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 *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은 하찮은 마녀 아리가 어머니를 뵙습니다.”
낫을 든 마녀 아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끝없이 높은 계단 위, 붉은 의자에 앉아 있던 여인이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시선을 내려 아리를 바라본다.
“아리?”
그녀의 목소리에 아리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네, 말씀하십시오.”
여인이 갑자기 아리를 불렀다.
그리고 아리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주변을 살폈지만 도열한 신하들 역시 모르는 눈치다.
다들 의문을 갖고 아리와 여인을 바라볼 뿐이다.
아리가 마른 입술을 핥았다.
‘무슨 일이지?’
그동안 아리는 매일같이 성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다.
그 귀찮은 일을 스스로 맡은 이유는 오직 하나.
아리는 신분 상승을 원하고 있었다.
‘설마, 오늘?’
이들의 신분은 어머니의 말에 의해 결정된다.
그 한마디에 하급에서 중급으로 오를 수 있다.
아리는 오늘이 그날이지 않을까 생각했고 그 생각이 맞았다.
여인의 목소리가 성을 울린다.
“내 자식들에게 전한다. 나는 오늘 아리의 신분을 변경한다.”
“……!”
순간, 성의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찝찝하고 더럽게…….
신하들이 꿈틀거리고 있는 거다.
조용히 있던 신하들의 눈이 매섭게 변했다.
‘변경한다고?’
‘쟤가 뭘 했는데?’
지금껏 아리가 해 왔던 일은 하나다.
유성현을 관찰하는 것.
그런데, 그런 하찮은 일로 신분을 바꿔 준다니.
말도 안 된다.
‘하…….’
신하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유성현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것은 인정해.’
성현은 이계의 문을 만들었다.
게다가 군대와 함께 이 땅에 들어와 나모르에게 전쟁을 신청했다.
인간 따위가 이 정도 일을 해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현의 업적이다.
아리의 공이 아니다.
아리는 그저 성현을 지켜보며 보고한 게 전부다.
‘그런데? 왜!’
신하들은 눈빛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눈동자로 그들의 의지가 교환된다.
‘일단 진정해 봐. 마인과 마녀 다음이 중급이지?’
‘자작 정도 되려나?’
‘자작도 영지가 나오나?’
그런데 신하들의 예상은 엇나갔다.
여인의 음성은 파격적이었다.
“아리…… 군주가 될 생각이 있느냐?”
신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중급과 상급을 건너뛰고 곧바로 군주라니.
신하들이 다급히 허리를 굽혀 여인을 향했다.
“어머니! 그건 안 될 말입니다!”
“군주라니요! 누가 마녀의 말을 따르겠습니까!”
“마녀는 미천한 신분입니다!”
“어머니라 해도 군주를 지정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아리는 여자입니다! 여자는 군주가 될 수 없습니다!”
신하들의 목소리에 성이 흔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여인은 신하들의 말에 관심 두지 않았다.
오직 아리를 내려다보며 다시 묻는다.
“딸아, 대답해라. 군주가 될 생각이 있느냐?”
아리는 멍했다.
‘군주?’
아리가 원한 것은 하급을 벗어나 중급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군주라니.
잠깐이지만 어머니가 미쳤나 생각도 했다.
신하들의 목소리도 아리를 향해 외치고 있다.
“아리! 그대는 중급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
“어서 어머니께 거절의 의사를 밝혀!”
“신분이 어긋나면 혼란이 오는 거야!”
“마녀가 군주라니! 누가 자네 말을 따르겠는가!”
신하들의 목소리에 아리는 바르르 떨었다.
그들의 목소리에는 마녀의 몸으로 받아 낼 수 없는 살기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회야.’
지금 이 순간을 거부하면 다시는 오지 못할 기회다.
아리가 재빨리 몸을 낮췄다.
“하찮은 마녀 아리는 어머니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아리 역시 신하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리고 그 한마디에 성은 적막해졌다.
신하들이 아리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감히 네가?’라는 눈빛이다.
여인이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재밌는 것을 발견한 아기의 웃음소리와 같다.
그 웃음소리에 성이 흔들린다.
창을 가린 붉은 커튼이 휘날린다.
그리고 여인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사랑스러운 내 딸아. 난 너를 군주로 인정할 것이다.”
