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용을 피해 아니오스의 주변을 돌던 성현이 오른발을 축으로 몸을 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손을 뻗어 땅에 떨어진 창을 쥐더니 곧장 아니오스를 향해 집어 던졌다.
“아…… 아…….”
아니오스는 당황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고 허둥지둥할 뿐이다.
용과 창을 번갈아 보면서.
성현이 슬쩍 웃었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용은 주술자의 집중력이 흩어지면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래서 주술자들은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잃지 않기 위한 훈련을 이어 간다.
하지만.
‘네가 그런 훈련을 했을 리가 없지.’
성현의 예상대로였다.
아니오스는 멍하니 있다가 창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그사이 집중력이 흐트러졌고, 자랑스럽게 뽑아낸 용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젠장!”
정신을 차린 아니오스가 다급히 주변을 살폈다.
다시 용을 만들어 내기 위해 마력을 모으며 이번에는 반드시 성현을 찢어 죽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성현이 보이지 않는다.
‘……어디 갔지?’
아니오스가 눈을 깜빡일 때였다.
“여기.”
뒤에서 끔찍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오스의 시선이 천천히 틀어졌다. 그러자 히죽 웃는 성현이 보였다.
“아…….”
끔찍한 귀신을 본 것 같은 눈이다.
아니오스는 공포에 물들었고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다.
지금껏 아니오스는 포식자였다.
누군가에게 먹힌다는 것은 상상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그 생각이 들었다.
‘먹힐 수도 있어.’
아니오스는 자신을 죽이려는 눈빛을 처음 봤다.
성현의 눈빛은 그만큼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성현의 창이 휘둘렸다.
콰직!
-귀족이 맞기 시작했네.
-ㅋㅋㅋㅋ
하지만 아니오스가 질 것이라 예상하는 존재는 없었다.
모두 잠깐 밀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지금의 상황을 즐겼다.
-인간아, 힘내라!
-창을 휘두르지 말고 찔러야지!
-에헤이, 약하네.
하지만.
콰직! 콰직! 콰직! 콰직!
성현의 창은 불규칙하게 이동하며 아니오스를 구타했다.
위에서 올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오스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머리를 찌를 것처럼 오다가 다리를 찍었다.
아니오스의 얼굴이 부어올랐고 아름다웠던 얼굴이 흉측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코가 무너졌고 입이 찢어졌다.
“아아아악!”
근접전, 짧고 빠르게 다양한 공격이 오가는 상황에서 경험 부족은 큰 차이로 다가온다.
아니오스가 성현을 이기려면 멀리 떨어져야 한다.
성현이 다가오기 전에 마력을 쏟아부으며 폭격으로 박살 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아니오스는 계속해서 뒤로 빠지려 했다.
하지만 성현은 아니오스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바짝 붙으며 창을 휘둘렀고 조금씩 아니오스의 다리를 부숴 버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정말 귀족이 지는 거 아니야, 인간한테?
-설마…….
꽈아아앙!
성현의 창이 엄청난 속도로 아니오스의 머리를 때리고 지나갔다.
아니오스의 몸이 출렁였고 다리는 비틀거렸다.
그러면서도 아니오스는 비틀비틀 그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콱, 성현의 창이 아니오스의 치마 밑단을 찍어 버렸다.
처음과 똑같은 상황.
당황한 아니오스가 눈을 깜빡일 때, 성현이 잔인하게 웃었다.
“치렁치렁한 것 입지 말라니까.”
아니오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
회귀 전, 아니오스는 갓난아기의 비명을 들으며 다리를 뜯어먹는 것을 즐겼었다.
노예의 전투를 지켜보겠다며 연인을, 부부를 그리고 부모 자식을 콜로세움에 세워 놓고 싸우게 만들었던 악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걸 보며 깔깔거렸던 그 악마!
그 악마가 성현의 손에 갈기갈기 찢기고 있었다.
꽈앙!
아니오스가 무너지듯 쓰러졌다.
하지만 성현은 창을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동시에 우드드득, 갈비뼈가 으깨졌다.
방어되고 있던 심장, 허파, 소장이 튕겨 오르듯 허공에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콰지직!’ 하고 아니오스의 머리가 성현의 창에 꿰뚫렸다.
-어…….
-이거…….
-안 되겠네?
존재의 세상은 적막해졌다.
인간에게 깨진 귀족을 보며 충격을 먹은 거다.
그리고 곧.
-나 저 인간 마음에 들었어!
