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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10화 (110/252)

110화

* * *

“사체를 전쟁에 사용한다고?”

-어.

지르힐이 갇힌 탑.

그녀는 성현의 건조한 메시지를 받았다.

그리고 잠시 말을 잊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이 머릿속에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래 속에서 일어나는 짐승의 사체.’

문제는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도 강령술을 사용한다.

성현과 나모르가 붙어 싸우는 폭력의 한복판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뒤엉켜 싸운다.

피를 토하고 살점이 떨어진다.

산 자가 죽은 자가 되어 친구를 물어뜯는 기형적인 전투.

지르힐이 묘하게 웃었다.

‘재밌겠어.’

지르힐은 전장의 한복판에 자신의 번개를 떨어뜨려 모두를 태워 죽이고 싶었다.

그리고 상상을 이어 가며 그녀의 손이 번개를 떨어뜨리듯 움직였다.

하지만.

덜컹.

그녀는 쇠사슬에 묶여 있다.

일정 이상 팔을 움직일 수 없다.

하얀 손목에 새빨간 상처만 남길 뿐이다.

몇 번을 휘둘러 보려 했지만 마찬가지다.

덜컹.

덜컹.

지르힐의 표정이 슬픔으로 가득해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성현에게 마력과 권능을 공급해 주는 게 전부였다.

잠시 그렇게 있던 지르힐이 꼬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유르라헬의 피가 필요하다. 유르라헬의 피를 가져오라.”

유르라헬의 피가 있어야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지르힐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안타까운 목소리에 꼬마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금방 가져오겠습니다.”

그런데 고개를 숙인 꼬마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지르힐이 풀려나고 마법사의 권능이 제 힘을 찾으면…….’

지금껏 거짓된 평화를 이어 오던 이계의 땅은 지옥으로 변할 거다.

죽고 죽이고 또 죽는 그런 세상이 펼쳐질 게 분명하다.

‘그럼, 나는 그 혼란을 집어삼키고 왕가를 일으킨다.’

꼬마의 눈이 번쩍였다.

모든 것을 파괴 후 존재의 세상을 끝내려는 지르힐.

파괴 후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꼬마.

파괴라는 과정은 같지만 그 끝은 다르다.

각자의 이유와 목적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다.

꼬마가 입술을 핥았다.

‘그때까지는 한배를 타야 해.’

꼬마가 시선을 들어 지르힐을 바라봤다.

그는 안쓰러운 모습으로 쇠사슬에 묶여 있는 지르힐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싸워야 해. 그런데…… 풀려난 지르힐을 막을 수 있을까? 폭주한 지르힐을 이길 수 있을까?’

꼬마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렀다.

* * *

짐승의 땅, 성현이 근무하는 부대 근처.

황량한 벌판에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 지름 30m의 마법진이 그려지더니 기하학적인 문양이 채워졌고 황금색 빛이 번쩍였다.

그리고 성현이 나타났다.

이것이 피스를 통해 만들어 낸 문이었다.

이 문을 통하면 자유롭게 이계를 드나들 수 있다.

지금의 세상에서 이 문을 사용해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성현은 회귀 전 몇 번이나 사용해 봤다.

그래서 놀라움은 없었다.

덤덤한 표정으로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하…….”

그리고 자신의 손을 살폈다.

푸른 돌, 피스가 보였다.

그런데 먼지처럼 푸스스 사라지고 있다.

이계의 문을 만들며 그 힘을 다해서다.

이렇게 될 것 역시 알고 있었기에 성현의 눈에 다른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피스의 힘을 흡수할 만큼 흡수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성현은 손을 툭툭 털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익숙한 환경이다.

‘잘 도착했네.’

여기는 30분쯤 걸어가면 초소가 있는 곳.

하지만 성현은 곧장 부대로 가지 않았다.

‘창고.’

창고에는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현이 나타나자 지르힐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테이블에 펜던트를 만들어 뒀다.

성현의 시선이 틀어졌다.

마법사의 능력을 제어하기 위한 펜던트 8개가 보였다.

모양은 납작한 원형이다.

“미적 감각은 참…….”

-참, 뭐?

“제로에 가까워.”

성현은 툴툴대면서 목걸이에 펜던트를 달았다.

