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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35화 (135/252)

135화

거인의 눈이 일그러졌다.

자신을 보면 겁을 먹어야 한다.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하는 게 인간이다.

하지만 성현은 가소롭다는 듯 웃고 있었다.

-웃어?

“반가워서.”

-뭐?

성현이 곧바로 창을 휘둘렀다.

그 창이 거인의 미간을 찍어 누른다.

다른 계약자가 칼을 휘둘렀을 때는 튕겨 나왔지만 성현의 창은 달랐다.

콱!

거인의 눈이 시뻘게졌다.

창이 미간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 이게…….

거인은 믿을 수 없었다.

나모르가 직접 전해 준 육체다.

인간 따위의 공격에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창은 박혔고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거인이 비명을 질렀다.

-끼아아아아!

그 소리는 칠판을 긁는 것 같았고 동굴을 울렸다.

괴로운 소리에 대다수의 계약자가 귀를 막았다.

하지만 소용없다.

고막이 찢어지며 피가 흐른다.

“끄으읍!”

“그만! 그만!”

“멈춰!”

계약자들이 주저앉았다.

소리를 이겨 낼 수 없어서다.

하지만 성현은 계속해서 창을 찍고 또 찍었다.

그리고 거인의 상처가 벌어졌을 때, 창을 비틀어 뽑아냈다.

상처를 벌린 후 손을 쑥 집어넣었다.

성현의 손에서 전기가 쏟아졌다.

파지지직!

지연우는 눈을 부릅떴다.

‘저, 저게…….’

믿을 수 없었다.

이 자리에서 돋보이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그게 계획이었다.

하지만 성현이 그 자리를 꿰찼다.

거인의 머리를 쥐고 창과 전기의 공격을 이어 가며 두들겨 패고 있다.

그때마다 거인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뇌의 찌꺼기가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아, 안 돼!’

지연우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계속 성현에게 저 자리를 내줘서는 안 된다.

지금이라도 전투에 참여해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지연우가 입술을 씹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을 꽉 줬다.

‘지금 나서면…….’

들러리가 된다.

들러리를 넘어 주인공이 되려면 더 화려한 공격을 펼쳐야 한다.

압도적인 무엇인가를 보여 주지 않으면 지금 성현의 퍼포먼스를 넘어설 수 없다.

지연우는 칼을 뽑았다.

칼에서 시커먼 연기가 불꽃처럼 화르르륵 솟아올랐다.

‘간다.’

지연우가 움직였다.

공포에 질린 계약자들을 지나 지금껏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이동했다.

그리고 계약자들이 알아봤다.

“지, 지연우다!”

“그래, 지연우가 있었어!”

계약자들은 무너진 성벽 앞에서 백작가의 아들을 부숴 버린 그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파괴력이면 지금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다고 믿었다.

모든 계약자가 희망 섞인 눈으로 지연우를 바라봤다.

쉬이이이익!

지연우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인간을 넘어선 속도로 거인의 발아래에 섰다.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고 동시에 검은 연기가 솟구쳐 오르는 칼을 휘둘렀다.

거인의 몸에 죽죽 상처가 그어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거인은 비명을 질렀다.

고통을 느껴서가 아니다.

나모르에게 받은 신체가 두 인간의 힘에 밀리고 있다는 분노!

-죽여 주마!

거인의 눈이 시퍼렇게 타올랐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로 시체 썩은 내가 진동했다.

그리고 거인이 몸을 틀었다.

-너희는 나모르 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 죽어라! 영원의 암흑 속에 눈을 감고 반성하라!

거인이 손바닥으로 바퀴벌레를 찍듯이 바닥을 쾅, 쾅 찍었다.

계약자들은 벌레처럼 도망쳤다.

도망치지 못한 계약자는 단발적인 비명도 없이 즉사했다.

바닥에서 떼어진 거인의 손바닥에 축축한 핏물이 달라붙어 있었다.

그리고 번뜩거리는 눈으로 계약자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다음.

계약자들은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숱하게 많은 짐승들과 싸워 왔지만 이런 괴물은 처음이었다.

감당하지 못할 힘 앞에서 인간은 작았고 초라했다.

그때 지연우가 거인의 어깨에 오르며 외쳤다.

“싸워! 싸우라고!”

지연우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들을 아끼기 때문이 아니다.

