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얘기?”
“그래, 얘기.”
동시에 아리의 몸이 붕 떠올랐다.
뱀의 머리까지 날아오른 아리가 성현과 눈을 마주치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
평범한 사람이 봤다면 그 미소에 홀렸을 거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성현에게 아리는 인간의 피를 즐기는, 그리고 인간을 벌레처럼 여기는 존재일 뿐이다.
성현은 시선을 틀어 아리의 어깨 너머를 바라봤다.
전쟁이라도 치를 것처럼 끝없이 많은 짐승을 끌고 왔다.
‘뭐지?’
짐승을 살펴보던 성현은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당시 나모르와의 전투.
다른 존재는 참여하지 않았다.
하늘에 박힌 눈동자로 전쟁을 즐기며 과자나 씹어 먹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라지고 있다.
아리가 참전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많은 숫자의 짐승을 끌고.
성현이 알던 미래가 급격하게 틀어지는 중이었다.
그래서 그 이유가 궁금했다.
“네 영역이 여기는 아닐 텐데? 여기는 왜 왔지?”
아리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이 영역을 내 것으로 하려고.”
즉, 나모르를 끌어내린 후 자신이 그 왕좌에 앉겠다는 거다.
“마녀잖아?”
성현의 질문은 당연했다.
마녀는 하급의 존재다.
어떤 존재는 마녀를 쓰레기로 여길 정도다.
절대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없다.
순간 아리의 눈동자에 분노가 확 솟아올랐다.
천한 신분은 아리에게 역린이다.
그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치는 중인 거다.
그런데, 인간 따위가 ‘마녀잖아?’라니.
그녀는 지금 당장 성현을 죽여 버릴까 생각했다.
성현이 조금 강해지기는 했어도 그녀는 어머니의 권능을 갖고 있다.
짧은 시간에 성현의 팔다리를 뽑아 버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꾹 참으며 억지로 미소를 그렸다.
지금 그녀에게는 성현이 필요했다.
“인간, 난 보통의 마녀와 달라. 지금 나는 어머니의 권능을 손에 쥐고 있어.”
아리가 주먹을 쥐었다 폈다.
그러자 농도 짙은 검은 마력이 일렁거렸다.
그리고 그녀가 말을 이었다.
“어머니께서 허락하셨지. 나모르를 끌어내고 그 왕좌에 내가 앉으라고.”
성현의 시선은 다시 아리의 어깨 너머로 틀어졌다.
확실히, 저 정도의 짐승을 끌고 온 것을 보면 마녀의 등급은 넘어섰다.
적어도 방금 싸웠던 아니오스 정도의 마력은 갖고 있을 거다.
‘지금 인간의 병력은 고작 4천.’
회귀 전, 나모르를 토벌할 때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아리의 병력이 한편이 된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이다.
성현의 눈빛에 긍정적인 신호가 보이자 아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네가 뢰피크르와 싸울 때 기억하지? 그때 난 말했어, 너희의 싸움에 끼어들지 않겠다고. 그리고 난 그 약속을 지켰어. 도박으로 얻었던 이익 역시 공평하게 너와 나눴고.”
“…….”
“난 인간과 달라. 약속은 지킨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우리, 파티를 맺는 게 어때?”
“파티?”
성현이 눈을 찌푸리자 아리가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인간의 병력으로 나모르를 이길 수 없어. 나 역시 어머니의 권능을 얻었다 해서 자신할 수는 없고. 그래서, 우리가 힘을 합치는 거지.”
성현이 손을 저었다.
“그런 일반적인 이야기 말고.”
“그럼?”
성현이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네가 이 땅을 손에 쥐면 나에게는 뭐가 남지?”
“……!”
“뭘 줄 수 있지?”
아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무리 하급이라 해도 그녀 역시 존재다.
인간을 우습게 생각한다.
자신이 말하면 따라야 할 하등 동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성현이 이런 질문을 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더듬더듬 물었다.
“……뭘 원하지?”
“딱 절반으로 나누자. 네가 얻는 것의 딱 절반.”
“뭐!”
