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나가고 싶어.”
소녀가 울 것같이 말했다.
하지만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소녀를 바라볼 뿐이다.
소녀가 간절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꺼내 줘, 제발. 부탁이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소녀의 목소리는 구슬펐다.
극심한 추위, 피스에 앉아 몸을 바르르 떠는 게 정말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성현의 머릿속은 소녀가 불쌍하다는 생각보다 놀라움으로 가득했다.
성현은 이 소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물의 정령’.
회귀 전을 떠올려 봐도 정령을 손에 얻은 인간은 전 세계에서 고작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
정령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고 여간해서 인간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주인으로 인정받으면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특히 물의 정령은 성현에게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성현은 번개의 권능을 사용하는 계약자.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광범위한 공격으로 상대를 괴롭힐 수 있다.
“……살려 줘, 추워.”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현은 생각을 멈추고 다시 정령을 바라봤다.
정령의 입술은 시퍼렇게 변했고 와들와들 떨고 있다.
딱 봐도 생명력이 뚝뚝 떨어지는 게 보인다.
시간을 지체하면 죽고 말 거다.
하지만 성현은 곧바로 돕지 않았다.
정령이 왜 이곳, 그것도 피스 위에 앉아 있는지는 확인해야 했다.
함정일지도 모른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야 하는 게 이계의 세상이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목숨을 잃을 수 있다.
“왜 거기에 있지?”
“뭐?”
“왜 거기에 있냐고 물었는데.”
“피스를 먹으러 왔다가 그만…….”
정령은 말을 멈추고 오들오들 떨었다.
피스를 먹는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거짓 같지는 않았다.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정령을 구하려면 피스 앞으로 다가가야 한다.
피스에 손을 대고 피스의 마력을 힘으로 찍어 눌러야 한다.
하지만 다가서는 것만 해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아직 피스까지 거리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뼈마디가 얼어붙는 게 느껴질 정도다.
조금 더 다가가면 심장이 얼어붙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생각은 없어.’
성현은 입을 꽉 다물었다.
애초에 성현의 목표는 극단적이었고 제로에 가까운 확률에 도전하는 중이다.
언제나 벼랑 끝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이유는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그러려면 이따위 추위에 지체할 시간은 없다.
성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진통제를 또 한 알 꺼내 입에 넣었다.
목걸이에 손을 댄 후 마법사의 힘을 제어해 주는 펜던트를 하나 끊었다.
정말 미련한 짓을 하려는 거다.
마법사의 힘을 끄집어내 추위를 이기는 방법!
더 큰 고통으로 지금의 고통을 찍어 누르는 멍청한 짓.
그리고.
“끄으으읍!”
예상대로 마법사의 마력이 온몸을 휘감으며 핏줄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붉게 충혈됐고 주저앉아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이제 추위 따위는 상관없다.
더 큰 고통이 몸을 갈기갈기 찢고 있었다.
성현은 진통제 하나를 더 꺼내 씹었다.
그렇게 하나 더, 하나 더.
조금이라도 통증이 사라질 때까지 씹고 또 씹으며 피스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이윽고 성현이 피스 앞에 섰다.
피스는 주먹만 한 돌, 푸른빛을 발산하며 성현을 도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피스에 앉은 정령이 바들바들 떨며 입을 열었다.
“……살려 줘, 살려 줘.”
처음으로 성현이 입을 열었다.
“시끄럽게 굴지 말고 기다려.”
그 목소리에 정령이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은 마지막 남은 진통제를 삼킨 후 눈동자를 틀어 피스를 바라봤다.
피스를 제압하는 방법은 피스에 손을 대고 더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성현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크게 숨을 내뱉은 뒤 천천히 피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피스가 성현의 손으로 덮였고 동시에 성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우우우!
피스에서 늑대의 하울링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소름 끼칠 정도의 냉기가 손을 통해 들어온다.
만만치 않을 것은 예상했는데 그 이상이다.
그래서 잠시 손을 떼려고 했지만 피스에 붙은 손이 떨어지지 않는다.
피스가 엄청난 냉기를 뿜어내며 블랙홀처럼 성현의 손을 빨아들이려 한다.
지옥의 불꽃이라 불리는 헬 파이어가 촛불처럼 꺼져 버릴 정도였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싸워야 한다.
