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46화 (146/252)

146화

그런데 그때였다.

절그럭거리는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갑주를 두른 병사들이 이동하는 소리다.

성현이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적어도 수백 명.’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과는 느낌이 다르다.

게다가 한 명, 한 명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저들과 싸운다면 성현도 제법 큰 피해를 입을 거다.

성현이 풀숲에 몸을 낮춰 숨었다.

그리고 회귀 전 지연우가 했던 말을 더듬었다.

“고대 사막의 아랍 국가 또는 중세 유럽 아니, 판타지 세상 같았지. 전쟁 중이었어. 서로가 믿는 신을 위해 싸우고 또 싸우고……. 광신도들의 전쟁은 죽어야 끝나는 거였어.

‘광신도…….’

성현은 그 말을 떠올리며 손아귀에 힘을 꽉 줬다.

곧 성현의 손에서 마력이 휘몰아쳤다.

파지지지직!

권능은 제대로 작동한다.

‘좋아.’

이곳은 현실이 아니다.

나모르의 코어가 가진 기억이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현실, 이곳에서 죽으면 이 기억에 갇혀 영원히 죽고 만다.

‘그리고 지금은 광신도들의 전쟁…….’

성현은 어느 편도 아니다.

흑과 백이 싸우는 세상에서 회색은 모두의 적이다.

성현은 언제든 싸울 준비를 마쳤지만 놈들이 자신을 발견 못 하고 지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것은 바람일 뿐이었다.

풀이 확 헤쳐지더니 성현을 향해 창을 겨눈 병사들이 셋 서 있었다.

“누구냐!”

“여기 적의 첨병이 있습니다!”

성현의 눈이 찌푸려졌다.

‘젠장!’

만만치 않은 실력을 가진 적 수백 명과 싸워야 한다.

어차피 성현의 목적은 코어의 기억에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것.

‘그래도 시작부터 싸우고 싶지는 않았는데.’

성현이 이곳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지연우에게 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조금 더 조사를 한 후 몸을 움직이고 싶었다.

하지만 창끝이 성현의 미간을 겨누고 있다.

싸우지 않으면 죽는다.

성현은 자신이 죽기 전에 이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없애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파지지지직!

성현의 손에서 스파크가 요란하게 튀었다.

순간.

“그만!”

어리지만 당찬 목소리가 들렸다.

성현과 병사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틀어졌다.

백마에 타고 있는 금발의 청년이 보였다.

동시에 성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꼬마?’

이계의 시장에서 돗자리를 펴 두고 장사를 하는 꼬마였다.

‘아니, 비슷하게 생겼어.’

꼬마는 열 살 정도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말에 타고 있는 청년은 적어도 10대 후반은 넘어 보인다.

늠름한 모습으로 거대한 백마에 앉아 있던 청년이 훌쩍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병력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성현을 노려봤다.

“감히! 왕자님이 내려오셨는데 허리를 펴고 있느냐!”

“무릎을 꿇어라!”

병력들이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성현은 그들의 말을 외면했다.

어차피 저들의 왕이다.

성현은 저렇게까지 극단적인 예를 갖추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청년이 말에서 내려 성현을 향해 다가왔다.

걸음 하나하나에 엄청난 마력이 느껴진다.

성현은 청년을 보며 얼마 전 기억을 떠올렸다.

마법사가 나모르를 두들겨 패며 했던 말이었다.

“오랜만이지? 그때, 죽였어야 했는데, 비겁하게 도망친 새끼가 군주? 예전이었다면 일개 마녀보다 못한 권능으로 군주라니. 세상 참 우스워졌어.”

그 말이 사실인 것 같다.

저 청년에게 비한다면 나모르는 발끝도 쫓아가지 못할 거다.

그리고 성현의 앞에 선 청년이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그때 성현의 머릿속에 청년에 대한 정보가 들려왔다.

-이름 : 아부 카심 빈 압드 알 벨토르 델라 몬테라세.

-특징 1 : 이계 시장 꼬마의 아버지.

-특징 2 : 몬테라세 왕국의 세자.

-특징 3 : 몬테라세 왕국의 마지막 왕.

성현은 시스템 메시지가 왜 이런 것을 알려 오는지 잠시 의문을 가졌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존재와 엮인 세상이다. 이 정도 일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저 이 청년의 마력 그리고 이 청년이 꼬마의 아버지라는 게 신기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카심이라고 하네.”

자신을 카심이라 밝힌 청년이 성현에게 악수를 권했다.

동시에 무릎을 꿇고 있던 병사들이 악을 지르며 입을 열었다.

“왕자님! 하찮은 신분과 손을 맞잡으면 안 됩니다!”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저놈의 옷을 보십시오! 분명 이단입니다!”

카심이 고개를 저었다.

