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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25화 (125/252)

125화

* * *

“우리는 지긋지긋한 하급 신세를 벗어날 거다. 보이는 모든 것과 숨 쉬는 모든 것을 죽여라.”

낫을 든 마녀 아리가 조용히 입을 열며 앞을 바라봤다.

그녀는 높은 단상에 서 있었고 아래에는 수만의 짐승이 그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리가 들고 있던 낫으로 바닥을 치며 계속해서 말했다.

“짐승의 신세를 벗어나 존재가 될 것이다. 두려워하지 마라. 유르라헬의 피가 너희를 지켜 줄 것이다.”

아리의 낫이 바닥을 거세게 때렸다.

쾅!

그 소리에 짐승들이 목을 들어 포효한다.

-카아아아아악!

아리는 짐승들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짐승들은 살육을 기대하며 난리를 치고 있지만 아리는 조금 긴장하고 있었다.

‘젠장.’

마녀 따위가 군주와 싸운다니.

찰나의 순간에 갈기갈기 찢길 게 분명하다.

하지만 어머니의 지시는 지켜야 한다.

그게 이들의 법이다.

아리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로 했다.

‘그래, 나모르야.’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모르가 군주 중에서 약한 축에 속한다는 거다.

마녀보다는 월등히 강하지만 그렇다고 압도적인 상대는 아니다.

‘해볼 만해. 천한 몸으로 태어났다고 영원히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존재는 억겁의 삶을 살아야 한다.

변화가 없다면 영원히 마녀로 살아야 한다는 거다.

다른 존재에게 무시를 받으며 잔심부름이나 해야 하는 똘마니.

그 삶이 앞으로 수억 년 이상 지속되어야 한다.

‘그건 싫어.’

낫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갔고 아리의 눈빛이 고요하게 변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거야.’

아리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약한 생각과 달리 목소리는 힘차다.

“이번 사냥감은 나모르다!”

-카아아아아악!

“가라! 내 아이들이여! 나모르의 목을 베어라!”

짐승들이 몸을 돌렸다.

놈들이 움직이며 ‘쿵! 쿵! 쿵!’ 하고 땅이 흔들린다.

목적지는 군주 나모르의 영역.

아리도 긴장된 한숨을 내뱉으며 거대한 검은 코끼리의 몸에 올라탔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잠깐만…….’

아리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그러고 보니까 그놈도 이곳에 왔다고 했지?’

아리가 떠올리는 그놈은 성현이다.

‘유성현, 유성현, 유성현!’

성현이 군주를 이길 수는 없다.

뢰피크르도 겨우 이긴 놈이 나모르를 이긴다는 것은 하늘에 박힌 존재의 눈동자가 땅에 떨어지는 것만큼 어려운 일.

‘하지만 난처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

아리는 그동안 성현을 쭉 지켜봤다.

성현의 성장 속도는 놀랍지만 아직 대단한 수준에 오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아리가 생각하는 성현의 장점은 성장 속도가 아니다.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고 상황을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

‘그건 인정해야지.’

그런데, 나모르는 유성현이라는 인간을 잘 모른다.

아마 보통의 인간과 똑같이 싸잡아 우습게 보고 있을 거다.

잠시 그렇게 생각에 빠졌던 아리가 갑자기 깔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붉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이용해 볼까?’

* * *

그 시각, 군부대가 있는 곳.

서은서가 도착했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곳은 말 그대로 전장이었다.

짐승이 용병을 짓밟고 뜯어먹는다.

핏물이 울컥거리고 찢긴 팔과 내장이 모래밭을 뒤덮고 있었다.

“사, 살려 줘!”

“끄아아악!”

“대장은 어디 간 거야!”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죽었다고 편해지는 게 아니라는 거다.

죽어도 다시 일어나 짐승과 싸운다.

팔다리가 남아 있지 않을 때까지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이곳에 펼쳐진 저주받은 권능, 강령술 때문이다.

“강령술은 도대체 어떤 새끼야!”

“하지 마! 그냥 죽게 내버려 둬!”

“제발!”

용병들은 울며 싸우고 있었다.

