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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42화 (142/252)

142화

* * *

거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얼음 같은 바람이 사람들의 뺨을 얼려 버렸다.

다행히 눈은 내리지 않았다.

끝없이 펼쳐진 자갈밭만 보였다.

이곳은 던전 내부.

등급 : E.

토벌 인원 : 23명.

짐꾼 : 0명.

등급 E의 허접한 던전.

몇 달 전만 해도 이런 등급의 던전은 산보 나가듯 움직였던 게 계약자들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긴장을 풀지 않았다.

바짝 기세를 올린 상태에서 던전을 이동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다.

군주 나모르가 사망한 후 최근 던전의 판세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신감을 얻은 정부가 짐승의 땅을 개방했고 동시에 엄청난 숫자의 던전이 토벌 대상으로 공개됐다.

그 덕에 던전을 평가하는 평가사들이 바빠졌다.

풍문에 따르면 하루 3~4개의 던전을 평가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렇다 해서 그들이 대충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 악물고 던전 내부의 짐승을 파악하며 평가 지침서를 만들어 냈다.

하지만 위에서 말했던 군주 나모르의 사망 이후 세상은 바뀌었고 평가는 무용지물이 되어 갔다.

평가사들이 A등급으로 결정했는데 알고 보니 D등급이라든가, D등급인 줄 알았는데 S등급의 짐승이 나타난다든가 하는 일이 심심찮게 벌어진 탓이다.

이후 거대 길드는 먼저 움직이지 않았다.

잘못된 판단으로 길드원이 시체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군소 길드의 피해 상황을 본 후 던전 토벌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번 던전도 마찬가지, E등급으로 평가받았지만 그 끝은 모른다.

그래서 계약자들은 조심스레 움직이고 있었다.

‘후…….’

성현은 계약자들의 뒤를 쫓아 이동하며 품에 손을 넣었다.

시험 삼아 가지고 왔던 수류탄이 없어졌다.

‘아직인가?’

던전은 이계와 달리 현대 무기를 가져갈 수 없다.

하지만 회귀 전을 떠올리면 그것은 잠시다.

이계와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던전에도 현대 무기를 손에 쥐고 들어올 수 있었다.

회귀 전 그 시점은 군주 나모르의 사망.

‘하긴…….’

지난 역사와 지금은 다르다.

당시 나모르가 사망했던 것은 약 10여 년 후.

하지만 이번에는 성현의 손에 의해 그 시점이 당겨졌고 역사가 방향을 바꾸었다.

성현의 생각은 여기까지였다.

지금껏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입을 열지 않았던 다른 계약자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해서다.

“뭐야? 지금까지 아무것도 없잖아?”

“E등급 맞는 것 같은데? 괜히 긴장하고 있었네.”

던전에 들어온 지 1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짐승은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계약자들에게 이 던전의 가장 큰 적은 짐승이 아니라 살을 얼리는 바람이었다.

“잠깐 쉬었다 갑시다!”

이 토벌대는 대장이 없었다.

군소 길드와 용병 몇 명이 모여 인원수만 맞춘 허접한 집단이었다.

그래서 목소리가 큰 인물이 있으면 앞뒤 따지지 않고 그 말을 따랐다.

“그래요. 쉬자. 쉬고 갑시다. 양말이나 갈아 신어야겠네.”

계약자들은 자갈밭에 앉아 어깨에 메고 있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성현도 그들의 곁에서 조금 떨어진 후 자리를 잡았다.

손가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피 냄새가 나.

반지에 살고 있는 물의 정령이었다.

나모르를 토벌하러 갔을 때는 건조한 사막을 이기지 못하고 내내 잠을 잤는데, 최근 활동량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피 냄새?’

-위험해.

정령은 경고했다.

E등급의 짐승이 있다면 정령이 이런 경고를 내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성현은 이 던전이 위험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회귀 전, 이 던전은 300명에 가까운 계약자를 제물로 삼았었다.

처음에는 이들과 같은 허접한 집단이 시작이었다.

이들이 몰살당한 후 다음은 경험이 많은 자들, 조금 더 강한 자들, 마지막에 거대 길드가 나서고 나서야 던전이 클리어됐다.