“됐어. 그따위 신분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리고 이단이면 또 어때?”

“왕자님! 불경한 말씀입니다!”

“자네들, 귀 안 먹었으니까 소리는 그만 지르고 이 손을 봐.”

성현의 손에서는 지르힐의 권능으로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이제야 성현의 손을 본 병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저, 저건……!”

“그래, 이단이 아니라 지르힐 님의 신자야. 권능을 표출할 정도면 대단한 신앙을 갖고 있다는 증거지.”

“오오오오!”

병사들이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전투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지르힐의 신자가 나타나다니!

“그럼 저 옷은 지르힐 님이 직접 전해 준 갑주?”

“처음 보는 거야! 당연히 지르힐 님이 만들어 줬겠지!”

“와!”

성현은 또 한 번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르힐의 ‘신자’라니.

그제야 성현도 놈들의 갑옷을 살필 수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 그려진 번개 문양, 그것은 지르힐을 상징한다.

‘지르힐, 넌 이 시대에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웃기기만 했다.

그래서 물었지만 지르힐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권능은 이어지고 있지만 지르힐과 대화는 안 되는 것 같다.

“악수…… 안 할 텐가? 내 손이 민망한데?”

성현의 시선이 다시 카심에게 향했다.

카심은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며 여전히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유성현이라고 한다.”

“풀 네임은?”

“유성현.”

“아, 그래?”

성현의 머릿속에 다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이 시대는 이름이 길수록 좋은 혈통.

-병사들이 짧은 이름의 당신을 보고 실망합니다.

-카심은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혈통과 능력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시스템 알림음은 성현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양이다.

카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르힐 님의 신자라면 우리를 돕기 위해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데, 함께 갈 거지?”

성현은 주변을 슥 훑었다.

병사들의 숫자는 약 오백.

모두 두꺼운 갑주를 입고 병장기를 들고 있다.

그리고 저 무거운 몸으로 산을 타는 중이며 칼과 창에는 어떤 혈흔도 묻어 있지 않다.

즉, 이 산을 넘어 어떤 곳을 공격하려 한다는 것.

‘기습 작전 또는 게릴라전을 펼치려 하는 거야.’

오백은 소수다.

이 인원으로 전면전을 펼칠 수는 없다.

‘기습이라…….’

기습은 정보 차단이 중요하다.

상대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뒤통수를 쳐야 의미 있는 결과를 나타낼 수 있다.

성현의 시선이 다시 카심을 향했다.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한 왕국의 왕자다.

성현이 따라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아마 죽이고 갈 거다.

아무리 지르힐의 신자라 해도 카심은 자신의 병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이들과 싸운다?’

성현은 싸우고 홀로 떠나는 것을 생각해 봤다.

병사들만 있었다면 싸워 이길 수 있을 거다.

하지만 앞에 선 카심은 다르다.

놈은 나모르를 상회하는 전투력을 갖고 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지.”

어차피 성현의 목적은 코어의 기억을 바꾸는 것.

전투를 통해 이름을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 * *

꽤 가파른 산길이었다.

하지만 거대한 백마는 숨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잘도 올랐다.

성현은 그런 카심의 옆에 서서 산을 오르며 코어의 기억을 빠져나가는 두 가지 방법을 떠올렸다.

하나는 코어의 기억을 장악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이 기억의 끝까지 살아남는 거다.

지연우는 장악하지 못한 채 기억의 끝을 봤고 그대로 세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성현은 다를 거다.

어떻게든 장악해서 코어의 주인이 될 생각이다.

그래야 이계를 점령하고 존재의 단체 ‘교’와 싸우는 데 유리해진다.

그리고 그 순간 몇몇 병사가 그런 성현의 모습을 보며 입을 삐죽였다.

“새끼…….”

처음 만났을 때 병사들이 그를 환대했지만 모든 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일부는 성현의 정체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그들 또한 그중 하나였다.

“마력을 스파크로 바꿀 줄 아는 새끼겠지. 그런데 고작 그 이유로 왕자님의 옆에 선다고?”

“신경 쓰지 마. 전투가 시작되면 뽀록날 거야, 저놈이 어떤 놈인지.”

“잘 지켜보고 있어, 만약 첩자라면 바로 죽여 버리게.”

“심장부터 쑤시지 마. 즉사하면 안 돼. 고통스럽게 뒈져야지.”

그들은 서늘한 눈으로 성현을 쏘아봤다.

한편, 카심이 조용히 성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이 세상은 둘로 나뉘었어.”

여신과 남신.

그리고 그 신의 둘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는 웃음의 마법사와 지르힐.

“마법사 님과 지르힐 님은 엄밀히 신은 아니지. 하지만 창조신이 만든 완벽한 존재, 생명체를 이로운 쪽으로 안내하는 안내자 같은 역할이지.”