신하들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영지는 어떻게 합니까? 군주라면 그에 걸맞는 땅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군주에게서 그 땅을 빼앗을 생각입니까?”
“군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급기야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가 절을 하며 땅에 머리를 쾅쾅 처박았다.
바닥에 쩍쩍 금이 갈 때 놈이 외쳤다.
“어머니!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개판이다.
하지만 여인의 입가에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다.
“조용.”
여인이 검지를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에 신하들이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적막이 공간을 채울 때 여인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아리, 나모르의 영역을 손에 넣어라.”
“……!”
“네 사신의 낫은 죽은 자의 군주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구나.”
“……!”
“내 너에게 그 땅을 인정해 주마.”
얼음이 쏟아진 것 같았다.
아리도 신하도 모두 멍한 눈빛이다.
제정신을 차린 것은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였다.
“어, 어머니. 나모르는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그곳은 대지의 어머니가…….”
“안다.”
“그, 그럼…….”
인간과 나모르가 싸운 이후에 그곳을 쳐서 먹자는 계획.
즉, 전쟁이다.
아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신분을 변경한다 해서 좋아했는데, 아니었다.
‘미, 미끼야.’
아리는 전쟁의 최선봉에 서는 미끼다.
일이 잘못되면 어머니는 말할 거다.
“내가 전쟁을 원한 게 아니었다. 아리가 제멋대로 행동한 것이지.”
아무도 마녀의 목소리는 듣지 않을 게 분명하다.
일이 성공해도 마찬가지다.
나모르의 영역은 이곳과 한참 떨어진 곳.
마녀의 힘으로 그곳을 온전히 지켜 낼 자신이 없었다.
즉, 아리는 긴 시간을 살아온 여인의 작은 유희거리다.
여인은 어머니라 불리고 있지만 평생 이 성에 갇혀 출산을 반복해야 하는 인생.
누군가의 피와 비명을 듣고 싶어 할 거다.
아리는 여인의 뜻을 그렇게 생각했다.
‘도, 도망쳐야 해.’
하지만 군주가 되겠다는 말을 내뱉었다.
번복하는 순간 목이 베여 죽을 거다.
아리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여인이 붉은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내 꿈은 유르라헬의 이름을 다시 신의 반열에 올려 두는 것. 너희의 목표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리, 선봉에 서라. 그 땅은 너의 이름이 될 것이다.”
잠깐 흥분했던 신하들이 기분 좋게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의 뜻을 따릅니다.”
* * *
그 시각.
익룡이 날개를 퍼덕이며 급선회했다.
갑작스레 몸을 틀어 성현을 떨구려는 거다.
하지만 성현은 이를 악물고 익룡의 몸에 달라붙었다.
-카아아악!
성현이 떨어지지 않자 익룡이 몸을 발광한다.
날개를 퍼덕이기도 하고 위아래로 몸을 흔들기도 한다.
성현 역시 버티기는 어려웠다.
가뜩이나 털이 없어 잡고 있을 게 없어서다.
고개를 틀어 아래를 보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이제 저 밑의 인간은 구분도 안 될 정도로 높이 날아왔다.
‘젠장!’
떨어지는 순간 땅에 부딪쳐 몸이 터져 버릴 거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 없다.
성현은 품에서 창을 뽑았다.
창의 크기는 아직 볼펜만 하다.
‘좋아.’
성현은 그 크기 그대로 익룡의 살에 쑤셔 넣었다.
콱!
낯선 고통에 익룡이 꿈틀거렸다.
비명을 질러 댄다.
-카아아악!
하지만 그게 시작이다.
성현은 곧바로 단도를 뽑아 찍었다.
콱!
성현은 익룡의 몸에 단도와 창을 번갈아 찍어 대며 타고 올랐다.
그리고 가까스로 익룡의 목을 잡았다.
지금도 익룡은 성현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을 좌우로 흔든다.
하지만 성현은 익룡의 몸에 박아 넣은 단도와 창을 손잡이로 사용해 버텨 냈다.
이어서.
‘이제 그만 죽어라.’
성현이 창을 뽑았다.
창의 크기가 쭉 길어진다.
성현은 그 창을 익룡의 머리에 찔러 넣었다.
콰직!
익룡의 눈이 부릅떠졌다.
‘라이트닝!’
전기가 창을 타고 들어가 익룡의 뇌를 가격했다.
