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던전의 입구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데 남은 시간은 이제 1초.
성현의 두 다리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고 말 그대로 죽을힘을 다해 지면을 박찼다.
‘더 빨리!’
콰아아앙!
성현의 몸은 바람 같았다.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속도였고 어느새 입구가 보였다.
‘됐어!’
성현이 입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제 닿기만 하면 끝!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손이 닿기 직전이었다.
손목시계는 0을 표시했다.
그리고 뒤늦게 성현의 손이 던전의 문에 닿았다.
다급히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혹시나 문이 열릴까 기대했지만 늦었다.
드드드드.
던전이 흔들렸고 먼지가 요동쳤다.
성현을 바라보던 꼬마의 눈동자가 깜빡이다가 사라진다.
성현이 미간을 찌푸렸다.
‘젠장!’
이제 던전과 함께 이계로 떠나야 한다.
하늘이 유리처럼 쪼개지며 쏟아졌다.
쾅! 쾅!
* * *
“아, 아직 안 나왔는데…….”
던전의 밖.
무령의 다급한 목소리에 서은서와 복면인 그리고 길창식의 시선이 던전의 문으로 틀어졌다.
던전의 문이 굉음과 함께 흔들리며 위에서부터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동시에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웨에에엥!
군인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혹시 모를 짐승의 등장에 대비했다.
총이 겨눠졌고 전차의 포탑이 회전했다.
“사격 준비 끝!”
전장의 서늘한 분위기가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분위기 속에서 서은서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춤주춤 문을 향해 다가갔다.
“어…… 어…….”
마치 영혼이 빠진 것 같은 눈동자였다.
그녀의 머릿속에 성현의 마지막 음성이 스쳤다.
“별것 없어요. 그러니까 혼자 할게요. 피를 담는 게 좋은 모습도 아니고.”
그녀가 중얼거렸다.
“별것 없다며…….”
그녀가 던전의 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타박타박 올라갔다.
군인들의 목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거기! 멈춰요! 멈춰! 더 움직이면 발포합니다! 멈추라고!”
던전은 인류의 논리를 넘어선 공간이며 밝혀진 게 많지 않다.
모든 게 미스터리하다.
그래서 사라지는 던전에 손을 댔을 때 어떤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S급 짐승이 나올 수도 있고 어쩌면 인간의 힘을 초월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는 일.
“멈춰!”
군인들은 다급했다.
탕! 탕! 탕!
급기야 허공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서은서가 총소리에 놀라 멈추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계약자라 해도 총에 맞으면 몸이 뚫리고 피를 흘린다.
비틀거리며 쓰러져 죽는다.
하지만 서은서는 총소리를 상관하지 않았다.
비틀비틀 사라지는 던전의 문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던전에 손을 대려 한다.
“아가씨!”
무령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서은서가 무령을 보며 고개를 저었고 간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켜.”
“유성현입니다.”
“비키라고!”
“유성현이라고요! 이렇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니까 아가씨를 놔두고 혼자 갔을 겁니다.”
서은서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눈물을 참으려는 거다.
무령이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세요. 유성현은 언제나 상식 밖으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니까 기다리면 나올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설움을 참으며 그녀의 몸이 작게 흔들릴 때 순간적으로 무령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가 서은서만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아가씨, 보는 눈이 많습니다. 기자도 있고 군인도 있습니다. 카메라로 이곳을 찍고 있어요.”
서은서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페이트 길드의 막내딸이며 후계를 노리는 사람이다.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를 숨기고 살아야 한다.
무령이 계속 말했다.
“아가씨가 가면을 쓰고 있지만 길창식이란 놈이 아가씨의 정체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가씨가 타고 온 자동차는 대한민국에 몇 대 없습니다. 조금만 조회해도 정체를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
“여기서 눈물이라도 보이는 순간 어떤 구설수에 오를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서은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으면?”
“죄송합니다.”
“됐어.”
서은서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녀는 서은서이기 전에 페이트 길드의 막내딸이다.
많은 부분에서 스스로를 포장해야 한다.
그게 페이트 길드에 투자한 주주들을 위한 길이다.
서은서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사이 던전의 문은 스르륵 모습을 감췄지만 서은서는 상관하지 않았다.
담담히 계단을 내려갈 뿐이다.
그러자 상주하고 있던 기자들이 몰려왔다.
그들이 서은서를 향해 마이크를 들이민다.
“마지막 도전자였는데요!”
“던전이 사라졌습니다.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죠?”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기자들을 둘러보던 서은서가 흰 가면을 벗어 던졌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무령이 깜짝 놀랐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서은서의 눈빛은 극히 이성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흰 가면을 벗었지만 페이트 길드의 서은서라는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를 알아본 기자들이 잠시 눈을 깜빡이다가 “와!” 소리와 함께 더 거세게 질문했다.
“페이트 길드가 나선 것이었습니까?”
“천 마리 클리어 조건을 해결했나요?”
무령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멀찍이 떨어져 서 있는 복면인의 옆으로 다가갔다.
무령이 다가오자 복면인이 낄낄 웃었다.
“무령아, 서은서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무섭지 않아?”
던전의 입구에 서 있던 서은서는 분명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녀의 여린 어깨가 그 떨림을 보여 줬다.
