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검은 갑주를 몸에 두른 콩벌레, 그 숫자가 수만 마리.
-크르르르.
놈들은 흉악한 소리와 내지르며 성현을 향해 다가왔다.
입에서 뚝뚝 떨어지는 걸쭉한 침이 정말 기분 나쁘게 느껴진다.
‘하…….’
성현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 규모는 성현에게도 부담스럽다.
정면으로 맞붙으면 반드시 죽고 만다.
하지만 성현은 물러서지 않는다.
놈들을 향해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리고.
‘강령술.’
성현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일렁였다.
동시에 모래가 꿀렁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성현이 죽이고 모래 속에 파묻었던 짐승의 사체.
그 사체가 모래를 뒤집으며 튀어나왔다.
뱀과 전갈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독충.
몇백 마리나 되는 짐승의 사체들이 성현의 앞에 섰다.
마치 성현을 보호하듯이.
갑자기 나타난 짐승의 사체에 거대한 콩벌레는 움찔거렸다.
하지만 잠깐이었다.
적대적인 느낌을 받았는지 누런 이를 드러내며 포악스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카아아아!
그게 신호였다.
성현의 손에서 마력이 흩뿌려졌다.
‘싸워라.’
죽은 사체 수백 마리가 콩벌레를 향해 간다.
거대한 뱀이 콩벌레를 빙빙 두른 후 날카로운 이빨로 콱콱 갑주를 물어뜯는다.
하지만 콩벌레도 만만치 않다.
두꺼운 갑주는 쉽게 뚫리지 않았고 뱀을 뜯어먹기 시작했다.
곧 뱀의 허리가 두 동강 났다.
하지만 뱀은 생명체가 아니다.
이미 죽었고 고통을 모른다.
반으로 찢긴 상황에서도 콩벌레를 공격한다.
급기야 콩벌레의 갑주가 뚫렸다.
뱀의 독이 콩벌레를 마비 시켰고 놈은 비명과 함께 몸을 바르르 떨었다.
전갈도 마찬가지다.
팔이 떨어져 나가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꼬리를 움직여 콩벌레의 갑주를 공격했다.
콱! 콱! 콱!
짐승과 짐승이 싸운다.
이곳저곳에 놈들이 뿌려 대는 독이 가득하다.
콩벌레의 비명이 사막을 울리고 있다.
하지만 우세한 것은 콩벌레다.
개체별로 따진다면 강령술로 움직이는 사체가 훨씬 강했지만 놈들의 숫자는 경악할 정도다.
끝없이 몰려오는 인해전술에 성현이 끄집어낸 사체는 순식간에 갈려 버렸다.
하지만 성현은 웃고 있었다.
‘좋아.’
죽은 콩벌레가 약 천 마리다.
성현은 다시 손을 휘저었다.
허공에서부터 떨어진 검은 마력이 죽은 콩벌레에게 닿았고.
-카아아악!
놈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으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갈려 버렸다.
천 마리는 수만 마리를 이길 수 없다.
그렇게 놈들과의 거리가 어느새 가까워졌다.
강령술을 쓰기 전에 놈들은 성현을 공격할 수 있다.
징그럽게 많은 다리를 살벌하게 움직이며 달려온다.
이제 강령술을 사용할 시간과 여유는 없다.
성현이 직접 창을 들고 싸워야 한다.
그런데 이번에도 성현은 웃고 있었다.
수만 마리를 상대할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는 거다.
‘도망치는 거지.’
성현은 조용히 웃으며 슬쩍 이계의 문으로 발을 집어넣었다.
콩벌레가 사나운 이빨을 들이밀며 다가온 순간 성현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래서 콱! 콩벌레는 허공을 물어야 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성현은 보이지 않는다.
바글거리는 콩벌레와 죽은 사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다.
그 시각.
성현은 인간 세상으로 나와 있었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짐승은 이 문을 통과할 수 없다.
오직 인간만이 가능하다.
그 덕에 성현은 지금의 방법을 생각할 수 있었다.
원거리에서 공격하고 가까워진 순간 도망치기.
성현은 손목을 틀어 시간을 쟀다.
그리고 정확히 30분이 지났다.
