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동시에 코어가 부르르 떨었다.
심장의 피를 받아먹듯 꿀떡꿀떡 소리를 내고 있다.
시퍼렇게 빛났다가 붉어졌다 난리도 아니다.
그렇게 심장에서 모든 피가 짜내졌다.
손에 힘을 더 줬지만 핏방울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심장의 역할은 끝났다.
성현은 아쉬움 없이 심장을 던져 버렸다.
그러자 그르르르, 코어에서 섬뜩한 소리가 내뱉어졌다.
코어는 계속해서 피를 원하고 있다.
더 많은 피를 받아 부활의 꿈을 이루려 하는 중이다.
그리고 코어의 갈증 때문에 이곳의 기후가 바뀌었다.
먼 곳에서부터 먹구름이 몰려왔고 천둥이 쾅쾅 세상을 울리더니 쏴아아아, 비가 쏟아졌다.
코어는 기후를 바꿀 정도로 엄청난 마력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성현의 눈빛에 놀라움은 없었다.
잠시 ‘흡수할까?’ 하고 생각은 해 봤지만 고개를 저었다.
몸속에 있는 마녀와 마법사의 힘도 통제를 못하는데 나모르의 코어까지 흡수하면 정말 죽고 말 거다.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허무하게 죽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다음.’
이제 이 의식의 다음을 진행할 시간이다.
성현은 칼을 쥐고 자신의 팔뚝을 살짝 베어 냈다.
피가 주르륵 흘러 코어에 떨어져 내렸다.
코어는 지금 약 1cm의 작은 구슬.
성현의 피를 머금은 코어가 눈꺼풀이 열리듯이 깜빡거린다.
그리고 또렷이 성현을 노려봤다.
그 눈빛이 서늘했다.
반지에 머무는 정령이 화들짝 놀랄 정도였다.
-피해……. 피해야 해!
그녀는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코어의 힘이 그녀를 짓누른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은 빙긋이 웃으며 코어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내가 네 주인이다.”
코어, 군주 이상의 존재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다.
이 코어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됐는지 확실히 아는 존재는 없다.
그저 먼 옛날, 인간은 빅뱅이라 부르고 존재들은 신들의 전투라 일컫는 그 시간, 그 처참한 흔적의 파편으로 만들어진 미지의 힘이 아닐까 예상할 뿐이다.
그리고 성현은 지금 그 코어의 주인이 되려 한다.
코어는 세상의 기억을 담고 있으며 그 기억은 이계의 세상을 알고 있다.
앞으로 성현이 이계를 박살 내는 데 나침반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거다.
‘이제 마지막 절차.’
하지만 코어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마지막 단계가 남아 있다.
바로 이 코어가 가진 의식, 그 의식의 세계를 이겨 내야 한다.
‘지연우는 실패했다고 들었어.’
회귀 전, 이 코어를 손에 넣은 것은 지연우였다.
그는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를 통해 이 코어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고 주인이 되기 위한 의식을 진행했다.
하지만 코어를 장악하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유는 하나.’
마지막 단계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어.’
하지만 성현은 알고 있다.
‘엄청나게 들었거든.’
성현이 지연우와 함께했을 때였다.
당시의 지연우는 실패라는 것을 모르고 살았던 사람.
놈은 자신이 유일하게 실패한 ‘코어 장악’을 사람들에게 심심찮게 전하고 다녔다.
실패를 극복하고 성공한 것처럼 포장하기 위해서다.
‘그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네.’
지겹게 들었던 마지막 의식.
그때는 지겨웠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현이 그 의식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
성현이 코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반지에 머무는 정령이 말린다.
-하지 마! 하지 마!
정령은 지금도 코어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 엄청난 힘에 몸을 파르르 떨면서 성현의 행동이 멈추기를 바랐다.
하지만 성현은 그녀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코어를 콱 움켜쥐었다.
-하지 말라고!
이미 늦었다.
성현의 몸이 코어의 푸른 빛으로 감싸였다.