그리고 성현은 뒤늦게 계약자가 된 사람.

계약자 연맹에 들어가서 이 던전의 보고서를 지겨울 정도로 읽고 또 외웠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면…….’

카드라의 심장을 얻을 수 있다.

그 심장은 나모르의 코어에 숨을 불어 넣어 준다.

성현이 이창민 중사에게 애원하면서까지 이 던전에 온 이유였다.

성현의 시선이 다른 계약자들에게 틀어졌다.

그들은 서로 속닥이며 성현을 무시하고 있었다.

아니, 애써 무시하며 그렇게 믿으려 하는 중이다.

“벌써 지친 거 같지?”

“어. 생각해 보면 너희들 말이 맞는 것 같아. 권능 이해도는 시간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거잖아? 그런데 저 새끼는 너무 어려.”

“페이트가 영웅 만들기 한 거라니까, 얼굴마담으로 쓰려고.”

“서은서로는 약하니까?”

“그렇지. 아무래도 여자가 길드 대장으로 나서 봐. 믿을 수 있겠어? 그런데 저놈을 얼굴마담으로 대동하면 다들 입 닥치겠지. 아무래도 이름값이 있으니까.”

웃기지도 않는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저들은 E등급으로 평가받은 던전에나 들어오는 쩌리이며 고작 5~6년 차의 계약자들.

거대 길드의 토벌에 참여하면 짐꾼을 자처해야 할 놈들이다.

그들에게 어린 나이, 그것도 군대를 제대하기 전부터 세상의 주목을 받고 화려한 데뷔를 준비하는 성현은 눈엣가시였다.

질투가 났고 마냥 싫었다.

그들은 성현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부모 잘 만나 페이트 길드와 연이 닿은 금수저로 생각했다.

그리고 성현은 그들의 태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야.’

던전의 주인이 나타나면 저들은 서로 나설 거다.

지금은 한 팀처럼 움직이지만 여러 군소 길드와 용병이 모인 집단인 만큼 지휘점이 없어서다.

또한 성현보다 더 큰 활약을 펼쳐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할 게 분명하다.

‘먼저 나서라.’

성현은 이 던전을 책으로 배웠다.

확실하게 알고 있지만 책상에서 알게 된 것과 현실은 다르다.

놈들의 앞뒤 가리지 않는 행동을 보며 이 던전을 이해할 생각이다.

그때였다.

잘그락.

자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갈이 하나로 모이며 점점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크기가 약 3m.

“짐승이다!”

쉬고 있던 계약자들이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고, 골렘이야! ×발! E등급 던전에 저런 게 왜 있어?”

“평가사 이 개새×들!”

게다가 자갈로 이뤄진 골렘이다.

어지간한 공격으로 타격을 줄 수 없다.

-쿠워어어!

골렘이 소리를 내뱉으며 절그럭절그럭 계약자들을 향해 달려왔다.

하지만 성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용히 놈들을 지켜본다.

그 모습을 본 계약자가 외쳤다.

“역시 허접한 새끼였어!”

실력자라면 짐승이 나타나자마자 쓸어야 한다.

모든 것을 독식하며 뒤에 있을 계약자들을 철저히 무시했다.

지금껏 그게 전투의 기본 방식이었다.

하지만 성현은 조용하다.

그 흔한 무기 하나 꺼내지 않았다.

“잘 기억해! 저 새끼는 가만히 있었고 내가 다 처리했다고 알려!”

계약자 1명이 뛰쳐나갔다.

골렘은 고작 2마리, 그 숫자가 많았다면 움찔했겠지만 2마리 정도야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어!”

카카카캉!

골렘의 몸에 닿은 칼날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놈의 수준에서 비싸고 좋은 칼을 살 수는 없었다.

투박한 칼을 휘둘러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골렘이 비틀거린 게 전부였다.

그런데 계약자의 입에 환희의 미소가 걸렸다.

“이길 수 있어!”

그 말에 다른 계약자들도 달려들었다.

“와!”

골렘은 엄청난 방어력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속도가 느리다.

계속해서 대미지를 주면 이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성현은 그들의 싸움을 지켜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들이 이 던전 최초의 몰살자들.

예상했던 것보다 더 허접했다.

‘하…….’

