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 * *
짐승의 땅, 넓은 개활지.
평소였다면 성현과 박상문 하사만 다녔을 적막한 땅에 활기가 넘쳤다.
5천 명의 계약자들이 모인 거다.
방송국 카메라와 관계자들 그리고 잡상인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먹어.”
성현의 옆으로 박상문 하사가 다가와 핫도그를 건넸다.
성현이 핫도그를 받아 들자 박상문 하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부대 앞에서 핫도그를 사 먹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야. 오늘은 수양록을 써야겠어.”
성현과 박상문 하사 그리고 이창민 중사도 이번 토벌에 함께한다.
물론 군인인 만큼 5천 명의 계약자들과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국방부에서는 이번 토벌에 사단급 규모를 지원했고 이들은 그 안에 포함됐다.
“그런데 정말 살벌하게 생겼네.”
박상문 하사가 계약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번에 모인 계약자는 모두 권능 이해도가 10%가 넘는 실력자다.
이 중 총알받이는 존재하지 않고 한 명, 한 명이 군주의 목을 베기 위해 이곳에 왔다.
그리고 박상문 하사의 말처럼 정말 살벌하게 생겼다.
뺨에 그어진 흉터부터 온몸을 휘감는 문신, 굵직굵직한 근육 등등.
“그런데 왜 저렇게 서로 노려보고 있냐? 눈 마주치면 1초 만에 싸우는 짐승처럼.”
박상문 하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계약자들은 서로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대며, 금방이라도 싸울 것처럼.
주변을 슥 둘러보던 성현이 입을 열었다.
“출신이 다르거든요.”
이번에 모인 5천 명의 출신은 모두 다르다.
각 길드에서 평균 20~50명씩 보냈고 물론 그 이상의 직원을 보낸 길드도 있다.
그리고 길드 외에도 세계 각지를 휘젓고 다닌 용병도 있다.
소속은 물론 지역과 국적조차 다르다.
며칠 전까지 지연우의 아래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 시간이 짧다.
섞이기는 힘들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떨어져 있다.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괜찮네.”
박상문 하사가 빙긋이 웃었다.
계약자에 비해 군인의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괜찮았다.
군인들 역시 소속이 다르기 때문에 얼굴과 이름을 알지 못한다.
서먹서먹하고 데면데면하다.
하지만 말은 통한다.
그때 무전을 받은 박상문 하사가 뒷목을 꾹꾹 주무르며 입을 열었다.
“여기 있어. 난 초소 좀 다녀올게.”
“할 일 있으십니까?”
“어, 초소장님이 무전기 좀 더 확보해 놓으라고 하셨거든.”
박상문 하사는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곳에는 성현만 남았다.
성현은 핫도그를 한입 베어 물며 계약자들을 살폈다.
오래 전 생각이 난다.
회귀 전, 처음 이계로 떠나던 그날.
성현도 그때는 저랬다.
묘한 설렘과 약간의 흥분.
다시는 이 땅에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그 두려움은 던전에 들어가는 것과 또 달랐다.
이 토벌대의 목표는 던전의 주인 따위를 상대하는 게 아니다.
상대는 존재다.
그것도 군주.
이곳에 모인 계약자 중 80% 이상은 군주를 보지도 못했을 거다.
그들이 계약한 존재는 마녀 또는 귀족일 게 분명하다.
즉, 자신의 계약 존재보다 더 거대한 놈을 사냥하는 거다.
그런데 그 이름도 흉악하다.
죽은 자의 군주라니.
옛 생각을 하던 성현이 픽 웃었다.
‘그 긴장 때문에 싸움도 많이 났는데.’
긴장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주먹질을 했다.
치고받고.
그런데…….
“야.”
성현을 향해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틀어 보니 웬 놈이 성현을 노려보고 있다.
키가 약 2m.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하다.
놈이 말한다.
“비켜.”
성현이 슬쩍 몸을 틀었다.
놈이 낄낄낄 웃는다.
“이 새끼 쫄았네.”
성현도 알고 있다.
놈은 시비를 거는 거다.
지르힐의 커스터마이징 덕에 성현의 키와 덩치는 작지 않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용병들에 비하면 유치원생과 같았다.
