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그러더니 들려온 목소리.
-무…….
이번에도 처량하고 안쓰러운 목소리다.
그런데 사막의 바람에도 묻히지 않고 또렷하게 들릴 정도로 그 소리가 꽤 크다.
이창민 중사나 박상문 하사도 정령의 목소리를 들었을 게 분명하다.
‘어쩌지?’
성현은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성현은 정령을 히든카드로 사용할 생각이었다.
최악의 상황에 암기처럼 이용해 상대의 허를 찌를 훌륭한 무기.
즉, 두 사람을 믿을 수 있다 해도 히든카드는 숨기는 게 좋다.
그런데 두 사람이 들었다면…….
‘하…….’
성현은 제멋대로 소리를 내는 정령을 잠시 원망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바라봤는데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정령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노을을 보며 하던 이야기를 계속 이어 가고 있다.
성현은 혼란한 눈빛으로 대화하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계의 문을 지연우에게 어떤 식으로 알리지?”
“공문을 보내는 것은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럼 우리가 피곤해지지. 어쩌면 앞장서야 할 수도 있고.”
그때 반지에서 다시 정령의 목소리가 흘렀다.
-무…….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정령의 목소리를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즉, 듣지 못한 거다.
‘뭐지?’
성현의 시선은 다시 손가락으로 향했다.
여전히 푸른 반지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다.
-무…….
정령의 목소리는 성현만 들을 수 있는 것 같다.
‘무’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두 사람은 지금도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다.
성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무가 뭐야?’
생각을 했을 때 반지에서 이어진 목소리.
-울…….
성현은 ‘무’와 ‘울’ 두 단어를 조합해 봤다.
‘무울?’
물이다.
정령은 물을 원하고 있는 거다.
하긴 물의 정령이다.
사막의 건조한 바람에 오랜 시간 노출되는 건 어려울 것 같다.
성현이 이창민 중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초소장님.”
“어?”
“물 좀 얻을 수 있습니까?”
이창민 중사가 미간을 찌푸린다.
“이제 막내까지 나를 셔틀로 쓰고 있네? 왜? 생수 말고 양주라도 가져다줘?”
“죄송합니다.”
“됐다. 내가 너희 두 놈의 셔틀이다. 셔틀!”
이창민 중사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짜증을 냈다.
그러면서도 손을 뻗어 500ml 생수를 소환시켰다.
“마셔.”
“감사합니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편리한 권능인 것 같습니다.”
“은행이라도 털어 줄까?”
“아뇨, 그건 좀.”
성현와 이창민 중사는 낄낄 웃었다.
그리고 성현은 뚜껑을 뜯어 물을 마시는 척 조금의 물을 반지에 흘렸다.
그러자 반지가 색이 짙어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마치 물을 마시는 것만 같다.
-더…….
성현은 들고 있던 물을 아예 반지를 향해 뿌렸다.
그 모습을 본 이창민 중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야? 마실 물이 아니었어? 손 씻으려고?”
“아, 네.”
“그럼, 호수나 바다를 옮겨 줄까?”
“그런 것도 가능합니까?”
“되겠냐?”
이창민 중사가 담배를 입에 물며 끌끌 웃었다.
아무래도 호수나 바다를 옮기는 것은 못하는가 보다.
성현은 고개를 끄덕인 후 다시 반지를 향했다.
물이 닿으며 짙어졌다 흐려지기를 반복하던 반지는 점점 짙어진 채로 유지되었다.
시원한 물을 뿌려 줬더니 기분이 좋아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쿠…….
다시 잠에 빠진 거다.
성현은 그 모습을 보며 픽 웃고 말았다.
‘골치 아픈 것을 맡았을 수도 있겠어.’
지르힐은 물의 정령을 보며 귀족 이상이라고 말했다.
아직 그 의미를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아무래도 정령의 세계는 많은 것이 미스터리.
게다가 지금껏 성현이 알고 있던 정령은 순순히 인간의 의사를 따를 뿐.
지금처럼 자신의 의지를 이야기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정령은 대놓고 물을 달라고 한다.