그리고 반지에서 정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간들은 역시 멍청해. 이렇게 자갈이 많은데 골렘이 고작 2마리라고 생각하나봐? 생각은 안 하나?

인간을 무시하며 비아냥대고 있었지만 인정해야 했다.

자갈의 숫자만 봐도 골렘이 수백은 만들어져야 한다.

하지만 고작 2마리만 있다니, 성현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시작됐다.

퓩! 퓩! 퓩!

뜬금없이 화살이 쏘아졌다.

그리고 그 화살이 계약자의 뱃가죽을 뚫었다.

‘퍽!’ 소리와 함께 계약자의 배에 핏물이 물들었다.

“어? 어?” 하는 사이에 ‘퍽!’ 하고 화살이 계약자의 목을 뚫었다.

피가 꿀렁꿀렁 솟기 시작했다.

계약자들은 당황했다.

“활! 활? 활이 갑자기 왜?”

“일단 피해!”

“아직 안 죽었어! 야, 약 있는 사람! 약!”

계약자들은 부상자를 끌고 엄폐물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사이에도 화살이 하늘을 검게 물들였고 곧 파파파팍, 땅에 꽂혔다.

“대체 뭐야!”

계약자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골렘은 영역을 확실히 정하는 짐승이다.

다른 짐승의 접근을 허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영역에는 골렘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골렘이 활을 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곧 그들의 눈동자에 절망이 솟구쳤다.

언덕에 수백 구의 골렘들이 서 있는 것을 본 거다.

골렘들이 활을 들고 하늘을 향해 겨누고 있다.

“활을 쏘네…….”

오늘로써 골렘에 대한 평가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어서 파파파팍! 하늘이 골렘이 쏜 화살로 가득했다.

“제, 젠장…….”

이들의 수준으로 저 많은 골렘들을 이길 수 없었다.

게다가 부상자도 있다.

“사, 살려 줘…….”

목에서 피를 뿜으며 살고 싶어 하는 동료.

“버려!”

다른 누군가가 외쳤다.

어차피 이들 중 대다수는 오늘 처음 만난 자들,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했다.

하지만 동료였던 자는 다르다.

친구를 버리면 인간이 아니다.

“약 있는 사람 없냐고!”

자신이 있는 약은 다 쏟았다.

하지만 동료는 여전히 회복을 못하고 있다.

다른 자들은 처음 본 사람에게 약을 주지 않는다.

언제 자신의 몸을 위해 써야 할지 모르니까.

자신의 목숨을 위해 이기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곳이 던전이다.

동료도 알고 있었지만 애원했다.

단 하나의 약이라도 얻기 위해서다.

“살……려…….”

“잠깐만, 잠시만 참아! 약…… 부탁이야! 밖에 나가면 2배로 갚을게! 아니, 3배! 4배!”

순간 그의 앞에 툭, 회복제와 진통제가 떨어졌다.

“어?”

고개를 들어 보니 성현이 있었다.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먹여요. 효과 좋은 거니까.”

“아, 고맙…….”

“됐고. 4배라고 그랬죠?”

“네?”

성현은 그 말을 남기고 골렘을 향해 튀어 나갔다.

파아아아앙!

이들 수준의 계약자는 본 적도 없는 속도.

성현이 처음 멈춘 곳은 계약자들과 싸우던 골렘의 앞이었다.

그대로 주먹을 휘둘러 놈의 대가리를 가격했다.

쩌엉!

단 한 방이었다.

골렘의 대가리는 돌덩이가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성현은 부서진 곳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골렘의 심장을 뽑아냈다.

겉은 딱딱한 돌덩이지만 그 안은 핏물과 내장이 가득하다.

이 역시 생명체일 뿐이다.

성현은 벌떡벌떡 뛰는 골렘의 심장을 꽉 쥐었다.

‘퍽!’ 소리와 함께 핏물이 터졌고 이어서 흔들거리며 쿠우우웅,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성현이 시선을 틀어 다른 골렘을 바라봤다.

“다음.”

그 모습을 본 계약자들은 입을 떡 벌렸다.

이들은 성현이 페이트 길드가 만들어 낸 가짜 영웅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을 보면 확실히 믿어야 했다.

수준이 다르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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