성현은 다시 이계의 문에 발을 들였고 죽은 자의 사막으로 이동했다.
죽은 자의 사막.
30분 전만 해도 이곳은 콩벌레로 가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요하다.
붉은 모래와 죽은 사체만 보인다.
성현이 사라지자 목표를 잃은 콩벌레가 다시 모래 속으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성현이 조용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쿨타임 찼다, 새끼들아.”
성현이 손을 움직이자 죽어 있던 사체들이 몸을 일으켰다.
심하게 훼손된 사체를 제외하고 순수히 싸울 수 있는 놈만 따져도 이제는 약 2천 마리.
‘좋아!’
동시에 콩벌레가 모래 속에서 고개를 든다.
‘싸워라.’
사체가 콩벌레를 향해 다가갔다.
-카아아악!
성현의 전투 방식은 간단했다.
사체를 움직여 콩벌레와 싸운다.
어느새 놈들이 다가오면 인간 세상으로 퇴각한다.
그리고 30분 쿨타임이 차면 또다시 죽은 자의 사막으로 들어가 사체를 움직인다.
콩벌레는 지능이 존재하지 않는 단순한 짐승.
놈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성현이 똑같은 행동을 이어갔지만 놈들은 때마다 성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다.
이 전투는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투가 이어질수록 성현이 운용할 수 있는 사체의 숫자가 점점 더 많아졌다.
3천, 4천, 5천!
잠시 후,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온 성현은 쭉 기지개를 켰다.
‘오늘은 여기까지.’
오늘도 엄청난 숫자를 죽였고 손에 얻었다.
이제 며칠만 더 하면 수만 마리에 육박했던 콩벌레는 모두 성현의 권능 아래에 놓이게 될 것이다.
몸에 묻은 콩벌레의 핏물을 툭툭 털고 있는데 성현의 머릿속에 지르힐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정말 치사하구나. 그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건 좀…….
성현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지르힐, 그게 계약자한테 할 소리야? 도와주지 않을 거면 가만히 있어.”
성현은 이어지는 지르힐의 메시지를 무시한 채 물통을 들어 반지에 뿌렸다.
도대체 언제까지 잠을 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을 뿌려도 정령에게는 “쿠…….” 하고 잠자는 소리만 들려왔다.
* * *
“너 요즘 뭐 하고 다니냐?”
식사 시간이었다.
이창민 중사가 소주잔을 입에 대며 물었다.
성현이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계속 수련 중입니다.”
성현은 군인이다.
계급은 상병, 하지만 막내이며 주변 경계가 주 임무다.
콩벌레와 싸우면서도 근무시간은 칼같이 지키고 있는데.
“그래도 좀 너무하지 않아? 근무가 끝나면 쪼르르 사라지고?”
박상문 하사가 툴툴거렸다.
꼴랑 세 명 있는 부대다.
성현이 사라지고 나면 박상문 하사는 심심했다.
자신보다 상급자인 이창민 중사에게 놀아 달라고 할 수는 없고 만만한 게 성현이었다.
그런데 성현이 틈만 나면 사라졌으니 요즘은 멍하니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창민 중사가 박상문 하사를 쏘아봤다.
“계속 수련한다고 하잖아. 조만간 이계 정벌한다고 공문 떴는데 너도 준비해야 하지 않아?”
“초소장님? 전 통신입니다. 장비가 고장 나지 않게 닦고 조이고 기름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시잖아요? 전 권능을 쓰면 안 되는 것.”
지난번, 성현은 박상문 하사의 권능을 물어봤다.
타인의 권능을 묻는 것은 실례지만 정말 궁금했다.
이곳은 짐승의 땅, 권능이 없는 사람은 들어올 수 없는데 단 한 번도 쓰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권능의 질문을 받은 박상문 하사는 목에 힘을 빡 준 상태에서 능글스럽게 답했었다.
“알면 다쳐.”
어쨌든, 연맹의 이계 정벌이 머지않았다.
연맹은 1개월 뒤를 D-day로 잡아 놓고 용병과 참여 길드를 훈련시키는 중이다.
물론 그 훈련소의 대장은 지연우.
놈은 이계 정벌의 총책임을 맡고 있다.
이창민 중사가 입을 열었다.