이유는 하나, 다른 계약자가 거인의 시선을 끌어야 싸우기 편해지기 때문이다.

“칼을 들고 싸워! 인간답게 죽어야지!”

계약자들이 눈을 깜빡였다.

지연우의 의도는 아니었지만 그들은 지연우가 용기를 북돋아 준다고 생각했다.

“그, 그래 싸우자!”

“도망치다 죽느니 싸워야지!”

“가만히 있으면 어차피 죽어!”

“이왕 죽는 것, 인간답게 죽자!”

계약자들이 치아가 부서질 듯 입을 다물고 덤벼들었다.

“와아아아!”

거인의 발을 향해 인간이 개미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지연우는 다시 거인에게 집중했다.

칼을 쥔 손에 힘을 주자 검은 연기가 불꽃이 되어 솟구쳤다.

그렇게 거인의 목을 베기 위해 집중하는데…….

‘어?’

지연우의 시야에 성현이 보이지 않았다.

방금까지 거인의 미간에 창을 쑤셔 넣던 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거다.

‘어디에 갔지?’

지연우는 주변을 살피며 성현을 찾았다.

좌우, 그리고 아래.

어디에도 없다.

‘어디에 있는 거냐!’

지연우가 눈동자를 위로 올렸다.

그리고 지연우는 성현을 찾았다.

성현은 벽에 붙어 있었다.

거인의 관심이 지연우에게 쏠린 틈을 타 벽을 오르는 중이다.

지연우가 입술을 뜯었다.

‘또 뭘 하려는 거야!’

하지만 지연우는 계속 성현에게 집중할 수 없었다.

거인의 손이 파리를 쫓듯 자신을 향해 휘둘렸기 때문이다.

‘젠장!’

* * *

성현은 동굴 벽을 오르고 있었다.

동굴 벽은 절벽 같았다.

보기만 해도 위태로웠다.

하지만 성현은 이를 악물고 기어올랐다.

작은 틈만 보이면 손가락을 꽂고 손을 교차로 움직이며 천천히 위를 향해 오르고 있었다.

성현이 시선을 들어 위를 바라봤다.

동굴의 천장은 끝없는 어둠으로 가득하다.

집어삼켜질 것 같은 마력이 계속해서 뿜어지고 있다.

천장을 향할수록 몸이 불타는 것 같은 열기가 가득했고 살이 녹아내릴 것 같은 통증이 신경을 건드렸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기겁을 하고 공포에 질렸을 거다.

하지만 성현은 손을 뻗어 더듬더듬 작은 틈을 찾았다.

천장을 향해 오르는 이유는 하나다.

저 위에 나모르의 눈동자가 있다.

성현이 잠시 휴식을 취하며 고개를 틀어 아래를 바라봤다.

어느새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보인다.

커다란 거인도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진다.

자칫 떨어지면 아무리 성현이라 해도 죽고 말 거다.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으며 다시 위를 바라봤다.

아래를 보는 것은 아찔했지만 위를 보는 것은 암담하다.

끝이 보이지 않아서다.

지금 올라온 것보다 몇 배는 더 올라가야 할 것 같다.

‘다시.’

휴식은 끝났다.

성현은 다시 팔을 움직였다.

천천히 위를 향해 오르며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회귀 전 나모르를 상대로 전투를 벌일 때, 이 벽을 올랐던 것은 성현이 아니라 지연우였다.

놈이 이 벽의 끝까지 기어올라 나모르를 끄집어냈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지연우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의 지연우를 기억하면, 입으로는 착한 척, 세상 모든 어려운 사람을 품는 척, 위선적인 모습을 보였었다.

그리고 자신이 돋보이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놈, 그게 전부였던 것 같다.

‘존재를 무서워하지도 않았지.’

심지어 놈은 존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를 계약 존재로 두면서도 철저히 이용할 대상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는 존재를 이용해 안락하고 영웅적인 미래를 꿈꿨었다.

하지만 나모르와 싸운 후 놈은 변했다.

존재에게 굽실거렸고 존재의 명을 따랐다.

그 이유가 저 위에 있을 것 같다.

성현은 그 이유를 찾기 위해 계속 움직였다.

* * *

그 시각.

-인간 주제에!

거인이 소리를 내지르며 팔을 휘저었다.

단 한 번의 손짓에 계약자는 맞아 죽는다.

동굴 벽에 박혔고 바닥을 튕기며 괴로워했다.