-마음에 든다고? 야비하지 않아? 정정당당 마력으로 승부했어야지! 약점만 파고들잖아?
-싸움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이기면 되는 거지.
-마지막에 치마만 안 잡았어도 예뻐해 주려고 했는데…….
-다들 닥치고. 저놈, 어느 존재의 계약자라고 했었지? 들었었는데.
-내가 살 수 없나?
-골드 싸 들고 대기합니다. 연락 주세요!
존재들은 환호했다.
오랜 시간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온 그들에게 귀족을 박살 낸 인간의 등장은 최고의 유희였다.
같은 존재가 죽어서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기분이 나쁘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내 계약자하고 붙여 봐야겠는데?
-넌 안 돼.
놈들은 극단적일 정도로 개인적이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그리고 성현의 시선이 아니오스에게 향했다.
막내로 태어났다고 하지만 수천, 수만 년을 살아왔다.
하지만 한순간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검은 모랫바닥에 비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성현이 무심한 눈으로 아니오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뭉글뭉글 피가 솟아올랐다.
붉은 피가 동그란 공처럼 모이기 시작한다.
‘너도 이제 내 힘의 일부가 되어라.’
* * *
-어쩌려고 그러지?
창고였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성현이 큰 짐볼처럼 뭉쳐진 아니오스의 피를 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흡수해야지.”
-가진 것도 활용을 못하면서 왜 욕심을 내는 거야!
성현의 몸에는 마법사와 지르힐의 권능 그리고 뢰피크르의 힘이 담겨 있다.
하지만 지르힐의 말대로 제대로 활용하는 것은 없다.
목걸이에 걸린 펜던트가 아니면 통제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힘을 통제하지 못하면 죽고 말 거다. 네 그릇은, 아니 인간의 몸으로 이 힘을 전부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니까 그대, 이 피는 버려라.
과일을 올려야 할 접시에 25톤 트럭을 올릴 수는 없는 법이다.
깨져 버리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흔적조차 없어질 거다.
하지만 성현은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고 멈출 수는 없잖아?”
-그대!
지르힐이 말렸지만 성현은 이미 손을 들어 아니오스의 핏물에 손을 담갔다.
동시에 그 핏물이 성현의 몸에 흡수되기 시작한다.
“끄읍!”
성현의 온몸에 핏줄이 솟아났다.
심장이 엄청난 속도로 뛰었고 맥박은 정상이 아니었다.
몸을 이룬 모든 신경이 고통을 쏟아 냈다.
‘견뎌야 해.’
성현은 이를 악물고 참아 냈다.
그리고 목표를 떠올렸다.
성현의 목표는 지연우와 그 뒤에 있을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
그들과 함께 있는 존재들의 단체, 교.
성현의 머릿속에 플로르의 시뻘건 눈동자가 기억됐다.
‘놈을 죽여야 해.’
놈들의 얼굴이 떠오르자 분노가 고통을 이겨 내기 시작했다.
신체의 고통보다 정신적 아픔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현은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이서아를 떠올렸다.
이서아는 인류 최고의 예언자였다.
그리고 각 상황별로 이어진 수억 가지의 미래를 봤다.
그런 이서아가 이렇게 말했었다.
“제가 본 수억 가지의 미래. 그중에 우리의 승리는 단 한 번도 없었어요.”
이서아의 예언은 100%다.
그런데 수억 분의 일이라는 확률에도 승리는 없었다.
성현을 과거로 보낸 이서아나 이곳에서 발버둥 치는 성현이나 답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 대책 없이 발악하는 중이다.
하지만 이서아가 본 미래는 평소 성현의 행동을 바탕으로 예상된 것.
회귀 전 성현은 언제나 왕도를 따랐다.
사람이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스스로 강요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평범한 길에서 완벽히 벗어나 있다.
마녀의 피를 흡수하고 귀족과 일대일로 싸우고.
만약 아니오스가 조금만 경험이 있었어도 죽은 것은 성현이었을 거다.
성현은 언제나 벼랑 끝을 달리고 있다.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손가락으로 툭 쳐도 떨어져 죽고 말 거다.
하지만 큰 위험은 높은 보상으로 다가오는 게 세상이다.
‘할 수 있어!’
성현이 끌끌끌 웃기 시작했다.
울컥울컥, 핏물을 토해 내면서도 그 보상을 기다리며 크게 웃는다.
* * *
“하…….”
지르힐이 갇혀 있는 탑.
