 내뱉으며 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그 시각, 이계의 시장.
꼬마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앞을 보고 있었다.
앞에는 아지랑이처럼 공간이 일그러져 있고 홀로그램처럼 성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성현이 문을 열고 들어가던 것을 보던 꼬마의 눈이 찌푸려졌다.
바닥에 놓인 푸른 돌.
한눈에 피스를 알아본 거다.
‘저걸 찾았다고……?’
피스는 존재의 세상과 인간의 세상을 연결해 주는 힘.
문제는 그 마력이다.
인간이 견딜 수 없다.
피스에 손대는 즉시 심장까지 얼어붙을 거다.
아무리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라는 호칭을 받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말려야 하나?’
꼬마는 주먹을 살짝 쥐었다.
꼬마의 목표는 몰락한 왕가를 재건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세상이 전쟁으로 뒤덮여야 하는데, 예언에 따르면 그 시작이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다.
‘말려야 해!’
꼬마는 결정했다.
세상이 피로 물드는 날이 오면 성현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어쩌면 꼬마가 가장 먼저 성현을 씹어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꼬마에게는 성현이 필요했다.
‘살린다.’
꼬마가 벌떡 일어섰다.
그런데.
“참으셔야 합니다.”
노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꼬마의 시선이 틀어지자 검은 로브를 입은 노파가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세상은 예언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예언서를 기억하십시오.”
꼬마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예언의 두 번째 장이 있었다.
살육의 장 :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욕심 많은 자, 욕심 많은 어머니가 군을 이끌고 문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 둘 중 하나의 별이 떨어진다.
창조주가 원치 않던 세상이니 타락한 그대는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알게 되리라.
꼬마의 눈이 반짝였다.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든다고?’
해석해 보면 뢰피크르의 저주받은 피.
그 피를 흡수한 성현이 문을 만든다고 할 수 있다.
‘피스는 그 열쇠?’
하지만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다.
아무리 예언에 나와 있는 말이라 해도…….
‘인간이 피스를 견딜 수 있다고?’
성현은 아직 약하다.
제법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지만 아직이다.
피스의 힘을 견디기는 어렵다.
꼬마의 고민을 보던 노파가 입을 열었다.
“참고 지켜보는 것도 왕이 해야 할 일입니다.”
* * *
성현은 진통제를 입에 넣었다.
그리고 촛대 위에 헬 파이어의 부싯돌을 튕겼다.
그러자 촛불처럼 헬 파이어가 일렁였다.
하지만 크기만 작을 뿐이다.
뜨거움이 훅 느껴졌다.
피부가 촛농처럼 흘러내릴 것 같다.
‘좋아.’
성현은 촛대를 들고 피스를 향해 다가갔다.
한 걸음, 두 걸음.
하지만 오판이다.
다가갈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헬 파이어는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한겨울, 그것도 북극에서 촛불 앞에 앉아 몸을 녹이는 느낌이다.
추위가 뼛속을 얼렸고 숨 쉬기가 거북해졌다.
‘젠장.’
지연우가 공개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이미 피스의 힘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래서 헬 파이어로 견딜 수 있던 거다.
하지만 지금은 온전한 피스다.
‘젠장.’
어쩔 수 없다.
성현은 촛불 하나에 몸을 의지한 채 추위의 정점을 향해 걸어갔다.
그 순간.
“……살려 줘.”
성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디선가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설마……?”
피스다.
그곳에서 서글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피스에 엄지손가락만 한 소녀가 앉아 성현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