군대의 상황도 좋지는 않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익룡이 불을 뿜어냈고 그 불꽃에 전차의 장갑이 녹아내렸다.

“끄아아아악!”

사막의 열기와 함께 불꽃까지.

푹푹 찌는 뜨거움에서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싸워 댔다.

“쏴! 쏘라고!”

투투투투투!

기관총을 쏘아 댔지만.

덜컥!

탄이 떨어졌다.

“제기랄!”

하늘을 빙글빙글 돌던 익룡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콰아아아아!

불이 다시 쏘아졌고 인간은 불꽃에 휩싸여 타 죽었다.

“으아아아악!”

하지만 마냥 당하는 것은 아니다.

죽은 익룡이 강령술에 의해 다른 익룡을 공격한다.

죽은 놈은 또 인간의 편에 서서 다른 익룡과 싸운다.

물고 뜯고.

하늘에서 익룡의 핏물이 비처럼 쏟아졌다.

이곳에서 삶과 죽음은 다를 게 없었다.

서은서는 다급히 성현을 찾았다.

주변을 둘러보았고 비슷한 체형의 사람을 확인했다.

“유성현 씨?”

하지만 아니다.

어디에도 성현이 보이지 않는다.

‘설마…….’

성현이 저런 짐승에게 당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성현은 강했고 지옥에서도 기어 나올 사람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이곳은 전장이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그때, 성현과 같은 초소에 근무하는 박상문 하사를 발견했다.

그런데.

“없다고요?”

박상문 하사도 정신이 없었다.

무전기를 펼치며 계속해서 지원 요청을 하는 중이었다.

그래서 성현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어디를 간 거야!’

서은서가 입술을 씹었다.

그때가 떠오른다.

성현이 던전에 갇혀 사라지던 그날.

다시 그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서은서가 손으로 이마를 짚을 때였다.

머릿속에 계약한 존재 카디르버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유성현을 쫓아라.

서은서의 눈이 커졌다.

‘유성현을요?’

그 순간에도 메시지가 이어진다.

-지금 놈은 나모르의 영역으로 향하고 있다. 놈을 쫓아라. 놈의 방향은 내가 알려 주마.

하늘에 박힌 존재가 자신의 계약자에게 성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 않다.

입을 다물고 자신들의 유희를 즐기는 게 전부다.

그런데 카디르버는 적극 나서는 중이다.

서은서는 카디르버가 왜 성현을 쫓으라 하는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서은서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무령.”

그녀의 앞에 무령과 30명의 복면인들이 스르륵 나타났다.

“가자.”

무령은 이런저런 입을 열지 않았다.

주변을 슥 둘러볼 뿐이다.

‘강령술…….’

군부대가 밀리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강령술로 되살아난 사체들이 판을 뒤바꾸고 있다.

‘우리가 없어도 되겠어.’

지연우에게 받은 지시는 군부대를 지키는 것.

하지만 이들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다면 굳이 이곳에 남아 있지 않아도 된다.

즉, 여기에 없어도 서은서의 평가가 절하되는 것은 아니란 거다.

애초에 지연우의 지시를 따를 이유도 없고.

무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서은서가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 뒤를 복면인들이 쫓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박상문 하사가 펼쳤던 무전기를 착착 접으며 입을 열었다.

“초소장님?”

박상문 하사의 옆에서 이창민 중사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나타났다.

“어.”

“우리도 갈까요?”

“가야지, 막내 찾으러.”

이창민 중사가 담뱃재를 툭툭 털며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모래를 밟으며 나모르의 진영으로 향했다.

* * *

수만 마리의 짐승들이 검은 모래에 들어섰다.

그런데 이 짐승들의 모습이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팔이 떨어져 있거나 머리에 구멍이 났거나, 심지어 썩어 가는 놈도 있었다.

그중엔 인간도 있었는데 모두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

기괴한 걸음걸이로 비틀비틀 앞을 향하고 있다.

이것들은 전부 사체.

가까이 다가가면 사체 썩는 냄새가 진동을 할 정도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성현이 있었다.

저벅저벅 걸으며 나모르를 향해 간다.

‘군대에 기대할 수는 없어.’

