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 * *
“군주를 이겼다고? 존재도 별것 아닌 거 아니야?”
“야, 계약자와 군대의 피해도 크대.”
“그래? 얼마나?”
“거기까지는 모르는데, 아무튼 그렇대.”
“어디 피셜이야?”
이계의 문 앞에는 엄청난 숫자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수천 명은 온 것처럼 여겨진다.
대한민국의 기자뿐만 아니라 외신까지.
그들은 곧 돌아올 토벌대를 기다리며 눈을 반짝였다.
“몇 분 남았지?”
“오후 2시에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이제 5분 남았네.”
지금껏 사람들은 인간을 초월한 존재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계약’과 인간의 인지로 이해할 수 없는 ‘권능’.
지구의 주인이라고 여겼던 인간이 인형처럼 놀잇감이 되었지만 그 불만을 토해 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지연우의 토벌대가 군주를 ‘죽였다’.
마녀나 마인, 귀족도 아닌 군주를 짓밟고 그 땅을 손에 넣었다는 사실은 충분히 들뜨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또 하나, 대한민국 기자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있었다.
“지연우 랭킹이 얼마나 치솟을까?”
“적어도 톱 3에는 들겠지?”
“톱 3가 문제냐? 세계 랭커도 가능해.”
대한민국의 랭커는 세계 랭커에 비해 한 수 아래로 평가 받고 있었다.
일단 그 숫자가 적었고 대한민국 토지의 대부분을 짐승에게 빼앗기며 실력조차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인류 최초로 군주를 잡았다.
“하우치보다 더 높이 올라가는 거 아냐?”
어느 기자의 말에 모든 기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물론 랭커는 상징적인 의미일 뿐이다.
페이트 길드의 서준식은 후계에 오르며 랭커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연우 역시 마찬가지, 랭킹에 비해 그 실력을 숨기고 있다는 평가가 컸다.
하지만 하우치는 다르다.
명실상부 대한민국 No. 1.
지연우가 하우치를 밟고 그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면 대한민국 계약자들의 지도가 바뀌게 될 거다.
잠시 후, 이계의 문에 검은 연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왔다!”
한 기자가 외쳤다.
이제 주인공들이 돌아올 거다.
그들의 입에서 이계의 싸움을 직접 전해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문에 나타난 계약자들을 보는 순간 기자들의 입이 얼어붙은 것처럼 꽉 다물렸다.
계약자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당당히 승전보를 들고 온 게 아니다.
팔이 한 짝 없거나 다리가 없었다.
눈에는 어떤 영혼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멍하다.
살아남았다는 본능만 가득하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처참한 패잔병과 같았다.
심지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는데…….
“이, 이게 전부야?”
당당히 들어갔던 수천 명의 계약자는 없었다.
돌아온 사람은 약 800명.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지연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자들이 우르르 지연우를 향해 달려갔다.
“군주 나모르 토벌에 성공했습니까?”
“생존자가 적어 보이는데요.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지연우는 억지로 웃었다.
스스로 알고 있어서다.
이 질문을 받아야 할 것은 자신이 아니다.
성현이다.
‘젠장.’
하지만 지연우는 인상을 쓰지 않았다.
여기서 대인배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지금껏 쌓아 온 평판마저 흔들릴 수 있다.
그리고 말하기에 따라 주객은 얼마든 전도될 수 있다.
어쨌거나 지연우는 이 토벌대의 대장이다.
누가 나모르를 죽였든 지연우가 지휘를 잘했다는 식으로 전할 수 있으며 그 모든 공을 지연우 본인에게 돌릴 수 있다.
지연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토벌은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우리와 함께했던 많은 동료가 그 생명을 다했습니다.”
지연우가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인이 나타났을 때 가장 먼저 나섰다면, 그리고 제대로 된 지휘를 했다면 이렇게 많은 사상자는 없었을 거다.
하지만 지연우는 그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모든 사람이 최선을 다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하고 있었다.
영혼 없는 가식적인 이야기.
“전투 중에 돌아가신 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길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으로 군주를 이길 수 있었고 이곳에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지연우는 무난한 인터뷰로 상황을 마쳤다.
죽은 자에게 승리의 영광을 돌리며 성현에게 쏟아질 스포트라이트를 뺏으려 했다.
하지만 아무리 지연우라 해도 막을 수 없는 게 있었다.
바로 함께 전투를 치르고 살아남은 계약자들.
그들이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계약자들이 전부 돌아왔지만 그들은 떠나지 않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군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지휘관.
그다음으로 성현이 나타났다.
이창민 중사와 박상문 하사에게 부축을 받아 처참한 몰골로 비틀비틀.
동시에 계약자들이 소리를 질렀다.
“와!”
지연우와 인터뷰를 하던 기자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지연우에게서 틀어져 성현에게 집중됐다.
계약자들이 성현에게 달려갔다.
“네 덕에 살았어!”
“진작 얘기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말을 못 했다! 정말 고마워!”
“어떻게 그렇게 센 거야? 아직 어린 것 같은데!”
패잔병처럼 있던 계약자들이 소란스러워지자 기자들이 눈을 깜빡이며 지연우를 바라봤다.
“……저게 무슨 소리죠?”
지연우는 입술이 떨리면서도 억지로 웃었다.
그리고 자기의 입으로 전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성현의 활약을 전해야 했다.
“저…… 친구가 이번 토벌의 주역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기자들이 성현에게 몰려들었다.
지연우의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쓸쓸함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지연우가 주먹을 꽉 쥐며 시선을 틀어 성현을 향했다.
생각해 보면 성현은 지연우의 지휘 아래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성현은 아직 군인이다.
괜히 군주를 토벌한다고 나섰다가 군대 좋은 일만 시킨 것 같았다.
