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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09화 (109/252)

109화

죽은 자의 사막, 몇백만 년 동안 비가 오지 않은 곳이다.

이곳의 건조한 기운은 생명의 수분마저 앗아 가 버린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곳에 처음 오면 당황하기 마련이지만 성현은 담담했다.

이곳에 온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회귀 전, 존재와의 1차 전쟁.

지연우가 앞장서서 처음으로 진격했던 존재의 영역이 바로 이곳이었다.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의 영역.

그리고 성현 역시 이곳에 들어와 피 말리는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래서 이 사막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다.

성현은 윗옷을 벗어 둘둘 말아 얼굴을 가렸다.

건조한 기운을 막기 위해서다.

그리고 던전의 문 앞에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붉은 모래가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암담할 정도다.

들렸던 이야기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사막이 아니었다.

브라질의 아마존처럼 정글이 있었고 크고 깊은 강이 있던 곳이다.

하지만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가 자리 잡으며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나무는 죽었고 강은 메말랐다.

땅은 생기를 잃었고 하늘은 모래 바람에 가려졌다.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은 후 한 걸음 옮겼다.

그런데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럽다.

이곳에는 모래만 있는 게 아니다.

땅속에 사막에 적응한 온갖 짐승이 숨어 있어서다.

나모르의 명령을 받는 놈들.

그리고 지금 그놈 중 하나가 나타났다.

스스스슥!

모래가 꿈틀거리며 움직였고 그 안을 헤치며 성현의 앞으로 다가오는 녀석.

데저트 스네이크.

몸은 사막과 같은 붉은 황토색.

크기는 약 20m.

생명체를 찾으면 독을 뿜어 마비시키고 몸이 굳은 상대를 한입에 삼켜 버린다.

놈은 이 사막에서도 포식자로 통한다.

그런 놈이 독니를 드러낸 채 엄청난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쉬이이익!

성현은 데저트 스네이크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품에서 창을 꺼내 길게 펼친 후 자세를 낮췄다.

그 순간 성현의 머릿속에 지르힐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굳이 싸울 필요 없다.

“이유는?”

-빠져나갈 방법을 찾았다.

“뭐지?”

-넌 피스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포털을 만들어 인간 세상으로 떠나면 된다.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뭐라?

“지금 해야 할 일이 생겼어. 저 뱀의 이빨을 뽑아 버리고 싶어졌거든.”

-그대, 죽은 자의 사막은 위험하다! 게다가 지금 그대의 몸은 정상이 아니다!

지르힐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지금 성현의 몸으로 마법사의 힘을 제어할 수 없다.

그런데 성현은 피스를 제압하기 위해 목걸이의 펜던트를 모두 뜯어낸 상태.

거기에 피스의 힘까지 몸에서 요동치는 중이다.

아니, 그 전에 뢰피크르의 힘도 모두 흡수하지 못했다.

즉, 성현의 몸에서는 지르힐의 권능, 마법사의 힘, 피스의 마력과 뢰피크르의 피가 제멋대로 난리를 치는 중이다.

자칫 힘의 폭발로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을 수도 있다.

지르힐의 메시지가 거칠게 들려왔다.

-그대! 강제로 널 움직이겠다. 저 뱀 1마리가 문제가 아니다. 저놈을 죽이면 또 다른 놈들이 찾아올 거다.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지르힐? 우리 2시간만 연락 끊고 있자.”

-뭐?

존재는 계약자의 일상을 24시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지르힐과 계약을 할 때를 기억하면 성현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원할 때, 네가 나를 볼 수 없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지르힐은 이렇게 허락했다.

“그대가 내 눈을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은 하루 최대 2시간이다.”

그것이 성현과 지르힐의 계약 사항 중 하나였다.

-그대!

“그럼, 조금 이따가 봐.”

성현은 거침없이 권리를 이행했고 지르힐의 메시지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2시간 동안 성현은 완벽한 자유를 얻은 것이다.

성현은 다가오는 데저트 스네이크를 보며 창을 겨드랑이에 끼웠다.

자세를 더욱 낮추고 놈을 기다렸다.

순간 데저트 스네이크가 모래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카아아악!

놈은 자신이 포식자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은 넓고.

“뒈져!”

성현은 생태계 교란종이었다.

콱!

성현의 창이 데저트 스네이크의 목구멍에 처박혔다.

놈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붉어졌지만 성현은 망설이지 않고 창을 더 쑤셔 넣었다.

퍽!

창끝이 데저트 스네이크의 뒤통수를 뚫고 나타났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데저트 스네이크가 몸을 비비 꼬았다.

하지만 성현은 놈을 놓아주지 않았다.

창을 움직여 놈의 몸을 콱콱콱 쑤셔 구멍을 뚫어 버렸다.

짧은 순간이었다.

데저트 스네이크는 더 움직이지 못했고 그대로 죽어 버렸다.

성현이 놈의 몸에서 창을 뽑아낸 뒤 놈의 피를 툭툭 털었다.

이런 사막에서 피 냄새를 뿌리는 것은 위험한 행동이다.

하지만 성현은 일부러 더 넓게 피를 뿌렸다.

건조한 바람을 타고 데저트 스네이크의 피 냄새가 널리 퍼질 수 있도록.

그리고 피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성현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곳저곳에서 놈들이 움직인다.

땅속에서 움직이는 데저트 스네이크만 여덟이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런데 성현은 빙긋이 웃었다.

‘이래야 벼랑 끝이지.’

성현은 최대한 빠른 시간에 강해져야 한다.

대멸종의 시간이 다가오는 중이었고 존재와의 전쟁이 코앞에 닥쳐 있다.

모든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려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야 한다.

‘와라.’

성현이 창을 빙글 돌리며 놈들을 기다렸다.

* * *

이계 시장.