아리가 눈을 부릅떴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나모르가 아무리 힘없는 군주라 해도 군주다.
그 영역은 인간이 욕심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성현의 눈동자를 보면 진심이다.
탐욕스럽게 이 땅을 원하고 있다.
아리가 입술을 꽉 물었다.
‘그래.’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은 성현의 말에 따라 주는 것처럼 하자고.
그리고 그다음 성현을 죽여 버리면 된다고.
‘나모르의 영역을 차지하면.’
어머니는 그녀에게 군주에 가까운 권능을 나눠 줄 것이다.
그 순간 죽여 버리면 어떤 문제도 없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성현을 향했다.
‘도구.’
그녀에게 성현은 도구였다.
나모르의 영역을 차지할 때까지 유용하게 사용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버리면 되는 도구.
그녀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게 하지.”
“성립이다.”
성현과 아리가 악수했다.
그리고 아리는 한마디 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런데 인간, 하나 알려 주지. 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원하면 다칠 수도 있는 법이란다.”
성현이 슬쩍 웃었다.
“조언도 해 주고 고맙네. 새겨듣지.”
* * *
거대한 동굴, 아니 동굴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높이만 수십 미터.
하지만 천장에는 동굴에서 볼 수 있는 뾰족한 종유석이 가득 매달려 있었다.
그곳의 한복판은 광장 같았는데, 타오르는 불을 중심으로 인간들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마치 원시 부족의 축제를 알리는 것처럼.
“나모르 님께서 말씀하신다! 영생을 주겠다 하셨다! 잠깐의 고통을 참으면 죽지 않고 영원한 삶을 살 수 있다 말씀하셨다!”
“와!”
“우리는 영생을 얻었다! 나모르 님을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
“영생! 영생! 영생!”
불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간들의 숫자가 수 백이다.
그런데, 이들을 가까이에서 보면 인간과 비슷하기는 했지만 조금 다르다.
송곳니가 드러나 있고 피부는 썩어 가고 있다.
눈동자에는 검은자가 없다.
그리고 옷을 입고 있지 않고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벌거벗은 채로 손뼉을 치며 웃고 있다.
어두운 동굴 안에서 불꽃에 비친 그들의 그림자가 동굴 벽에서 을씨년스럽게 흐느적거렸다.
그때였다.
“와!”
함성과 함께 한 여성이 들것에 실려 오고 있었다.
그녀 역시 어떤 것도 입고 있지 않다.
다만 입이 붕대로 꽉 묶여 있었고 팔과 다리가 밧줄로 칭칭 동여매졌다.
“읍! 읍!”
그녀의 등장에 이들이 빠르게 손뼉을 쳤다.
어떤 놈은 손을 들고 방방 뛴다.
그야 말로 축제다.
“영생! 영생! 영생!”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들것은 그대로 이글거리는 불을 향해 이동하고 있다.
불 앞에 다다르자 해골을 머리에 쓰고 있는 노인이 앞에 섰다.
그리고 그녀의 입을 가린 붕대를 풀어 버렸다.
“유한한 육체를 가진 마지막 삶. 앞으로는 영생을 얻을 것이라 했다. 그래, 지금 버려야 할 육체의 입에서 나올 말은 무엇이냐?”
“살려 주세요.”
여성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하지만 노인은 썩어 버린 이빨을 보이며 활짝 웃었다.
“그래, 살 것이다. 나모르 님을 믿어라. 너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가라! 영원한 삶을 향해 가라!”
노인이 손가락으로 불꽃을 가리켰다.
들것이 불꽃을 향해 던져졌다.
“꺄아아아악!”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살이 타는 소리, 냄새 그리고 발버둥 치는 그녀.
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지키고 있던 남자들이 시뻘건 몽둥이로 그녀를 두들겨 팼다.
“악! 악!”
벌거벗은 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불꽃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영생! 영생! 영생!”
“잠깐!”
그때, 그들이 갑자기 우뚝 멈췄다.
그리고 시선을 틀어 계단으로 향했다.
계단의 가장 끝에 놓인 발코니.