게다가 성현의 얼굴은 상처 없이 깨끗하다.
어머니께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비싼 돈을 들여 매번 없앤 것이지만 용병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없다.
그들이 볼 때 성현은 실전 경험 없는 애송이였다.
그러니까 생각 없이 시비를 걸기에 딱 좋은 상대.
“쫄았냐?”
얼굴을 들이밀며 비웃고 있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시비를 일일이 받아 줄 만큼 성현은 어리지 않았다.
손을 휘휘 저으며 어서 가라는 표시를 보였다.
그런데 놈은 가지 않는다.
“군인이지? 내가 한 번은 군인하고 싸워 보고 싶었거든? 어?”
성현의 얼굴은 인터넷 동영상만 봐도 알 수 있다.
지연우나 서은서만큼 유명한 것은 아니지만 뢰피크르를 잡은 사람으로 꽤 알려졌다.
그런데 모자를 쓰고 있어서 못 알아보고 있나 보다.
생각을 이어 가던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내 얼굴을 알았으면 더 싸워 보고 싶어 하겠지.’
성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나와 싸워 보고 싶다고?”
“그래, 이 새끼야.”
놈이 혀를 날름거리며 주먹을 쥐었다.
그런데, 성현의 뒤에 거대한 덩치가 나타났다.
거대한 덩치가 입을 연다.
“하, 이 새끼 봐라?”
성현은 또 시비를 걸러 온 놈인가 싶었다.
원래 이런 시비는 양아치가 몰려다니며 소란을 피우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개를 틀었는데.
“어?”
구악의 동료였던 이태산이다.
이태산이 번뜩이는 눈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성현에게 시비 건 놈의 머리를 콱 쥔다.
시비 건 놈이 인상을 찡그렸다.
“……너…… 넌 뭐야?”
하지만 놈은 더 입을 열지 못했다.
이태산의 악력은 잘 익은 수박을 손쉽게 터뜨릴 만큼 대단했기에 시비 건 놈은 머리가 박살 날 것 같은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곧.
“사, 살려 줘…….”
이태산을 향해 빌기 시작했다.
눈물까지 뚝뚝 흘리면서.
잠시 후, 시비를 걸었던 놈이 떠났다.
이태산이 손을 툭툭 털며 성현을 향했다.
“이렇게 또 보네요?”
마지막 만났을 때만 해도 반말을 했던 놈이 이제 존대를 하고 있다.
뭐 상관은 없었다.
문제는.
“너도 이 토벌대를 신청했어?”
“네.”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태산이 평범하게 살았으면 했다.
원하는 대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소소한 행복을 느꼈으면 했다.
하지만 이태산은 점점 더 지옥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마치 운명처럼.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을 향해 날아가는 불나방과 같이.
성현이 한숨을 내뱉을 때 이태산이 멀리 도망가는 양아치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고맙죠?”
“고맙네. 정말 고마워.”
“고마워야죠. 저놈 죽이려고 한 거잖아요? 이렇게 보는 눈 많은 곳에서 사람을 죽이면 아무리 계약자라 해도 감옥 가요.”
“어?”
이태산은 성현을 사이코패스 살인마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이태산이 담배를 물며 말을 이었다.
“나도 이 바닥에 있으면서 어둡게 사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있는데?”
“성질 좀 죽여요. 지난번에 두 사람을 박살 냈다면서요? 가만히 있는데 이유 없이 창을 휘둘렀다고 들었어요.”
“내가?”
“네.”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고 있다.
성현이 인상을 찌푸리자 이태산이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말했다.
“창 쓰는 것 맞죠?”
“어.”
“최근에 길에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한테 괜히 시비 걸고 허벅지 뼈와 정강이뼈를 부순 적 있어요. 없어요?”
“없어.”
“와, 미치겠네. 없다고요? 확실히 유성현이라고 그랬는데?”
억울한 것은 성현이었다.
구태산은 오랜만에 성현을 보더니 갑자기 사이코 취급을 하고 있다.
길 가던 사람한테 시비를 걸고 창을 휘둘러 허벅지와 정강이뼈를 부순다니.
“유성현이라는 이름이 한둘이겠어? 그리고 내가 군인 신분에 짐승의 땅에 처박혀 있는데 누구한테 시비를 걸어? 그건 미친놈이지.”