성현이 마력을 집중하자 손끝에서 전기가 파직거렸다.
전기의 힘을 이용해 냉기를 누르려는 시도다.
하지만 실패, 냉기가 꾸역꾸역 몰려왔다.
“끄으으!”
성현의 이마에 심줄이 터질 것처럼 솟아났다.
‘하나로 모자라다면!’
성현의 주변으로 라이트닝 볼이 여덟 개 나타났고 그것들이 일제히 피스를 향해 쏘아졌다.
쾅! 쾅! 쾅!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 전기는 파직거리며 사라졌고 냉기는 그대로다.
저 작은 돌 안에 얼마나 많은 마력이 담겨 있는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피스의 힘은 바다 같았고 성현은 망망대해에 표류하는 느낌이었다.
‘해보자는 거지?’
하지만 성현은 이번에도 포기하지 않는다.
목걸이에 손을 대고 또 하나의 펜던트를 뜯었다.
동시에 마법사의 마력을 이기지 못한 성현의 손이 부풀어 올랐다.
그 시각, 이계 시장.
꼬마는 일그러진 공간을 통해 성현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턱을 매만지던 꼬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만 해도 꼬마는 인간이 피스를 제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현은 견디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어 시퍼렇게 변하고 이곳저곳으로 전기를 쏘아 대며 폭주하면서도.
‘버티잖아?’
꼬마가 중얼거렸다.
“만약에, 정말 만약에 예언대로 인간이 피스를 제압하면, 그래서 인간이 이계로 들어올 수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꼬마의 옆에 서 있던 노파가 허리를 굽혔다.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오랜 시간 우리는 너무 평화로웠습니다.”
꼬마가 깔깔 웃었다.
“전쟁?”
전쟁이 일어나면 거지가 왕이 되고 왕이 거지가 될 수 있다.
오늘의 성녀가 내일은 거리의 여인이 되는 게 전쟁이다.
세상의 축이 뒤틀어질 거다.
조용히 있던 존재들이 뛰쳐나올지도 모른다.
꼬마와 노파는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노파가 계속 말했다.
“왕가를 재건할 수 있으실 겁니…….”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꼬마가 손을 들었다.
“조용.”
노파가 입을 다물었고 꼬마의 시선은 일렁이는 공간을 통해 성현에게 집중했다.
공간을 집어삼킬 듯 포악하게 흔들리던 피스의 마력이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었다.
오히려 성현의 몸에서 분출된 마력이 공간을 장악하는 중이다.
성현이 마법사의 마력을 통해 피스를 제압하고 있었다.
꼬마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미치겠네. 정말 잡았잖아?”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인간이 피스를 제압했다.
꼬마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그동안 벌어 둔 돈이 얼마나 있지? 나도 슬슬 전쟁을 준비해야겠어.”
“알아보겠습니다.”
노파가 허리를 굽힌 후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꼬마의 시선은 다시 일렁이는 공간을 통해 성현을 바라봤다.
피스를 제압한 성현이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고 툭 쓰러지고 있었다.
위험한 것은 아니다.
성현이 엄청난 힘을 쏟아 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던 꼬마가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정말 마음에 들어.”
그런데 꼬마와 노파는 정령에 대한 이야기는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정령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 *
성현은 의식을 잃었다.
하지만 그 의식은 우주처럼 시커먼 어둠 속에 있었다.
검은 갑주를 입은 남자의 손바닥.
성현이 앉아 있는 곳이었다.
성현은 서늘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성현은 이 풍경을, 이 남자를 알고 있었다.
언젠가 환상 속에서 보았던 남자.
검은 투구 속 남자의 눈은 어디에도 없는 무언가를 바라보듯 초점 없이 공허하기만 했다.
그런데 돌연 그 공허한 눈에 시퍼런 살기가 타올랐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에게는 감정이 없어. 단지 ‘피스’를 움직일 뿐이야. 단순한 재미에 인간은 죽어 가지.
성현의 앞에 검은색 피스가 나타났다.
이 피스는 냉기를 뿜어내던 푸른색 돌이 아니다.
체스의 말이다.
그런데 마법사가 손을 까딱 움직이자 체스의 말이 모래처럼 스르륵 부서져 내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푸른색 돌, 피스다.