그곳에 피로 얼룩진 로브를 입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가 고압적인 눈동자로 그들을 내려다봤다.
그러자 벌거벗은 자들이 무릎을 꿇었다.
“마법사님이다!”
“무릎 꿇어!”
“어서!”
이제는 여성의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타닥타닥, 불꽃 소리만 들리는 적막한 공간.
로브를 입은 남자가 벌거벗은 사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족장들은 가서 전하라. 검은 사막이 뚫렸고 협곡이 무너졌다. 이제 곧 적들이 몰려올 것이다. 너희는 준비하고 있으라. 적의 피로 제물을 바쳐 나모르 님을 즐겁게 하라!”
로브를 입은 남자가 들고 있던 지팡이로 발코니를 딱딱딱 쳤다.
그리고 로브를 입은 남자가 동굴을 둘러봤다.
동굴의 벽에는 수천수만 개의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인간들이 얼굴을 빼꼼 내민다.
그들이 눈을 반짝일 때, 로브를 입은 남자가 지팡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오늘은 죽은 자의 축제다!”
얼굴을 내민 인간들이 비명 같은 함성을 내질렀다.
“와!”
* * *
그 시각.
백작가의 장남 라덴이 불꽃에 휘말렸다.
그가 발버둥 치며 악을 내질렀다.
“끄아아아악!”
그러면서도 그의 눈빛은 지연우의 칼을 향했다.
칼을 타고 일렁이는 불꽃.
라덴은 이제야 알았다.
지연우가 누구와 계약했는지.
어떻게 인간이 존재를 넘어선 힘을 갖고 있을 수 있는지!
라덴이 갑자기 낄낄낄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에 타 죽는 상황에도 눈을 부릅뜨고 지연우를 노려봤다.
“인간! 내가 하나 가르쳐 주지! 넌 영원히 노예로 살 거다! 그 존재는 우리와 달라! 어머니? 개 같은 소리 하지 마! 그건 진짜 괴물이야! 넌 그 괴물의 아래서 길러지는 짐승일 뿐이야! 크핫핫핫핫!”
지연우의 표정은 무심했다.
라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아.”
“안다고! 헛소리하지 마! 100년도 못 사는 인간이 수백 억년을 살아온 존재를 이해한다는 듯 말하지 마라. 우스우니까!”
지연우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렸다.
지연우가 라덴을 향해 다가가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늙으면 다 현명한가?”
“뭐?”
“이제 그만, 입을 닫아라.”
지연우가 칼을 휘둘렀다.
라덴의 머리가 떨어져 나가더니 데굴데굴 땅을 굴렀다.
백작의 장남의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어이없을 만큼 쉬운 죽음.
이게 전쟁이다.
지연우가 칼을 툭툭 휘둘렀다.
그러자 세상을 불태울 것처럼 일렁이던 불꽃이 사라졌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라덴이 죽으며 하늘에서 떨어지던 돌덩이가 멈췄다.
같은 편을 향해 칼을 휘두르던 라덴의 계약자는 그 힘이 빠지며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살아남은 계약자들이 평범하게 변해 버린 그들의 목을 단숨에 그어 버렸다.
그리고 지연우가 그들을 보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잠시 쉬었다 가지.”
잠시 후.
지연우는 다시 나모르의 성으로 이동했다.
지연우의 옆에서 길잡이를 맡은 계약자가 입을 열었다.
“들어 본 적 없습니까? 영생을 준다는 종교.”
“한두 개여야지.”
“그렇죠. 그런데, 그중에 나모르를 숭배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나모르를?”
길잡이가 끌끌 웃었다.
“좀비처럼 살게 되는 삶을 영원한 삶이라 생각하는 거죠.”
세상에 짐승이 모습을 드러내고 존재가 나타난 세상이다.
종말론을 외치는 사람들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람은 좀비가 되어 영원히 살고 나모르는 그 생명력을 빨아먹고. 서로 이득이라 생각했나 봐요, 흐흐.”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이동하던 중 그들의 앞에 질척거리는 진흙 바닥이 나타났다.
“다 왔습니다. 나모르의 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