나모르가 엄청난 병력을 군대에 몰빵했고 그 덕에 군대는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전투가 끝난다 해도 다시 전투태세를 갖추는 데 며칠이 걸릴 게 분명하다.

지금 기대할 수 있는 것은 4천 명의 계약자들뿐.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회귀 전 나모르와 붙었을 때를 떠올리면 심각할 정도로 병력의 차이가 크다.

인간은 아직 군주의 무서움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때.

“스톱.”

앞에서 낯선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나와, 얼굴이나 보게.”

그 목소리에 성현이 사체를 지나 앞으로 나갔다.

나풀거리는 드레스를 입고 바위에 기대선 여자가 보인다.

금발 머리에 지나칠정도로 아름다운 얼굴.

바구니가 옆에 있다면 꼭 소풍을 나온 것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겉모습이다.

딱 봐도 존재.

엄청난 마력을 풍겨 내며 여유롭게 서 있다.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가 성현을 보며 싱긋 웃었다.

“마법사니 뭐니 하는 게 네놈이야?”

“그렇다면?”

그녀가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 성현을 향해 다가섰다.

언제든 성현의 목을 비틀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그리고 성현의 앞에 선 그녀가 얼굴을 쑥 내밀며 입을 열었다.

“그냥 돌아가면 봐줄게.”

“……!”

“난 인간 고기는 먹기 싫거든. 괜히 죽이는 것도 싫고.”

그 순간 그녀의 몸에서 짙은 살기가 느껴졌다.

성현의 살갗이 찌릿할 정도였다.

성현이 조용히 있자 그녀가 계속 말했다.

“어서 가. 아니면 처음으로 인간 고기를 맛봐야 할지도 몰라.”

그녀가 하얀 손가락으로 성현의 이마를 쿡 찍었다.

“머리부터.”

그녀의 손가락이 성현의 이마와 얼굴을 지나 가슴을 훑었다.

“배까지 잘라 버릴 거야. 내장을 쏟아 내고 핏물을 씻어 낸 후 고기를 먹겠지. 음…… 질길 것 같은데.”

그녀의 손가락이 성현의 배를 쿡쿡 찔렀다.

그러는 순간에도 살기와 마력이 성현을 옥죄어 온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손을 비벼 대며 살려 달라 애원했을 거다.

그런데, 성현이 픽 웃었다.

“반갑다.”

뜬금없는 인사에 그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반갑다고?”

성현이 자신의 배에 닿아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치우며 말했다.

“오랜만이야. 백작가의 막내딸, 아니오스.”

그녀는 눈을 부릅떴다.

처음 보는 인간이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넌 누구지?”

“아직 인간을 맛본 적이 없나?”

“뭐라?”

성현은 그녀를 알고 있었다.

갓난애의 다리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며 산 채로 사지를 찢어 씹어 먹던 악마.

피 묻은 얼굴로 깔깔거리던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때도 내 손에 죽었는데…….”

“뭐?”

“이번에도 죽겠네?”

빠꾸 없는 눈빛에 아니오스는 오싹함을 느꼈다.

이 인간은 정말 자신을 죽이려 한다.

“미친!”

아니오스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성현은 기다렸다는 듯 창을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그녀는 창을 피하기 위해 재빨리 몸을 틀었다.

그런데 창이 날아오지 않았다.

‘어?’

성현의 창이 노린 것은 그녀의 드레스, 정확히 말하면 치마 밑단이다.

콱!

드레스가 찍혔다.

문고리에 옷이 걸린 것처럼 그녀의 움직임이 제한됐다.

그녀는 성현의 잔인한 미소를 지켜봐야 했다.

성현이 단도를 손에 쥐며 입을 열었다.

“그때도 이 드레스 때문에 발목 잡혔는데?”

“아…… 아…….”

“이번에도 잡혔네.”

아니오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백작가의 막내딸.

한 번도 이런 취급을 받은 적이 없다.

언제나 고고하게 아랫것들을 내려다봤다.

그런데, 먹잇감으로 생각했던 인간 따위의 눈빛에 몸을 떨고 있다.

성현이 악마처럼 웃었다.

“그러게 전쟁터에 치렁치렁한 것을 왜 입고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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