이태산은 성현의 위아래를 살폈다.
그러고 보니 군인이다.
게다가 성현의 말대로 이곳은 짐승의 땅.
인간보다 짐승이 더 많은 곳이다.
“하긴.”
성현의 말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저놈 맞아. 오지 말라고 했는데 갑자기 달려들어서 창을 휘둘렀어.”
낯선 목소리에 성현과 이태산의 시선이 틀어졌다.
성현의 눈이 찌푸려졌다.
‘이건 또 뭐야?’
성현을 향해 다가오는 두 사람.
강화도 던전 앞에서 만난 추영민과 이유미였다.
성현이 고개를 숙였다.
‘엮이지 않았으면 했는데…….’
성현까지 구악의 4명이 한자리에 섰다.
성현은 원치 않던 일이다.
하지만 쓸데없이 반가웠다.
* * *
페이트 길드도 30명의 직원을 이곳에 파견했다.
사실 파견하고 싶지 않았지만 다른 길드의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었다.
이들을 지휘하는 것은 무령이었고 서은서는 큰 역할이 없는 부지휘자를 맡았다.
큰 역할이 없다고 하지만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서은서는 꼼꼼했다.
직원들의 군장을 일일이 확인하며 부족한 부분을 찾아내고 있었다.
“약이 부족한 것 같은데, 보급대에 가서 채워 넣으세요. 던전이 아니에요. 이계입니다.”
“네, 감사합니다.”
서은서는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렇게 직원들의 군장을 확인 후 출발 시간인 SP 타임을 확인하고 있는데 무령이 입을 열었다.
“안 가 보실 겁니까?”
“어딜?”
무령이 고개를 틀었다.
그 시선이 닿은 곳에는 성현이 보였다.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언뜻 싸우는 것도 같고.
물끄러미 성현을 보던 서은서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소속이 다르잖아?”
서은서는 계약자 소속이다.
하지만 성현은 군인, 어디까지나 국방부 소속이다.
각자의 역할이 다르다.
그리고 연맹과 국방부는 묘한 알력다툼을 하는 중이다.
이 한심한 인간들은 벌써부터 승리에 대한 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존재를 우습게 아는 거다.
군주 중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게다가 얼마 전 성현이 20명도 안 되는 사람을 끌고 마녀를 잡는 것을 봤기 때문에.
“그 정도 숫자로 마녀를 잡았잖아? 그럼 군주는 200명이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딴 개소리를 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탁상공론.
현실을 모르기 때문에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자들.
어쨌든, 이런 상황에 국방부 소속을 서은서가 만난다?
상대가 누구든 서은서가 움직이면 주목받는다.
아무 것도 없는 상병이 순식간에 연맹에서 꽂아 둔 프락치로 오인받을 수 있다.
게다가 정치적으로 이용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서은서는 괜히 성현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성현,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잖아?”
지난번 최초의 마녀를 잡은 것으로 언론에 얼굴을 비쳤다.
하루 종일 텔레비전에서 방송되었고 지금도 인터넷을 들어가면 손쉽게 영상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관심 있으면 기억하지만 관심이 없으면 누군지 모르는 정도였다.
사람들의 관심은 서은서에게 집중되었었다.
서은서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이번에 정말 깜짝 놀랄 것 같지 않아? 난 그걸 기대하고 있어. 그런데 이번에도 내 얼굴에 가린다? 그건 싫어.”
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렇겠죠? 이곳에 모인 5천 명이 그 증언자가 되겠죠.”
무령은 이번 정벌이 성현의 진정한 데뷔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소란스럽던 계약자들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적막해졌다.
가장 앞에 설치된 단상.
그곳에 한 남자가 뚜벅뚜벅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성현의 시선도 자연스레 단상으로 향했다.
그곳에 선 남자.
당연하지만 지연우였다.
그리고 지연우의 뒤에 할아버지로 변장한 그의 경호원 오즈가 보였다.
두 사람의 등장, 그리고 지연우는 조용히 둘러봤을 뿐인데 5천 명의 계약자들은 압도되었다.
이어서 지연우가 마이크에 대고 느릿하니 입을 열었다.
“우리는 이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