‘얻은 게 하나도 없어. 씨×.’
지연우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지연우가 떠난 그 자리, 성현의 앞에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장 많은 활약을 하셨다고요?”
기자의 질문에 답한 것은 성현이 아니었다.
다른 계약자였다.
“아니, 활약으로 말하면 안 되죠. 이 친구 혼자 쓸었어요.”
“네?”
“하…… 군주가 계약자들을 짓밟는데 이 친구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더니! 군주의 눈동자를 팍!”
기자들은 계약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혼자 쓸었다는 것은 또 뭐고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또 뭐라는 건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
└스타 탄생!
-뭐야, 토벌대도 아닌 상병이 군주 머리채를 잡았다는 거야?
인터넷 댓글도 난리가 났다.
-대한민국 육군 상병의 위엄! 군주 잡는 육군.
└병장이 갔으면 군주는 1초 컷이지.
└병장은 행보관을 피해 짱 박혔다고 합니다.
-듣보잡 군인이 군주를 잡을 정도면 존재가 얼마나 약하다는 거냐?
└유성현 듣보잡 아닌데. 최초로 마녀 잡은 것도 쟤야.
└마녀 잡은 것은 서은서 아니냐?
└기사를 볼 때 제목만 보지 말고 내용도 좀 읽어라. 분명히 유성현이 잡았다고 적혀 있었어.
└미안, 제목도 안 보고 서은서 사진만 봤다.
-지연우 인터뷰를 보며 맥주 마시다가 상병이 잡았다는 거 보고 사레들림.
-저런 맞선임 있으면 지릴 듯. 군주 잡는 악마 상병.
└저 새끼 막내야. 초소 근무하는데 위에 중사, 하사만 있음.
└개 불쌍 ㅋㅋㅋ 영웅 됐는데, 부대 돌아가면 침상 닦아야 해.
-전역하고 본격적으로 활동하면 볼만하겠네. 우리나라 랭커들 다 긴장 타야 하는 거 아니야?
-솔직히 랭커라는 게 싸워 이긴 실력이 아니라 활약 점수로 매겨지는 거잖아? 마녀 잡고 군주 잡았으면 1위 찍어야지.
└하우치 똥줄 타는 소리 들리는 것 같다.
* * *
그 시각, 나모르의 성.
동굴이 무너진 잔해가 들썩였다.
그리고 그 속에서 피투성이의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목이 기괴하게 꺾인 아리였다.
잔해 위에 선 아리가 비틀거리다가 벽에 등을 기대고 사막을 둘러봤다.
앉고 싶던 왕좌는 사라졌다.
끌고 왔던 짐승의 부대도 흙 속에 파묻혔다.
아리의 손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분의 상승을 위해 이곳에 왔지만 거지가 되고 말았다.
유르라헬의 성에 돌아간다 해도 이제 기회를 받지 못할 거다.
어머니가 직접 전한 위대한 힘을 허투루 쓴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리가 슬프게 웃었다.
“……이게 뭐야?”
그때였다.
“살아 있었네?”
천진난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리의 시선이 틀어진 곳에 이계 시장의 꼬마가 서 있었다.
꼬마가 흉측하게 웃으며 아리의 앞에 섰다.
“갈 곳 없지?”
아리의 입술이 뒤틀렸다.
꼬마는 왕족이었다.
하지만 그 왕족은 몰락했고 몰락한 왕가의 끝은 뻔하다.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고 살아야 한다.
“너 따위가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아리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하지만 꼬마의 입에 걸린 미소는 더 짙어졌다.
“흥분하지 말고. 너나 나나, 버림받은 생명끼리 할 말이 있을 것 같지 않아?”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라.”
“에이, 지금 싸우면 내가 이길 것 같은데? 화내지 말고 듣기나 해 봐.”
꼬마의 눈빛이 진지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혹시 지금의 말을 듣는 자가 있는지 살피기까지 한다.
그리고 아리를 향해 한발 다가서며 말을 이었다.
“유성현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지?”
지금껏 아리는 성현의 뒤를 쫓았고 모든 것을 지켜봤다.
당연히 성현의 존재가 신의 분노 또는 버림받은 악이라 불리는 지르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과거의 명성이다.
지금 지르힐은 접근할 수 없는 탑에 갇혀 구속되어 있다.
그런데 꼬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이었다.
“지르힐이 힘을 회복하고 있어.”
아리의 눈이 부릅떠졌다.
지르힐을 겪어 본 적은 없지만 들어 본 적은 많다.
존재의 세상에서 지르힐은 ‘악’의 대명사.
지르힐이 힘을 회복하면 세상은 피로 물들 거다.
그 미래는 끔찍할 게 당연하다.
꼬마가 기겁한 아리를 지켜보며 킬킬 거렸다.
“새 판이 짜일 것 같지 않아? 오늘의 거지가 내일의 왕이 되고 어제의 왕이 기요틴 앞에 목을 드리우는 세상.”
“……!”
“어때? 내 손을 잡아 볼래? 성공만 하면 신분 상승은 확실한데.”
아리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 * *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고.”
성현은 창고에 있었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는 정말 분노에 차 있었다.
-내가 하지 말라고 전했다!
“알아, 아는데. 거기서 마법사의 힘을 빌리지 않았으면 난 죽었을 거야.”
-하!
성현은 뺨을 긁적였다.
지르힐의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깊게 생각해 봤지만 답이 없다.
어렵기만 하다.
성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쿨하게 포기했다.
억겁의 시간을 살아온 존재를 어르고 달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성현은 궁금한 것이나 묻기로 결정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묻지 마라.
“내가 나모르와 마주쳤을 때, 잠시 과거를 봤거든? 그런데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와는 왜 싸웠던 거야?”
순간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