코어의 기억 속 생명체들에게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는 ‘흉악한 웃음’이란 단어를 제외하고 그저 ‘마법사’라 불리고 있었다.

제단을 쌓아 제사를 지내면 마법사는 모든 것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생명체의 아픔, 그리고 슬픔까지 가슴에 담아내며 언제나 생명체의 옆에 서 있었다.

“그런데 지르힐 님은 좀 무섭지. 그렇지 않나?”

지르힐의 본질은 번개다.

그녀가 분노하면 모든 생명체들이 두려워하며 발발 떤다.

하지만 생명체들은 지르힐을 두려워하면서도 좋아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야 비옥한 토양이 만들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지르힐이 츤데레네.’

성현은 카심의 말을 들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 두 분이 있어서 우리는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

“하지만 저놈들이 믿는 신은 용서할 수 없어.”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언덕 아래로 마을이 보였다.

저 마을의 생명체가 믿는 신은 여신 로안.

“이단 새끼들.”

카심이 입술을 씹었다.

그는 신분에도 차이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신의 종파를 상대할 때는 달랐다.

도깨비같이 험악한 눈빛으로 마을을 쏘아보고 있었다.

“저놈들을 죽여야 세상에 평화가 온다.”

카심의 몸에 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칼을 번쩍 들었다.

“신을 위하여!”

병력들이 “와!” 하고 소리를 질렀다.

“죽여라! 증거로 귀를 베고 코를 베어라! 그 귀와 코의 숫자만큼 너희에게 상을 주리라!”

“와!”

“여자를 겁탈하고 남자를 죽여라! 신은 너희의 모든 것을 축복하리라!”

고작 마을 하나다.

쓸어버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병력들이 언덕을 뛰어내려 갔다.

당장 마을을 습격해 즐거움을 누리고 싶었다.

살생과 비명 그리고 겁에 질린 여인의 모습은 이들에게 축복이었다.

원시적인 생각, 이들의 도덕적 관념은 거기에 멈춰 있었다.

“죽여!”

하지만 그들 중 성현을 고깝게 보던 놈들은 마냥 달리지 않았다.

성현을 견제하며 천천히 몸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을의 입구가 열리며 짐승들이 튀어 나왔다.

두 발로 선 늑대, 그 숫자가 약 천여 마리.

일개 마을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다.

이들은 습격을 알고 있었고.

“젠장! 놈들이 대비하고 있었습……!”

그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컹!

늑대의 이빨이 가장 먼저 달려온 병사의 얼굴을 뜯었다.

물린 입술이 걸레짝처럼 죽죽 뜯겼다.

병사가 울면서 벗어나려 했지만 무리다.

“끄아아아악!”

머리통이 뜯겼고 물린 목에서 피가 꿀렁꿀렁 흘렀다.

그리고 늑대들이 아가리를 벌렸다.

카아아아악!

언덕을 내려오는 병사를 뜯기 위해서다.

카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뒤, 뒤로 물러서!”

하지만 언덕을 달려 내려가던 속도를 줄이고 몸을 틀기란 무리다.

불나방처럼 늑대의 아가리에 처박혀야 했다.

“사, 살려 줘어!”

늑대의 이빨은 날카로웠다.

갑주를 쑤시고 들어갔고 내장을 뜯어냈다.

마을의 철책에 허공에 뿌려진 병사의 내장이 걸리기 시작했다.

카심이 칼을 꽉 쥐었다.

직접 움직일 생각이다.

늑대를 조종하는 술사를 먼저 처리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답이 없다.

‘어디에 있지?’

카심이 눈을 가늘게 뜨고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 술사 역시 카심만큼의 힘을 갖고 있을 게 분명하다.

순간, 파아아아앙!

옆에 서 있던 성현이 튀어 나갔다.

“아, 안 돼! 멈춰!”

카심이 다급히 성현을 말렸다.

“멈추라고!”

그가 성현을 끌고 온 이유는 하나다.

성현은 스파크를 권능으로 사용하는 자.

이상한 옷을 입고 있는 자!

그걸 토대로 지르힐의 보호를 받고 있다며 병력들을 다독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 병력들은 더 힘을 낼 테고 열심히 싸울 거다.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몸에서 풍기는 성현의 마력은 약했고 실제 지르힐의 사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젠장!”

그런데 여기서 성현이 죽기라도 한다면?

병력의 사기는 땅에 떨어질 거다.

카심은 성현을 살려야 했다.

백마의 고삐를 쥐고 외쳤다.

“가자!”

하지만 카심의 생각은 우려였다.

어느새 늑대 앞에 도착한 성현이 주먹을 휘둘렀다.

꽝!

늑대의 이빨이 부러지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카심의 눈이 번쩍 떠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