그런데 기자들을 만나자 돌변했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복면인이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유성현이 던전에 갇힌 상황에서도 페이트 길드의 이미지를 생각하고 있어. 저렇게 갑자기 얼굴을 공개하면 다른 길드에서 포기한 던전을 우리만 신경 쓴 것처럼 포장되거든. 대단해, 정말.”
무령은 대답하지 않았다.
씁쓸한 얼굴로 서은서를 바라볼 뿐이다.
서은서는 계속해서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5명만 들어갈 수 있는 던전, 게다가 스페셜이라는 이름에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 페이트 길드는…….”
서은서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찢어지는 중이었다.
‘당연히 돌아올 거라 믿어요. 예지자잖아요.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알고 들어갔겠죠. 미리 말해 줬으면 좋았을 텐데……. 기다릴게요, 최대한 웃으면서.’
* * *
“하…….”
그 시각, 성현은 굳게 닫힌 던전의 문을 보며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잠시 크게 당황했지만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최대한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보기로 했다.
‘결국 던전 클리어는 실패했어.’
클리어의 조건이 호랑이를 죽이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피스를 부수는 것이었는지, 그것은 모른다.
어쨌든 둘 다 실패.
성현은 호랑이를 죽이지 않았고 피스 역시 제압했을 뿐이다.
‘그래서 스페셜 던전은 어딘가로 옮겨 왔고.’
스페셜 던전은 분명 이계 어딘가로 이동했다.
‘이 문이 열릴까? 아니면 계속 닫혀 있을까?’
성현은 굳게 닫힌 던전의 문을 한참이나 서성였다.
하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이럴 때는…….
“지르힐?”
지르힐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곧장 그녀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이곳은 이계다. 창고를 통해 인간 세상으로 옮겨 줄 수는 없다.
“아, 그건 알아. 그런데 오미로 베루스를 호출할 수는 있다는 거지?”
-그건 가능하다.
“그나마 다행이네.”
던전에 갇힌 최악의 상황이다.
하지만 성현은 시원하게 웃었다.
회귀 전에도 가끔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계의 어딘가를 헤맸고 식량이 떨어져 짐승을 사냥해서 먹었던 일.
그 맛은 생고무와 플라스틱을 태워 먹는 것 같았고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런데 다행?
“거기에 식량을 저장해 뒀잖아.”
성현은 틈만 나면 고추장과 통조림, 라면 등 장기간 보관할 수 있는 식량을 보관해 뒀다.
그 덕에 음식에 대한 것은 걱정 없었고, 야외에서 먹고 자는 것이야 수십 년 동안 해 왔던 일이었기에 익숙했다.
성현이 손가락으로 던전의 문을 가리켰다.
“그럼 다음 질문. 열릴까?”
-열릴 것이다.
“그것도 다행이네.”
만약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 갇혀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이 걸릴지, 몇 년이 걸릴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 그것도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문이 열린다면 어떻게든 이계 시장으로 찾아가면 된다.
“여기가 어딘지 알아?”
-죽은 자의 사막.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알고 있는 곳이다.
바로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의 영역.
뢰피크르를 사냥한 후 성현이 다음 목표로 생각한 게 ‘나모르’였다.
‘나모르…….’
성현은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인간과 존재의 전쟁이 있었을 때, 당시 인간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 중 하나가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다.
나모르가 엄청나게 강한 존재라서 두려워한 게 아니라 놈의 권능이 사체를 움직이는 강령술이기 때문이다.
놈의 권능으로 죽은 아기가 엄마를 향해 칼을 들었고 사랑하는 여인이 남자의 심장에 못을 박았다.
인간이 상대한 것은 존재나 짐승이 아니라 수백, 수천의 시체였다.
인간은 두려움에 떨었고 몸서리쳤다.
그래서 성현은 나모르와 싸워 보고 싶었다.
성현이 앞으로 사용할 전술이 나모르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모르의 영역이라니.
-참아라.
성현의 눈빛을 보고 그 마음을 느낀 지르힐이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은 아니다.
성현이 낄낄 웃었다.
“참아야지.”
나모르는 군주다.
뢰피크르 같은 마녀 수십 마리가 주변을 지키고 있다.
지금 성현의 힘으로 그 마녀 1마리도 감당하기 힘든데 수십 마리에 군주까지 추가되다니.
감당하기 힘들다.
“그런데 지르힐?”
-말하라.
“내가 정말 마녀 1마리도 감당하기 힘들까?”
-뭐라?
성현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 동작 하나하나에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검은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성현은 방금 냉기를 견디며 피스의 권능을 흡수했다.
그뿐만 아니라 목걸이의 펜던트를 뜯어냈다.
몸에서 마법사의 힘이 날뛰는 중이다.
그리고 성현의 머릿속을 스치는 마법사의 목소리.
-하나의 힘을 개방해 주마.
무의식의 세상에서 마법사는 성현의 몸에 붉은 마력을 강제로 주입했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핏줄이 폭발할 것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그 모든 힘이 외친다.
-다 부숴 버려라.
-파괴해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죽여라.
-죽여라, 죽이고 또 죽여라. 전부.
게다가 성현의 원천이 되는 지르힐의 권능도 만만치 않다.
그 자체가 세상의 분노라 불리는 번개다.
그 폭력적인 힘이 만나며 소용돌이친다.
지금 당장 사악한 존재를 찾아 찢어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솟구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그그그극! 돌이 갈리는 소리가 들렸고 던전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밝은 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건조한 사막의 바람이 훅 느껴졌다.
그리고 성현의 눈에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