* * *
“야, 비 온다. 성현이 불러와서 빨래 걷어라.”
이창민 중사가 담배를 입에 물며 말했다.
무전기를 만지작대던 박상문 하사가 고개를 틀었다.
창밖에서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마치 장마가 시작된 것처럼 빗줄기가 세차게 떨어지는 중이다.
“아이고, 배수로도 만들어야겠습니다.”
“빗줄기가 약해지면 해. 지금은 쉬고.”
“옙.”
박상문 하사가 우비를 걸치며 이창민 중사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성현 어디 있습니까?”
“아까 초소 뒤로 가던데?”
“이놈이 이제 전역 얼마 안 남았다고 빠져 가지고. 요즘은 보고도 안 하고 돌아다닙니다. 좀 갈궈야 되겠습니다. 흐흐.”
이창민 중사가 픽 웃었다.
“네 말을 듣겠냐?”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한 번 갈구면 정신병자 될 때까지 갈굴 수 있습니다.”
“눈사람이랑 눈싸움하기 시키려고? 아니면, 거울 보고 가위바위보 해서 이기기?”
“흐흐흐. 그거 좋겠습니다.”
박상문 하사가 주머니에 손을 꽂고 털레털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초소를 나와 뒤로 향했다.
“성현아!”
대답이 없다.
“야! 유성현!”
역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하…… 이놈. 오늘 설거지 담당은 너다, 이 새끼야.”
박상문 하사가 입을 삐죽이며 성현이 있던 곳으로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박상문 하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또라이 새끼!”
성현은 없었다.
대신 그곳에 어떤 흔적이 남아 있었다.
던져진 카드라의 심장, 요상하게 그려진 마법진, 마지막으로 마력의 잔해가 검은 연기가 되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중이다.
즉, 이곳에서 ‘어떤 짓’을 했다는 것.
그게 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성현이 사라진 것과 연관이 있을 거다.
“젠장!”
박상문 하사가 머리를 북북 긁으며 서둘러 초소로 돌아갔다.
“초소장님! 초소장님!”
“왜?”
“유성현이…… 사고 친 것 같습니다!”
“어?”
* * *
그 시각, 유르라헬의 성.
그곳은 숨 쉬는 것도 허락되지 않은 것처럼 적막했다.
모든 신하가 허리를 굽힌 채 펴지 못하고 있었다.
벌을 받는 것처럼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다들 눈치만 봤다.
낫을 든 마녀 아리 때문이다.
그녀는 유르라헬의 마력을 얻어 갔지만 나모르의 성에서부터 소식이 끊겼다.
분명 죽은 것은 아니다.
그녀의 생명이 끊겼다면 이들이 모를 리 없다.
‘젠장! 아리 그것이 어디로 도망쳐서!’
‘잡히면 찢어 죽일 테다!’
그렇게 모두가 눈치만 살피고 있을 때였다.
왕좌에 앉은 여인은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며 양피지를 넘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그리피네, 유르라헬의 2대 어머니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양피지는 두 번째 예언.
-살육의 장 :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욕심 많은 자, 욕심 많은 어머니가 군을 이끌고 문으로 들어간다.
그들은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 둘 중 하나의 별이 떨어진다.
창조주가 원치 않던 세상이니 타락한 그대는 느껴 보지 못한 고통을 알게 되리라.
그리피네가 한숨을 내뱉으며 양피지에서 시선을 떼고 신하들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라.”
그녀의 목소리에 모든 신하가 일제히 허리를 폈다.
지독한 허리 통증에 “끔.”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리피네는 상관 않고 목소리를 이었다.
“내 궁금한 게 있구나.”
“말씀하십시오!”
신하들은 다급히 대답했다.
그리피네의 기분이 틀어지면 다시 허리를 굽히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이 10년이 될지, 100년이 될지 모른다.
“어떤 것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
신하들의 목소리가 컸고 그리피네는 조용히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예언에 따르면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 둘 중 하나의 별이 떨어진다.’라고 했다.”