성현은 호칭의 권능을 받던 때를 기억했다.
산신령 같은 신과 여신이 마주 앉아 체스를 뒀고 체스의 움직임에 따라 전쟁이 일어났었다.
‘체스의 말 속에 있던 게 피스라고?’
추론하자면 피스란 신의 영물이다.
성현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을 때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신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난 자네에게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말했었다.
이어서 검은 투구 속 숨겨진 눈이 어둠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런데 넌 아직도 밟으면 곧 죽을 미물과 같아!
마법사의 살기로 가득한 목소리가 쩌렁거리며 울렸다.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와 싸웠던 성현조차 심장이 철렁거릴 정도였다.
마법사의 눈이 성현과 닿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하나의 힘을 개방해 주마.
그 말을 끝으로 성현의 앞에 붉은 마력이 둥실 떠올랐다.
크기는 축구공만 한데 그 안에 담긴 마력은 상상 이상이다.
그게 순간적으로 성현의 심장을 뚫었다.
퍽!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강해져라. 세상 모든 것들이 고개를 숙이도록 만들어라. 신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되어라. 그럼, 봉인된 신이 네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때, 그놈들의 목을 베어라. 불쌍한 여자를 구원하라.
성현이 눈을 번쩍 떴다.
호텔의 천장이 보인다.
‘기절했었나?’
피스를 제압하며 힘을 다 쏟았나 보다.
잠시 의식을 잃었고 이제야 눈을 떴다.
‘그런데 그건 또 뭐였지?’
그 짧은 시간에 잠깐 꿈을 꿨다.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
그리고 마법사가 보여 준 체스의 말과 피스.
‘신의 목을 베고 불쌍한 여자를 구원하라? 그건 또 뭔 말이야?’
알 수 없는 목소리를 떠올려 봤지만 해석하기는 어렵다.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몸 상태를 체크했다.
주먹을 쥐었다 펴고 통증이 있는 곳과 감각이 없는 곳을 살폈다.
‘좋아.’
체력이 바닥인 것을 제외하면 정상이다.
품에서 회복제를 꺼내 씹었다.
1, 2분쯤 지났을까? 몸에 활력이 돌았다.
퍼석했던 피부에 색이 돌기 시작했을 때 성현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며 상체를 일으켰다.
아직 완벽히 일어나기는 무리다.
척추가 쑤셨고 다리근육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성현은 벽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놓인 피스를 바라봤다.
푸른색 돌, 차갑기는 하지만 얼어붙을 정도는 아니다.
성현은 피스를 손에 쥐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령을 찾는 거다.
그때였다.
손가락 끝에서 시원함을 느꼈다.
눈동자를 움직이자 작은 물방울이 알알이 모이더니 반지처럼 변하고 있다.
이어서 조용히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
아까와 같은 구슬픈 목소리는 아니었다.
피곤은 하지만 조금은 편안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잘게…….
정령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엄청난 마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마력을 회복하기 위해 휴식을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
성현은 반지처럼 변한 정령을 툭툭 건드려 봤다.
완벽한 금속.
‘뭐…….’
당장 정령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하지만 손가락에 머문다는 것은 성현을 따르겠다는 의미다.
인간을 잘 따르지 않는 정령이 이 정도 행동하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잘 자라.’
성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던전의 남은 시간은 5분이다.
그 안에 던전을 빠져나가지 못하면 이계의 어딘가에 던져질 수 있다.
어쩌면 이계의 사막을 헤매다 죽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부족한 만큼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성현의 다리는 아직 완벽히 회복되지 않았다.
‘조금만…….’
그렇게 3분 남았을 때 성현은 비로소 완벽히 서서 다리를 툭툭 움직일 수 있었다.
‘가자.’
성현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렸고 곧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던전은 들어온 길의 역순으로 빠져나가야 한다.
제멋대로 다녔다간 미로에 갇히고 만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륵 닫혔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4층에서 3층, 그리고 2층에 도착했을 때 남은 시간은 고작 1분이었다.
‘젠장.’
성현은 거침없이 계단을 통해 1층으로 빠져나갔다.
천 마리의 짐승이 죽은 주차장을 지나 던전의 입구로 향했다.
두 다리에 최대한 힘을 줬다.
쉬이이익!
그런데 남은 시간이 4초, 3초, 2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