꼬마는 성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던전이 무너지며 성현의 모습을 놓치고 말았다.

일렁이는 공간에 마력을 주입해도 마찬가지다.

성현을 찾을 수 없다.

꼬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탈출은 실패한 것 같고. 이계 어느 곳에 던져진 것 같은데.’

이계는 인간이 알고 있는 우주보다 넓다.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만 해도 38만 킬로미터인데, 우주보다 더 넓다는 것은.

‘미아가 되어 늙어 죽을 가능성도 존재한다는 거야.’

이계 어딘가를 떠돌다가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머리를 쥐어뜯던 꼬마가 벌떡 일어섰다.

“가 봐야겠어.”

꼬마가 주문이 그려진 양피지 한 장을 꺼낸 후 북북 찢었다.

그러자 양피지에서 금빛이 일렁이며 꼬마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잠시 후.

꼬마는 이끼가 가득 낀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젠장,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지르힐이 갇힌 탑이었다.

빙글빙글 계단을 걸어 가장 꼭대기에 도착해야 지르힐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그 높이가 만만치 않다.

이미 구름보다 더 높은 곳을 오르고 있었지만 꼭대기는 아직도 멀었다.

“젠장, 젠장, 젠장.”

양피지를 사용해서 탑의 꼭대기에 도착하면 좋겠지만 1층이 한계였다.

나머지는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

그렇게 정상에 도착한 꼬마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노크했다.

똑똑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문이 끼이익 녹슨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에는 쇠사슬에 묶여 벽에 걸린 지르힐이 보였다.

자주 보는 모습이지만 지르힐의 모습은 언제나 참담했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름답지만 벌거벗겨진 채 쇠사슬에 묶여 있고 눈은 붕대로 가려져 있다.

숨 쉬는 것조차 쇠사슬에 구속되어 힘들어한다.

그녀는 그렇게 억겁의 시간을 갇혀 살아왔다.

존재들은 지르힐을 보며 신의 분노 또는 버림받은 악이라 부른다.

하지만 꼬마는 지르힐을 보며 날개가 부서져 망가진 천사처럼 느껴졌다.

“어떤 일이냐?”

지르힐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꼬마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지르힐이 안쓰럽다는 생각을 숨긴 채 낄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지르힐 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유성현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왔습니다. 지켜만 보기에는 너무 답답해서요.”

“10분 남았다.”

“네?”

“유성현과 계약했던 것이 있어서다.”

지르힐의 목소리는 착잡했다.

“계약이라뇨?”

꼬마는 지르힐에게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존재가 인간에게 대놓고 2시간이라는 자유를 줬다는 게 황당했지만.

“유성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네요.”

인정하고 말았다.

상대는 성현이었다.

지금껏 이계의 정보 상인이라 불리는 꼬마의 상식에서도 벗어난 행동을 해 왔다.

그래서 이보다 더한 일을 한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죽은 자의 사막에서 도대체 뭘 하려고 그런 것일까요?”

“글쎄.”

지르힐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성현의 몸은 터지기 직전의 시한폭탄과 같다.

엄청난 힘을 갖고 있지만 극단적이다.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위험한 법.

그런데 성현은 날뛰고 있다.

‘폭발해 봐! 죽어도 상관없어!’라고 외치는 것 같다.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었다.

‘죽지 않아 다행이지.’

그나마 안심하고 있는 것은 성현의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모습도 볼 수 없는데 생명력까지 느껴지지 않는다면 미쳐 버릴 거다.

그때였다.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은데…….”

꼬마의 목소리에 지르힐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지르힐과 꼬마는 성현의 의도에 의문을 가졌고 마침내 10분이 지났다.

그리고 공간이 일렁거리며 홀로그램처럼 성현의 모습이 나타났다.

지르힐은 성현과 계약을 했기 때문에 홀로그램을 통해 지켜볼 필요가 없다.

하지만 꼬마를 위해 펼친 거다.

“감사합니다, 흐흐.”

꼬마가 웃으며 홀로그램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뭐 하는 걸까요?”

꼬마가 더듬거렸다.

성현은 짐승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잔인할 정도의 살육의 현장이 펼쳐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주변에는 수백 마리의 짐승들이 죽어 있었다.

뱀, 전갈, 독충 등등.

그런데 성현의 행동이 이상했다.

죽은 짐승을 땅속에 파묻고 있다.

건조한 바람에 힘들어하면서도 땅을 파고 묻는 행동을 반복하는 중이다.

“또 뭘 하는 게냐…….”

지르힐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끝.”

성현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짐승을 모두 파묻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죽겠네.”

성현의 온몸에는 핏줄이 솟아나 있었다.

짐승과 싸우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지르힐의 걱정대로 힘을 통제하는 게 더 어려웠다.

조금만 힘을 써도 피를 토했고 핏줄이 터져서다.

어쨌든 견뎠다.

다시는 못할 짓이지만.

-뭘 하는 거지?

지르힐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성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필요할 것 같아서.”

-필요하다?

“어.”

성현이 발로 땅을 툭툭 밟으며 입을 말을 이었다.

“조만간 전쟁이 일어날 거야. 내가 일으키는 게 아니야. 지연우가 움직이겠지. 이건 필연이야.”

지연우는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이 인류를 위한 지도자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난 그 물꼬를 이곳에 틀어 줄 생각이야.”

성현의 첫 번째 목표는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다.

놈에게는 수십 마리의 마녀들과 수백, 수천의 짐승들이 있다.

당연하지만 성현 혼자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세력이 필요하다.

“지연우의 세력과 함께 올 거야. 지연우는 전쟁을 원하고 난 나모르를 원하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이용해야지.”

성현의 시선이 방금 파묻은 짐승들의 무덤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사체는 그때 쓸 거야, 나모르와 싸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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