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그리고 창고가 흔들릴 정도의 분노가 흘러나왔다.
그 힘이 어마어마하다.
테이블에 놓였던 물건들이 쏟아지고 지진이 난 것처럼 바닥이 흔들렸다.
‘쿵! 쿵!’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을 쏘아보며 다가섰다.
이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두렵게 흘러나왔다.
-마법사가 그따위 말을 지껄이더냐?
성현이 움찔할 정도로 예상 밖의 감정적인 목소리였다.
하지만 성현은 겁을 먹지 않았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렸다.
‘왜?’
성현은 지르힐의 감정을 이해할 수 없었다.
고작 과거의 전투를 물어봤을 뿐인데 이 정도로 분노를 표출하다니.
‘뭐지?’
지르힐이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문제가 마법사라면 성현도 물러설 수 없었다.
“마법사가 한 말이 아니라…… 나모르의 눈동자를 통해 과거를 봤어.”
마법사의 목표는 세상의 모든 생명을 멸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르힐의 목표도 비슷하다.
그녀는 존재의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란다.
지르힐과 마법사, 뭔가 상통하는 것이 있다.
“지르힐, 혹시 존재의 세상에 종말을 찍은 후에 모든 생명체를 없애는 게 목표인가?”
같은 목적으로 뭉쳤던 이들이 작은 사상의 차이로 서로 등을 돌린 채 싸우는 경우가 있다.
지르힐과 마법사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됐다.
그래서 성현은 알아야 했다.
“듣고 싶은데.”
-쓸데없는 것을 봤구나.
“왜 싸웠지?”
성현의 눈빛은 집요했다.
지르힐은 끔, 소리를 내더니 휙 하고 모습을 감춰 버렸다.
성현의 질문을 피해 도망친 거다.
“지르힐!”
지르힐의 이름을 몇 번이나 더 외쳤지만 그녀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성현은 혼자 남았다.
성현은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앉아 생각을 이어 갔다.
‘혹시……?’
성현의 생각은 다음으로 틀어졌다.
만약 지르힐도 마법사와 같이 모든 생명체를 없애려 한다면?
‘알아봐야겠어.’
성현은 곧 이계의 시장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잠시 후.
꼬마가 정말 반가운 표정으로 성현을 맞이했다.
“유명인이 오셨네요? 존재들 사이에서 지금 제일 유명할 겁니다. 인간이 나모르를 잡았으니까요! 푸핫핫핫!”
성현은 꼬마가 떠들도록 내버려 뒀다.
꼬마는 배를 잡고 웃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를 잠깐 말씀드리면, 유성현 씨의 허벅지 살 가격이 치솟고 있어요! 한번 맛보고 싶다면서…….”
인간 고기를 즐기는 존재들이 있다.
미식가로 불리는 놈들인데, 그들은 지금 성현의 맛이 어떨지 벌써부터 침을 질질 흘린다고 한다.
그렇게 쓸데없는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성현은 물끄러미 꼬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존재의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대략적으로 듣기 위해서다.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 있어요. 존재들끼리 연합해…… 아, 이런 말은 하면 안 되죠. 큼, 큼. 그래서? 어쩐 일로 오셨죠? 몸 상태가 좋지 않을 텐데, 벌써 전투준비를 할 리는 없을 테고.”
성현이 꼬마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 낡은 돗자리 위의 잡동사니를 손으로 툭툭 치며 입을 열었다.
“정보를 사고 싶은데.”
꼬마의 본질은 정보 상인이다.
몰락한 왕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정보가 있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시작했고, 지금은 제법 굵직한 정보를 다루고 있다.
꼬마가 입을 열었다.
“정보는 돈으로 거래 안 하는 거 알죠? 정보는 정보로.”
“어, 알아.”
“그럼, 말씀해 보세요.”
“지르힐과 마법사, 무슨 관계였지? 알고 있나?”
꼬마의 외모는 금발 머리에 귀엽게 생겼다.
하지만 성현의 질문과 동시에 꼬마는 정말 살벌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알고 있죠. 그런데 그 정보를 들으려면 그에 상응하는 정보를 주셔야…….”
성현이 품에서 작은 구슬을 꺼냈다.