지르힐이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지르힐은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며 수많은 미친 인간을 지켜봤다.
종이접기를 하듯 시체를 접고 자르며 살육에 미친 연쇄살인범.
모닝커피와 함께 인육을 즐기던 미식가.
그리고 변태적인 행위에 집착하는 정신병자.
하지만 그 미친놈들을 전부 모아도 성현에 비하면 정상인 것 같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서지며 내장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느끼면서도 오히려 웃고 있다니.
한참이나 한숨을 내뱉던 지르힐이 고개를 틀어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눈도 붕대로 가려져 볼 수 없지만 손목을 묶은 쇠사슬이 많이 약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온전한 몸에 비하면 한참 모자라지만 마력도 점차 돌아오고 있다.
‘그대, 조금만 기다려라. 내 온전한 힘을 너에게 쏟으리라.’
그때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묻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다.
이곳에 오는 것은 단 하나.
그 꼬마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꼬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지르힐 님을 뵙습니다.”
“그래, 오늘은 어쩐 일이냐?”
“일단.”
꼬마는 이 탑에 오기 전 유르라헬의 성에서 정보를 팔고 피를 얻어 왔다.
그 피를 쇠사슬에 부으며 말을 이었다.
“조한이 화가 났다고 합니다.”
“……조한?”
지르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억에 없던 이름이다.
꼬마가 슬쩍 웃으며 계속 말했다.
“모르실 겁니다, 흐흐.”
꼬마는 괜히 으쓱거렸다.
지르힐은 신의 분노라 불렸던 존재.
하찮은 귀족 따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하지만 지르힐과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꼬마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
‘백작 따위보다는 내가 높은 거지. 몰락했지만 왕가는 왕가였으니까. 흐흐.’
꼬마가 옛 기억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말을 이었다.
“방금 유성현이 싸웠던 존재의 아버지입니다. 전장의 비명을 관장하는 백작, 조한. 나모르에게 속한 자죠.”
지르힐이 눈을 찌푸렸다.
존재는 심각할 정도로 개인적이다.
자기 자식이 죽었다고 분노하지 않는다.
자식은 또 만들면 되는 것.
인간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 왜?”
“아, 못 보셨나 봅니다?”
꼬마가 허공에 손가락을 빙글 돌리자 공간이 일렁이며 두꺼운 책 하나가 나타났다.
성현의 싸움을 지켜보던 존재들의 반응을 모아 둔 책이다.
꼬마가 책을 펼치며 읽기 시작했다.
“딸이 저따위면 조한도 별것 없겠네? 가서 죽여 버릴까?”
“…….”
“조한 목 따러 갈 존재 모아요. 오랜만에 전쟁?”
“…….”
“저게 진짜 백작 딸이라고? 내 계약자랑 싸워도 죽겠는데?”
조한의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났다.
놈은 성현을 짓밟고 다시 자존심을 세우려 한다.
“하…….”
지르힐의 입에서 또 한숨이 흘렀다.
조한은 아니오스와 다르다.
뢰피크르와는 비교할 수도 없다.
놈은 진짜 귀족이다.
그런데, 성현의 몸은 폭발 직전이나 마찬가지다.
그 순간.
덜컹!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꼬마와 지르힐의 시선이 소리가 들린 쪽으로 틀어졌다.
“어……?”
꼬마는 멍했다.
지르힐의 손목을 구속하고 있던 쇠사슬이 풀어진 거다.
유르라헬의 피에 조금씩 녹았던 게 지금 완벽히 끊어졌다.
꼬마가 말을 더듬었다.
“지, 지르힐 님?”
물론 지르힐은 여전히 구속된 상태다.
목과, 다른 손목 그리고 발목이 여전히 묶여 있다.
하지만 손 하나가 자유가 되었다는 것은 의미가 다르다.
지르힐이 곧바로 눈을 가린 붕대를 뜯어 버렸다.
금빛 눈동자로 주변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다.
그녀의 첫 마디는.
“……보여.”
“지르힐 님!”
꼬마가 다급히 지르힐의 앞에 섰다.
“잠깐만, 잠깐만.”
워낙 갑작스러운 상황이다.
지르힐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꼬마를 멈춰 세웠다.
“조금만 천천히 이야기하지.”
잠시 후, 지르힐은 돌아오는 마력을 느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사악한 미소가 흘렀다.
“……백작이라고?”
“네?”
“백작 따위가 지금 내 계약자에게 자존심을 세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