쾅! 쾅!

놈이 바닥을 밟았다.

바닥에 금이 가며 놈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죽여어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약자들은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다.

거인의 발을 타고 올라가 허벅지에 칼질했다.

처음에는 어떤 상처도 낼 수 없었지만 거인의 마력도 떨어지는 중이다.

상처가 생겼고 피가 흐른다.

“죽일 수 있어!”

“더! 더!”

계약자들은 서로를 응원하며 계속해서 싸웠다.

그리고 이창민 중사는 손에 힘을 꽉 줬다.

그러자 마력이 솟구치며 기관총이 소환됐다.

“상문아!”

박상문 하사가 기관총 앞에 섰다.

탄을 장전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르륵!

거인의 몸은 거대했다.

조준을 하지 않았지만 탄알이 그대로 박혀 들어갔다.

박상문 하사의 눈이 빛났다.

“효과가 있어요!”

이창민 중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쏴!”

기관총의 총열이 금방 붉어졌다.

이창민 중사는 탄과 총열을 소환하며 계속해서 지원했다.

거인이 휘청거렸다.

집요할 정도로 달려드는 수많은 계약자들.

그리고 박상문 하사가 갈겨 대는 기관총.

마지막으로 어깨와 머리를 타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며 공격하는 지연우.

거인은 분노했다.

눈이 불길할 정도로 퍼렇게 빛났다.

-인가아안!

그 순간 거인의 목에 붉은 연기가 휘감겼다.

-컥!

거인의 본모습은 폐호흡을 하는 인간이다.

목이 휘감기며 처음으로 고통의 소리를 내뱉었다.

-누, 누구야?

서은서였다.

그녀가 붉은 연기를 움직여 거인의 목을 옥죄고 있었다.

“이길 수 있어!”

거인이 비틀거리자 계약자들은 힘을 냈다.

눈을 반짝이며 힘차게 무기를 손에 들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쩍!

이질적인 소리가 들렸고 모든 사람들은 그 소리에 멈칫거렸다.

주변을 둘러봤다.

‘뭐, 뭐야?’

지금껏 이들은 동굴의 한가운데에 피어 오른 불꽃에 시각을 의존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굴 벽이 갈라지고 있다.

그 갈라진 벽에서 보라색 빛이 새어 나오는 중이다.

사람들이 눈을 깜빡였다.

눈을 감았다 뜨는 동시에 벽이 쪼개졌고 작은 돌이 툭툭, 떨어졌다.

동시에 거인이 웃기 시작했다.

-나모르 님이 강림하신다! 인간들은 머리를 조아리고 나모르 님을 맞이하라! 캬핫핫핫핫!

사람들은 긴장했다.

거인도 미친 것처럼 강하다.

그럼, 나모르는?

차원이 다를 거다.

인간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끔찍할 게 분명하다.

인간들은 손을 떨었고 챙그랑, 자신도 모르게 병장기를 떨어뜨렸다.

잠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희망이 촛농처럼 녹아 흘러 버렸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데 거인은 계속 웃고 있다.

-지금이라도 회개하고 반성하라! 나모르 님은 인자하시다! 캬핫핫!

그런데 거인의 웃음이 사라지는 동안에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벽이 갈라졌고 보라색 빛이 새어 나오는 게 전부였다.

천장에서 떨어지던 돌멩이도 이제는 없다.

겁을 먹었던 인간들이 다시 정신을 차렸다.

“허세였어!”

“와아아!”

* * *

성현의 손이 벼랑 끝을 잡고 몸을 당겨 위로 올라갔다.

분명 동굴 벽을 기어 올라왔는데 그 위는 산 정상이었다.

마치 화산의 분화구와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하얗게 쌓인 눈이 가득하다.

지금도 눈발이 흩날리고 있다.

성현이 시선을 틀었다.

분화구의 한가운데에 핏기가 빠진 피부처럼 보라색을 띤 구체가 둥둥 떠 있었다.

지름이 약 2m.

구체가 눈을 깜빡이듯 껌뻑거렸고 눈꺼풀처럼 벌어지더니 눈동자가 나타났다.

이것이 나모르의 눈동자다.

‘찾았다.’

성현이 창을 꽉 잡았다.

순간 나모르의 눈동자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 우리에게 대적할 수 있겠느냐? 진실을 보고도 견딜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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