나모르의 몸에서 찾아낸 코어다.
“이게 뭔지 알아?”
꼬마가 성현이 꺼낸 구슬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분명 엄청난 마력을 숨긴 것 같은데 처음 보는 것이었다.
꼬마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뭐죠?”
“당연히 모르겠지.”
성현이 픽 웃었다.
군주급 존재의 죽음은 흔치 않다.
당연히 그 몸속에 뭐가 들었는지 아는 존재는 거의 없다.
성현이 구슬을 다시 품에 넣으며 입을 열었다.
“지르힐과 마법사의 관계부터 꺼내 봐. 그럼 이 구슬이 뭔지 알려 줄 테니까.”
“하…….”
꼬마는 망설였다.
그러다가 고개를 끄덕,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남매 또는 연인, 어쩌면 하나.”
“그게 무슨 말이야?”
“자, 저는 여기까지 말했고. 일단 그 구슬이 뭔지부터 이야기하시죠?”
꼬마는 인간의 삶보다 더 오랜 시간 장사치로 보냈다.
밀고 당기는 스킬은 고수였다.
성현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모르의 코어.”
“코어? 그런 게 있어요, 군주한테? 그런데 그걸 어디에 쓰는 거죠?”
“됐고, 다음 질문. 지르힐이 마법사를 싫어하나?”
꼬마만 밀당의 고수가 아니었다.
성현은 회귀자.
이미 죽었다 깨어난 사람이다.
오랜 시간을 살아온 존재와 죽었다 깨어난 회귀자의 치졸함이 이어졌다.
꼬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 싫어하죠. 아주!”
“왜?”
“그 전에, 그 코어로 뭘 할 건데요?”
“이계에서 지도 또는 나침반으로 쓸 거야. 됐지? 그럼 싫어하는 이유가 뭐지?”
“싸우다가 힘을 잃고 갇혔으니까요.”
“마법사는?”
“제가 질문할 턴이에요. 나모르의 코어로 어디를 가려는 거죠?”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망자들의 땅, 왕들의 계곡.”
“엥? 거기는 왜 가려고요?”
꼬마는 눈을 반짝였다.
그곳에 자신의 어머니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은 단호했다.
“내 턴.”
“아오!”
꼬마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바닥을 뒹굴었다.
그리고.
“우리 질질 끌지 말고 한 번에 말하죠. 마법사는 죽었어요. 권능의 힘이 있을 거란 생각은 아무도 안 했죠. 그건 예언서에만 있던 이야기니까.”
그런데 성현이 그 권능을 이어받았다.
“여기까지는 지르힐도 별생각 없었을 거예요. 문제는 그 권능에 망령이 된 마법사가 깃들어 있었다는 거죠.”
“오케이. 이해했어.”
지르힐과 싸우던 마법사가 죽었다.
전투는 치열했을 테고, 지르힐은 힘을 잃은 채 다른 존재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그리고 지금껏 탑에 갇혀 있던 거다.
그렇게 이해하며 꼬마를 바라봤다.
“남매 또는 연인, 어쩌면 하나. 그건 무슨 말이야?”
“깊게 파고들면 인간의 생각으로 이해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냥 태초의 신이 만들어 낸 존재이자 연인이라고 생각하세요.”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는 가장 먼저 창조된 생명체.
지르힐은 그다음이었다.
“신은 마법사와 지르힐에게 세상을 잘 돌보라는 지시를 내렸죠. 그런데 신의 변덕이 있었어요.”
신은 어둠과 밤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신을 만들어 냈다.
“재밌지 않아요, 세상을 주무르는 신이 다른 생명체보다 뒤늦게 만들어졌다는 게?”
“뭐, 그래서?”
꼬마는 계속 말을 이었다.
처음 마법사와 지르힐의 관계는 좋았다.
하지만 마지막에 만들어진 두 신이 문제였다.
두 신은 싸우기 시작했고…….
“했고?”
꼬마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여기까지만 알아요. 마법사가 어떤 문제로 분노를 일으킨 후 세상의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 했거든요.”
“그걸 지르힐이 막았다?”
“네, 제가 아는 것은 거기까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고대 역사서가 모두 사라져서요.”