착용하자 요동치던 심장과 터질 것 같은 핏줄이 조금은 안정되었다.

“그런데 지르힐? 마녀의 피도 제어할 수 있을까?”

이계의 사막에서 짐승과 싸울 때였다.

고향에 온 것을 느꼈는지 마녀의 피가 미친 것처럼 날뛰었다.

자칫 피가 폭발해 죽었을지도 모른다.

-마녀의 피?

“어.”

-제어할 수는 있다. 그런데 앞으로 일어날 문제는 그게 아닐 거다.

“그럼?”

-정령.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의 손가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성현의 손에 채워진 푸른색 반지, 물의 정령이다.

-정령 중에서도 상급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귀족급은 되겠지.

“그런데?”

-인간과 계약하는 정령은 자아가 없거나 천박한 신분을 가진 족속이다. 그래서 인간이 통제할 수 있었지만 귀족급이라면 말이 달라진다. 날뛰면 통제할 수 없을 거다.

“무슨 말이야?”

정령은 계약하기가 어려울 뿐 계약 후에는 계약자를 위해 물심양면 최선을 다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통제할 수 없을 거라니.

지르힐의 설명이 이어졌다.

-인간 중에도 그대처럼 버릇없는 자들이 있지. 똑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제멋대로 행동하며 자란 것이 귀족이다.

성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버릇이 없다니.

죽은 자의 사막에서 멋대로 연락을 끊어 버린 게 마음에 남아 있나 보다.

-어쨌든, 잘 자고 있는 정령은 잠시 쉬라 하고.

성현의 목걸이에 금빛 안개가 흩뿌려지더니 2개의 펜던트가 만들어졌다.

-하나는 마녀의 피를 제어하는 펜던트고 또 하나는 피스의 힘을 제어하는 것이다.

“땡큐.”

-10골드를 가져가지.

“서비스 아니었어?”

-그런 것은 말 잘 듣는 예쁜 아이에게 해 주는 것이란다, 그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

나지막하지만 선명하게 들려오는 토라진 목소리에 성현은 “쪼잔해.”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잠시 후.

성현은 다시 짐승의 땅으로 돌아왔다.

몸 상태를 확인해 봤지만 이상은 없다.

펜던트 덕인지 폭발할 것 같던 힘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성현의 시선이 손가락으로 향했다.

정령이 잠들어 있는 푸른색 반지.

성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적어도 귀족 이상이라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르힐의 걱정하는 모습을 기억하면…….

‘기대되네.’

성현이 빙긋이 웃었다.

* * *

“휴가 복귀했습니다.”

휴가는 며칠 더 남았다.

그런데 일찍 복귀하다니.

빗자루를 들고 초소 앞을 쓸던 박상문 하사가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왜? 무슨 일 있어?”

“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빨리 와? 차였어? 아니면 사고 쳤어? 첫 휴가를 이렇게 일찍 복귀하는 놈이 어디에 있어!”

박상문 하사가 성현의 양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다가 성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성현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죽은 자의 사막에서 짐승을 상대하느라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였기 때문이다.

지금도 바지 밑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멀뚱멀뚱 성현을 보던 박상문 하사가 얼굴이 허옇게 질려 다급히 외쳤다.

“초소장님! 초소장님!”

“왜!”

3층에서 창문을 열고 밖을 향한 이창민 중사가 성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너 왜 그래!”

설명하는 데 한참 걸렸다.

“던전에서 이계의 사막으로 옮겨졌습니다.”

이곳으로 오기까지의 과정.

사막에서 짐승을 죽였다거나 피스를 얻고 정령의 반지를 얻었다는 등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존재의 도움을 받아 길을 찾아왔다고 설명했다.

“게임에서 나오는 것처럼 포털 같은 것이 열렸고 그걸 타고 왔어요.”

그런데도.

“……그게 가능하다고?”

믿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가 보시겠어요?”

“일단 씻고 옷부터 갈아입어.”

이창민 중사의 지시에 성현은 옷을 갈아입은 후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두 사람과 함께 이계의 문으로 향했다.

초소에서 30분 떨어진 곳이며 조만간 이 문을 통해 이계와의 전쟁이 벌어질 것이다.

어차피 알게 될 것, 숨길 필요는 없었다.