조금 더 놔뒀다면 투정을 부렸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천천히 알게 되겠지.’
그렇게 정령에 대한 생각을 마쳤을 때, 이창민 중사가 담뱃재를 털며 입을 열었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네?”
“이계의 문, 네가 지연우에게 알리고 싶다며?”
다행히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도 지연우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영웅 행세를 하며 돌아다니는 놈이 아니꼽다나 뭐라나.
두 사람도 지연우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다고 느낀 거다.
성현이 쭉 기지개를 켜며 입을 열었다.
“페이트에 알리겠습니다.”
“페이트?”
“네. 페이트 길드를 통해 이계의 문을 지연우에게 넘기겠습니다.”
이창민 중사가 턱을 문질렀다.
“페이트라…….”
이창민 중사는 성현과 페이트 길드에 어떤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난번 페이트 길드가 이곳에 숙영을 펼쳤고 당시 서은서와 성현이 아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녀 뢰피크르를 잡은 후 성현은 서은서와 함께 나란히 인터뷰를 했다.
이것저것 따지고 보면 성현이 전역 후 페이트 길드에 적을 두지 않을까 예상되었다.
이창민 중사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이창민 중사는 반역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런 그에게 페이트 길드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돈 되는 일만 하는 기생충들.
어떤 보상도 없이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치는 군인과는 섞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페이트를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을 수 있습니다.”
거침없을 정도로 단호한 목소리에 이창민 중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어떻게?”
단지 성현의 대답만 듣고 페이트 길드를 믿을 수는 없었다.
이창민 중사는 조금 더 확실한 증거를 원했다.
“페이트 길드는 이계의 문을 소화할 능력이 안 됩니다.”
“안 된다?”
“국내 5위권의 길드이지만 독에 특화된 길드입니다. 독이라는 이미지 덕에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은서 팀장이나 서준식 본부장을 봐도 그 이미지를 벗기기 위해 애를 쓰고 있습니다.”
국내 5위쯤 되면 그때부터는 돈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은 사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은 다 가질 수 있다.
수억 원의 슈퍼카를 넘어 개인용 요트와 비행기까지도 언제든 일시불로 지를 수 있는 게 그들이다.
그들에게 돈은 숫자일 뿐.
원하는 것은 탑의 자리다.
“이계의 문을 국가 또는 연맹과 함께 하겠다는 등의 메시지를 던지면 페이트 길드가 단지 돈을 좇는 길드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다는 말로 포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서은서는 바보가 아니다.
그곳은 죽은 자의 군주 나모르의 땅.
이계의 문을 독점했다가 괜히 몰살당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거다.
“서은서 팀장은 이계의 문을 통해 다른 길드의 세력 약화로 사용할 겁니다.”
“그러니까, 서은서는 다른 길드가 여기에 와서 몰살당하는 것을 원한다는 거지? 그럼 자연스레 페이트 길드의 순위가 오를 테니까?”
“아마도.”
이창민 중사가 끌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람 목숨이 참 파리 목숨 같아. 그놈의 순위가 뭐라고.”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붉은 노을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성현은 지금 몇 명 죽는 것에 대한 큰 감흥이 없었다.
성현이 살아온 세상에서는 죽음이란 단어가 항상 옆을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죽고 또 죽고 살기 위해 도망쳐도 죽고.
인간은 계속 갈려 나갔다.
존재와의 전쟁을 시작으로 멸종의 시대, 폐멸의 시대, 그리고 인간 박멸의 시대로 이어진 대살육의 현장.
능선이 피로 물들고 바다가 시체를 거부했다.
그리고 그 마지막 날,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가 강림했다.
만약 거기서 시간이 되돌아가지 않았다면 인간 세상은 지연우와 그 추종자 몇을 남기고 종말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
성현은 그 모든 것을 지켜봤다.
죽음이 아무렇지도 않은 세상.
그리고 그 죽음을 담담하게 지켜보던 공허한 눈동자.
성현은 슬쩍 자신의 가슴을 문질러 봤다.