성현은 팔짱을 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풀리지 않은 게 많다.
하지만 꼬마의 표정을 보면 진심이다.
더 아는 게 없다는 듯.
“난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중얼거리고 있었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꼬마가 곧바로 물었다.
“왕들의 계곡에는 왜 가려는 거죠?”
“소멸의 바다에 가려고. 그 흔적이 왕들의 계곡에 있다며.”
“……소멸의 바다?”
마법사의 갑주가 그곳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소멸의 바다는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혼, 태어날 수 없는 아기의 혼, 식물인간이 되어 깨어날 수 없는 혼으로 가득한 곳.
어쩌면 성현을 회귀시킨 이서아의 영혼도 그곳에 있을지 모른다.
그녀는 태어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할 테니까.
“이야기는 끝났지?”
성현이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꼬마가 다급히 성현의 바지 자락을 잡았다.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요?”
“어떤?”
“갈 때, 나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꼬마의 눈은 간절했다.
성현은 그 눈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공짜로?”
“원하는 약 공짜.”
“전부?”
성현의 눈빛에 꼬마가 정말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씨×, 있는 놈이 더하다더니 자린고비 같은 ×새…….”
“들려.”
“젠장! 전부 공짜! 됐어요?”
“앞으로 계속?”
꼬마가 황당한 눈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지만 이 정도로 악질적인 블랙 컨슈머는 처음 봤다.
* * *
시간이 흘렀다.
성현의 전역 날짜가 가까워졌다.
그동안 몸도 회복되었고 지르힐과의 관계도 예전처럼 바뀌었다.
성현이 의도적으로 마법사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탓이다.
한편 나모르의 성을 박살 낸 후 세상의 변화도 있었다.
짐승에게 빼앗긴 땅을 본격적으로 탈환하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쟤가 유성현이지?”
짐승의 땅에 있는 던전을 토벌하는 작전이었다.
이름 있는 길드는 이곳에 나서지 않았다.
등급조차 알려지지 않은 던전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용병 또는 싼마이 길드를 총알받이로 던져 놓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성현은 이곳에 군 소속으로 참가했다.
이곳은 군부대 영역이기에 군인이 참가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윗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임드의 등장에 용병과 길드원 들이 수군댔다.
“그런데 진짜 센 거 맞아?”
“약하게 보이는데?”
“야, 마녀나 군주는 아무나 잡아?”
“전역하면 곧장 페이트에 도장 찍는다며, 페이트에서 영웅 만들기 하는 거 아니야?”
“하긴 페이트도 서준식이 안 보이면서 쩌리 되는 느낌이잖아. 영웅 하나 있으면 좋지. 저 새끼 싸우는 거 본 적 있는 사람?”
아무도 없다.
성현이 마녀를 잡고 나모르를 잡은 상황은 기사로만 전해 들었다.
묘한 논리에 설득되는 사람도 있었다.
“진짜 페이트에서 조작했나?”
“응? 그럴 수도 있겠네?”
이들에게 성현의 활약은 보지 못한 소문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과장된 소문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저 새끼보다 더 빨리 던전의 주인을 잡으면 유명해지는 건가?”
“광고 찍고 난리 나겠지. 이제 페라리 뽑겠네.”
그들이 낄낄거렸다.
성현이 던전에 들어간다며 기자들까지 몰려 있다.
용병들과 길드원들은 성현보다 더 활약하면 이름을 드높일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가득해졌다.
“설마 내가 군바리보다 못할까?”
“병장이면 짱이나 박혀 있지. 떨어지는 낙엽에 대가리 빵구 나는 거 몰라?”
하지만 성현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회귀 전 구악으로 있을 때 악감정을 품은 목소리에 시달린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의 뒷말은 귀여울 뿐이다.
‘좋네.’
성현은 그들의 말을 뒤로하고 거대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에는 빙긋이 미소가 걸려 있다.
몸이 회복된 후 첫 던전이다.
그리고 성현은 이 던전을 알고 있다.
회복된 몸을 풀기 위한 장소로 최적이었다.
성현이 천천히 다른 계약자들을 바라봤다.
약 20명.
성현의 움직임에 제한을 둘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도 괜찮네.’
이어서 던전의 문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