“대충 정벌 규모가 나왔어. 계약자 5천 명. 그리고 사단급 규모의 군부대.”
“5천 명요?”
“어. 어떻게 생각해?”
계약자 5천 명, 적어도 권능 이해도가 10% 이상만 받았을 거다.
최정예는 아니어도 나름 어깨에 힘준다는 사람들이 포함됐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사단급의 군부대라면 막강 화력을 자랑하는 기갑부대와 포병 부대까지 포진되어 있다.
이 정도 규모만 되어도 웬만한 국가는 쓸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성현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겨우?’
상대는 마녀나 보통의 귀족이 아니다.
다름 아닌 군주.
군주 중에서 약하다고 하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상상할 수 없는 권능이다.
게다가 회귀 전 1차 전쟁을 기억해도 그랬다.
당시 출병했던 규모가 계약자 2만에 육군과 공군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했어도 다 갈렸다.
승리는 했지만 상처만 남았다.
그런데 그 반절도 안 되는 규모라니.
‘아직 존재에 대한 이해가 떨어지나?’
당시 상황과 비교하면 이번 전쟁은 10년 일찍 시작하는 거다.
존재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족하다.
하지만 당시와 다른 것은 있다.
이번엔 성현이라는 변수가 존재한다.
성현은 회귀자다.
나모르에 대한 공략이 머릿속에 있다.
물론 공략법만 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는 아니지만 가능성은 올라간다.
게다가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성현이 강해진다면 가능성은 더 높아질 거다.
* * *
그날 밤.
성현은 꿈속에 있었다.
뢰피크르의 권능을 사용해 꿈에서도 수련을 하는 거다.
그리고 오늘도 성현의 앞에는 뢰피크르가 보였다.
‘이제 정들겠어.’
성현의 상대는 언제나 뢰피크르였고 꿈속에서만큼은 다른 꼼수 없이 순수하게 싸웠다.
승률은 제로.
단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다.
마녀의 전투는 굉장했고 성현의 육체로 따라갈 수 없는 속도를 보여 줬다.
물론 그동안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성현도 발전했다.
처음에는 일방적으로 구타를 당했지만 지금은 나름 치명타도 먹이고 있다.
“시작하자.”
뢰피크르가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이이이익!
엄청난 속도.
예전이었다면 피할 수 없었을 주먹이다.
하지만 성현은 몸을 살짝 트는 것만으로 뢰피크르의 주먹을 흘렸다.
그리고 어느새 창을 뽑아 뢰피크르의 복부를 가격했다.
콰직!
뢰피크르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피를 토할 때 성현이 그녀의 얼굴을 잡았다.
‘라이트닝.’
파지지직!
성현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 * *
“내일이죠, 인간이 나모르를 공격하는 게?”
“어.”
성현은 꼬마의 앞에 서 있었다.
꼬마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 알겠지만 존재의 세상에도 소문났어요, 인간이 존재를 공격한다고. 아, 물론 다른 존재가 나모르를 도와주거나 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우리는 인간과 달라서 이득 없이는 안 도와주거든요.”
“그건 다행이네.”
존재들은 지금 신이 났다.
공성전이라며 자신의 계약자에게 엄청난 아이템을 쏟아 주는 놈도 있었다.
어떤 놈은 직접 계약자의 몸을 움직이겠다며 계약서를 뜯어고치는 놈도 있고.
대부분의 존재는 이 전쟁을 게임 같은 유희거리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모르도 준비를 꽉 하고 있나 봐요. 키우던 애완 콩벌레를 누가 다 죽였다고 구시렁거리면서 이번에 들어오는 인간은 반드시 죽여 버릴 거래요.”
그 말에 성현이 낄낄 웃었다.
“그게 애완용이었어?”
“네.”
징그러운 벌레를 키운다니.
성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래, 취향은 인정해 줘야지. 그런데 미안하네. 다 죽여 버렸는데.”
“나모르를 만나면 사과하세요.”
“어. 그래야겠어,”
성현과 꼬마는 끌끌 웃었다.
그리고 꼬마가 이런저런 약과 캡슐을 꺼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가능성은 있어요?”
꼬마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다.
상대는 군주다.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이번에는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성현은 시원하게 대답했다.
“어.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