앞으로 이곳에 펼쳐질 전쟁과 죽어 갈 사람들을 떠올려 봤지만 어떤 느낌도 없었다.
사막의 모래처럼 퍽퍽하기만 하다.
그렇게 한참을 모래에 앉아 있다가 초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일어서서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터는데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성현의 시선이 박상문 하사에게 옮겨졌다.
통신 병과.
지금껏 권능을 쓴 적은 없다.
오히려 자신은 어떤 힘도 없다며 도망만 다녔다.
그런데 짐승의 땅에 권능 없는 일반인이 올 수는 없다.
“박상문 하사님은 어떤 권능이 있습니까?”
성현의 질문에 박상문 하사가 눈을 깜빡였다.
“나?”
* * *
“소식은?”
“없습니다.”
페이트 길드.
무령의 보고에 서은서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성현의 소식이 끊긴 지 딱 하루가 지났다.
던전과 함께 사라진 성현은 어떤 소식도 알리지 않고 있다.
혹시 성현이 다른 쪽으로 도망쳐 나왔나 해서 복면인들이 던전이 있던 곳을 샅샅이 뒤지는 중이다.
하지만 성현의 옷가지 하나 발견되지 않았다.
“스페셜 던전인 것을 알면서도 끌고 간 내 잘못이야.”
그녀의 입에서 자조적인 목소리가 흘렀다.
그 던전으로 안내한 게 서은서였다.
성현은 조용한 던전을 원했고 성현이라면 스페셜 던전이라 해도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동안 성현이 보여 준 능력은 그 이상이었으니까.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었다.
던전 클리어는 실패했고 성현마저 잃었다.
“대체…….”
서은서가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그 표정은 단순히 페이트 길드에 들어올 유능한 사람이 실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
무령의 앞이라 감정을 숨기고 있을 뿐, 툭 치면 울 것만 같다.
“어쩌지?”
“네?”
“부대에 알려야 하잖아, 유성현이 실종되었다고.”
“그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럼, 유성현의 어머니도 알게 되겠지?”
서은서는 유성현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며칠 전 가족사진을 찍을 때, 서은서를 향해 손짓하던 그 모습.
유성현의 어머니가 만약 아들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면.
“……난 어떻게 해야지? 가서 뺨이라도 맞으면 속이 편안하려나?”
그 모습을 지켜보던 무령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겁니다. 상대는 유성현입니다.”
그게 최대한의 위로였다.
그리고 서은서의 입에서 돌아오는 답은 항상 같았다.
“알아. 유성현이야. 이번에도 짠 하고 나타나겠지. 그럴 거야.”
서은서의 목소리를 듣던 무령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
그리고 문득 기대한다.
만약 실종된 사람이 성현이 아니라 자신이었어도 저런 표정을 지어 줄까?
누구에게나 가면을 쓰고 대하는 서은서인데?
‘그래도 다른 사람과 달리 나에게는 친절했잖아? 어릴 때부터 지켜봤고 함께했어!’
잠시나마 치켜든 욕심.
서은서의 곁에 있기로 하며 마음속 깊이 묻어 버린 해묵은 욕망이다.
하지만 무령은 고개를 저었다.
서은서에게 자신은 도구여야 한다.
서은서의 앞에서 자신이 죽어도 서은서는 흔들리지 않고 움직였으면 좋겠다.
그것은 자신이 경호실장이기 때문이다.
자신과 서은서의 거리는 딱 여기까지.
그게 본분이다.
무령은 표정을 숨긴 채 서은서를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럼, 계속 수색해 보겠습니다.”
“부탁해.”
그때였다.
드르륵!
서은서의 책상 위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번호는 유성현이다.
서은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무령을 봤다가 다시 발신 번호를 반복해서 확인했다.
무령도 숨을 삼킨 채 지켜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전화를 받으라는 뜻이다.
그렇게 적막이 가득한 공간에서 서은서의 하얀 손이 휴대폰을 향해 뻗어졌다.
그녀가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입술을 조용히 움직였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