“이게 이계의 문이라고?”

이창민 중사의 말에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짐승이나 마녀가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처럼 우리도 이계로 갈 수 있다는 거지?”

“네.”

“인간들이 가만히 있을까?”

성현은 이창민 중사에게 전쟁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창민 중사는 자연스레 전쟁을 떠올렸다.

지금껏 인간은 당하기만 했다.

짐승 때문에 도시를 버렸고 피붙이가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 이제 역으로 공격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인간은 결코 선하지 않다.

당하면 그만큼 돌려준다.

전쟁이 일어날 것은 당연했다.

“들어가도 되나?”

이창민 중사의 말에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열린 문입니다.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자유롭죠.”

이창민 중사가 이계의 문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진다.

성현과 박상문 하사도 그를 쫓아 걸었고 곧 눈앞의 시야가 바뀌는 것을 느꼈다.

다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었다.

죽은 자의 사막.

이창민 중사가 주변을 슥 둘러본 후 손을 뻗었다.

그가 가진 권능은 물건을 옮겨 오는 것이다.

“K5.”

동시에 이창민 중사의 손에 권총이 쥐였다.

손에 쥐인 권총을 보며 이창민 중사가 슬쩍 웃었다.

던전에는 현대 무기를 옮길 수 없었지만 이계는 또 달랐다.

현대 무기를 불러올 수 있었던 거다.

탕!

이창민 중사가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다.

총소리는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의해 사라졌지만 이창민 중사는 만족한 모습이다.

“전쟁을 벌여도 이길 가능성이 있겠어.”

현대 무기로 존재와 싸워 이기기는 어렵다.

물리 타격이 먹히지 않는 ‘안개’나 ‘물’로 된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짐승은 끝없이 몰려오지만 인간이 가진 탄알은 한계가 존재한다.

하지만 현대 무기는 분명 위협적이다.

군인이 짐승을 제압하고 계약자들이 존재를 상대한다면…….

“어쩌면 이길 수도 있어.”

이창민 중사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후.

이창민 중사가 모래에 털썩 주저앉았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가 장관이기는 하네.”

멀리 태양이 지고 있었다.

지평선을 통해 보는 붉은 노을은 감성에 젖을 만했다.

물끄러미 노을을 보던 이창민 중사가 입을 열었다.

“내 권능이 가장 쓸모 있을 때가 언제인지 알아? 바로 이럴 때야.”

이창민 중사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맥주 세 캔이 나타났다.

이창민 중사가 빙긋이 웃으며 성현과 박상문 하사에게 맥주를 건넸다.

이창민 중사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입을 열었다.

“맛있지?”

박상문 하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안주는 없습니까?”

“있지.”

이창민 중사가 다시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 육포가 놓였다.

육포를 물끄러미 보던 박상문 하사가 눈을 깜빡였다.

“어? 이거 제 냉장고에 있던…….”

“아, 맥주도 네 거야. 몰랐어?”

“네?”

“내 능력은 좌표를 알고 있어야 가져올 수 있잖아. 그래서 익숙한 곳에 있는 것을 가져온 거지.”

“그 익숙한 게 하필이면 제 냉장고입니까?”

“좀 나눠 먹자. 우리 막내가 휴가에서 복귀한 날이잖아.”

“그럼 냉장고 제일 아래 칸에 있는 귤도 좀 가져다주십시오.”

이창민 중사가 박상문 하사를 쏘아봤다.

“이게 고참을 셔틀로 쓰려고 하네.”

그러면서도 손에는 귤이 나타났다.

성현은 이창민 중사의 권능을 보며 정말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노을을 바라봤다.

곧 전쟁이 시작되어 피로 물들 땅 위에서 맥주를 마시고 낄낄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이창민 중사가 캔을 우그러뜨릴 때 성현이 입을 열었다.

“건의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창민 중사의 시선이 성현에게 기울어졌다.

“어떤 거?”

“이계의 문의 존재를 지연우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욕망에 미쳐 있는 지연우는 미끼를 물 것이고, 성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것이다.

성현은 회귀 전 기억을 통해 지연우라는 사람을 손바닥에 올려놓으려 한다.

그때였다.

성현은 손가락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정령의 반지가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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