그리피네는 이 예언이 이번 전쟁을 의미한다고 예상했었다.
그리고 ‘욕심 많은 자, 욕심 많은 어머니’를 지연우와 플로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별이 떨어진다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말인데…….”
이번 전쟁에서 죽은 자는 많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그중 마법사가 원하는 핏물은 없었다.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 가? 예언이 틀린 것이더냐?”
신하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 서로 눈치를 보며 서로에게 대답을 떠넘기고 있었다.
잘못 대답하면 큰일 나기 때문이다.
그때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가 앞으로 나와 허리를 굽혔다.
“어머니, 예언서에서 말한 전쟁이 지금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예언서는 정확한 시기를 지정해 주지 않았다.
즉,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예언서를 해석하는 것은 짜 맞추기나 마찬가지다.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예상되는 것은 있습니다.”
“말하라.”
“나모르의 죽음을 많은 존재가 지켜봤습니다.”
존재들은 나모르의 죽음을 웃고 떠들며 지켜봤다.
그저 유흿거리로 여겼고 인간들에게 도전장을 받은 나모르를 병× 취급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나모르의 수준이 아무리 떨어진다 해도 군주, 인간 따위에게 학살당할 급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성현이 나서며 상황이 달라졌다.
성현은 일방적으로 나모르를 두들겨 팼고 잔인할 정도로 나모르의 배 속을 휘저었다.
놈의 내장이 밖으로 끄집어내질 때 눈을 질끈 감은 존재도 있을 정도였다.
“존재의 세상은 그 인간을 보며 경악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렇다 해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나모르 하나를 처리하는 데 4천 명의 인간들이 나섰다.
그리고 대부분은 몰살당했다.
이들에게 인간은 유해한 모기 정도였다.
“문제는 비어 있는 나모르의 영지입니다.”
지금껏 존재의 세상은 균형을 유지했다.
꽉 찬 곳에는 빈틈이 없었고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덕에 마녀는 평생 마녀였고 노예는 끝까지 노예였다.
그들은 이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억겁의 시간을 살아야 하는 존재, 특히 하급으로 태어난 존재에게 그것은 저주였다.
“제가 예언서를 해석해 보겠습니다. ‘어둠이 끝나고 새벽이 지나갈 때’는 지금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비어 있는 영지를 누군가는 차지하려 할 겁니다. 지금껏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존재의 세상이 꿈틀대기 시작한 겁니다.”
“…….”
“그리고 ‘저주받은 피가 문을 만드니’. 이것은 아랫것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어머니의 고귀한 순혈의 피가 아니라 잘못 태어난 버러지들! 그놈들이 전쟁을 준비할 것으로 보입니다.”
영지를 차지하면 신분이 바뀐다.
시스템의 저주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칠 거다.
“마지막으로 그 버러지를 도와주는 존재도 있을 겁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지금만 즐거우면 된다는 놈들이 있으니까요.”
존재들이 서로 뭉치고 손잡는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존재의 세상에서도 골칫덩이로 여겨지고 있던 ‘교’.
그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짐승을 모아 대대적인 군대를 만든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심심해서 군대를 모으지는 않을 거다.
그리고 그들이 만드는 군대는 자기방어를 위한 게 아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전쟁을 원하고 있었죠.”
이유는 단 하나,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를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다.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의 말이 끝났다.
그러자 그리피네가 고운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 * *
성현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숲속, 보이는 것은 오직 나무와 풀뿐이다.
그것도 넝쿨이 우거져서 움직이기 쉽지 않은 곳이었다.
‘여긴가?’
이곳은 코어의 기억 속이다.
‘이제…….’
성현이 해야 할 것은 하나.
코어의 기억을 뒤틀어 버리는 것.
이곳을 장악한 과거를 부수고 자신의 이름을 각인하는 거다.
그럼 기억이 뒤바뀐 코어는 성현을 주인으로 여기게 된다.
성현은 잠시 지연우를 통해 들었던 기억을 떠올린 후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