파지지직!
공중전에 특화된 놈이라 방어력은 떨어진다.
단 한순간에 놈은 죽어 버렸다.
성현이 익룡의 머리에 손을 댔다.
‘이제 내 병사가 되어 싸워라.’
죽었던 익룡이 다시 눈을 떴다.
눈동자에 초점은 없다.
하지만 그 시선은 정확히 다른 익룡을 향하고 있다.
-크르르르.
익룡의 목에서 피 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콰아아아, 불을 뿜어낸다.
목표는 당연히 다른 익룡이다.
성현이 사체가 된 익룡의 목을 손으로 툭툭 쳤다.
‘일단, 나를 내려 줘.’
명령을 들은 익룡이 날개를 쫙 펼치고 지상으로 향했다.
쉬이이이익! 바람 소리와 함께 땅이 순식간에 가까워진다.
‘여기.’
적당한 높이에 왔을 때 성현은 뛰어내렸다.
그리고 모래에 발이 닿자마자 곧바로 짐승과 싸우는 전장을 향해 달렸다.
이제 하늘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저 익룡 1마리가 다른 놈들을 모두 집어삼킬 거다.
사체는 고통을 모르고 두려움이 없다.
죽은 놈이 있다면 또 강령술을 이용할 생각이다.
그렇게 하늘이 성현의 병사로 이뤄진다면.
‘다음은 이놈들이지.’
성현의 앞에 보이는 짐승.
그리고 모래 속에 묻어 둔 콩벌레와 뱀!
이 모든 것들이 성현의 병사가 되어 나모르를 향할 거다.
“저리 비켜!”
“군인이 여기 왜 왔어!”
용병들의 목소리가 성현을 걱정했다.
거친 인생을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자신들의 임무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
군인을 지키는 것.
그런데 뜬금없이 어린 군인이 튀어나오자 당황했다.
“가라고!”
“여기는 우리가 상대한다! 너희는 뒤에서 후방……!”
콰직!
말하던 용병이 염소 형태 짐승의 발에 깔려 죽었다.
그런데 그 죽은 사람이 스르륵 일어선다.
좀비처럼 다시 짐승과 싸운다.
성현은 그를 신경 쓰지 않고 앞으로 달렸다.
전장에서는 죽음을 외면해야 한다.
죽음을 직시하는 순간 사신이 다가와 끌어안을 거다.
그 공포는 몸을 굳게 하고 심장을 떨리게 한다.
‘난 됐어.’
성현은 이런 전장에 익숙했다.
사람이 죽고 짐승이 죽고.
피와 살점이 얼굴에 튀는 극한의 순간.
성현의 주변에 전기로 만들어진 구체가 8개가 되었다.
그것들이 일제히 염소를 향해 쏘아진다.
파파파팡!
염소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설 때, 성현이 허공으로 뛰어 올랐다.
지켜보던 용병들이 눈을 부릅떴다.
“뭐, 뭐야?”
“군인이 왜?”
“저렇게 뛸 수 있는 사람 있어?”
저런 몸놀림을 보이려면 적어도 권능 이해도가 20%는 넘어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 남은 천 명은 20%가 안 되는 자들.
그들이 보기에 성현의 몸짓은 놀라웠다.
그리고 성현의 창이 염소의 정수리에 꽂혔다.
콰직!
과연 익룡과 다르다.
한 번에 죽지 않는다.
성현은 여러 번 찍어 내렸다.
콱! 콱! 콱! 콱!
검붉은 피가 염소의 흰 털을 타고 쏟아졌다.
“지, 지금이야!”
용병 대장이 외쳤다.
그들이 일제히 염소를 향해 달려가 그 다리를 칼로 그었다.
“죽어!”
“제발 죽으라고!”
쿠우우웅!
그제야 염소가 쓰러졌고 숨을 헐떡거렸다.
성현은 망설이지 않고 염소의 목에 창을 꽂았다.
퍼억!
성현의 귓가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린다.
-……올랐습니다.
-보상으로 스텟을 드립니다.
하지만 성현은 지금 그걸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다음.”
어서 다음 짐승을 죽여야 한다.
그런데.
“잠깐.”
용병대장이 성현의 앞에 섰다.
급박한 전투 상황에 멈춰 세우다니, 성현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용병대장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