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날 알아?”
그녀의 정체는 지르힐이 맞았다.
성현이 조용히 있자 지르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리고 의문을 가득 담은 눈동자로 성현을 지켜보다가 팔짱을 낀 채 입을 열었다.
“난 널 본 적이 없는데? 아니, 그 전에 피조물이 맞나?”
“……피조물?”
“가만히 있어 봐.”
지르힐이 성현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더니 뒷짐을 진 채 허리를 굽혔다.
이어서 눈을 감고 성현의 가슴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그녀가 중얼거린다.
“내 냄새, 마법사의 냄새…… 음? 이건 나모르? 미약하지만 그쪽의 냄새도 나는데? 그리고…….”
그사이 성현도 지르힐을 살폈다.
오랜 시간 함께했지만 얼굴 한번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지르힐의 외모, 그리고 행동과 말투와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고 반가웠다.
‘하지만…….’
성현은 입술을 씹었다.
지금 지르힐의 표정을 보면 꽤 밝은 성격으로 느껴진다.
그런데 현실의 지르힐은 다르다.
오랜 시간 탑에 갇혀 생활하며 음침해졌다.
매사에 부정적이며 ‘안 돼, 안 돼.’를 입에 달고 산다.
심지어 지르힐의 목표는 존재의 세상을 없애 버리는 것.
그게 안쓰럽게 느껴졌다.
지르힐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여 성현을 향했다.
“이런저런 냄새가 잡종 같은데, 네 원천은 맡아 본 적 없는 냄새야. 넌 뭐지?”
성현은 인간이다.
이곳에 있는 자들과 전혀 다른 기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지르힐은 성현을 잡종으로 표현했다.
그게 아니면 이해할 수 없는 기운이었기 때문이다.
순간 성현의 머릿속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 미인의 마음을 얻어라]
-보상 1 : 코어의 기억
-보상 2 : ??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비록 코어의 기억 속이지만 이렇게 지르힐을 만났는데 고작 마음을 얻으라니.
‘그건 너무 쉬워.’
지르힐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명확하다.
오랜 시간 함께했던 성현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걸 통해 웃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딴 것으로 이런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다.
‘어렵게 만난 이상…….’
궁금한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조금의 위험성은 있지만 훗날, 플로르와 싸울 것을 생각한다면 지금 알아봐야 한다.
지르힐이 얼마나 강한지, 존재가 된 플로르와 대항할 수 있을지.
“잡종이라……. 그거 듣기 거북한 말이네. 그래, 내가 뭐냐고?”
지르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성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런데 성현은 대답 대신 테이블에 놓인 부채를 손에 들었다.
부채는 고대의 유물이다.
전투가 끝난 후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성현이 부채를 들며 말했다.
“붙자.”
“어?”
“붙자고. 네가 이기면 대답해 줄게, 내가 어떤 잡종인지.”
지르힐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지르힐이라는 것을 안다고 하지 않았어?”
이 세상에 지르힐을 상대로 이런 오만한 말을 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있다면 마법사 또는 남신과 여신뿐이다.
보통의 생명체는 지르힐의 이름을 듣자마자 고개를 처박고 몸을 바들바들 떨어야 한다.
하지만 성현은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폭력적인 눈빛으로 지르힐을 노려볼 뿐이다.
그리고 그 입에서 사나운 목소리가 흘렀다.
“네가 이기면 말해 주지, 내가 왜 잡종인지.”
부채가 꿈틀거리며 주우욱 길어져 창으로 변했다.
그리고 창을 쥔 손에서 스파크가 파지지직 일어났다.
곧 스파크가 창을 타고 오르더니 성현의 온몸이 전기로 번쩍였다.
지르힐은 또 한 번 눈을 반짝였다.
저 손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분명 자신의 권능, 비슷하게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똑같다.
지르힐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붙자는 거지? 궁금하네.”
지르힐이 손가락으로 성현을 가리켰다.
* * *
성현의 침실이 있는 성, 그 밖은 정리 정돈이 한창이었다.
병사들이 놀고 먹은 흔적을 치우는 중이다.
그리고 카심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왕자님은 그만 들어가세요. 여기는 저희가 하겠습니다.”
“뭐 어때? 같이해야지.”
“나중에 옥쇄를 쥐실 손으로 접시를 잡으면 어떻게 합니까?”
“똑같은 손이야. 다를 것 없어.”
카심은 접시를 한데 모아 손에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병사들은 흐뭇하게 웃었다.
카심의 신분은 아직 왕자다.
하지만 그가 왕권을 손에 쥘 때를 생각하면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상적인 왕이 될 게 분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로안을 쓸어버려야지.”
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끝나야 한다.
그래야 카심이 마음 놓고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을 거다.
병사들이 모닥불을 발로 비벼 끄며 말을 이었다.
“그거 들었어? 마법사님이 움직였대.”
“마법사님?”
“어, 며칠 전에 맨티스의 성을 박살 냈대. 혼자서 다 쓸었다는데?”
“캬! 드디어 우리 편을 들어 주는 건가?”
여신과 남신의 싸움에 마법사와 지르힐은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고 세상이 황폐해지자 드디어 마법사가 움직였다.
이들은 마법사가 남신 게히얼의 손을 잡아 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잠깐만, 지르힐 님의 신자도 우리 쪽으로 왔잖아!”
지르힐의 신자는 성현이다. 성현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지르힐 역시 이들의 손을 들어 줬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것은 행복 회로를 돌리기에 충분했다.
“……마법사님과 지르힐 님이 우리 편이라면?”
“전쟁은 끝난 거지. 시간문제야. 여신도 지르힐 님한테는 안될걸.”
그들의 시선이 성현의 침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들은 성현의 권능을 봤다.
압도적이었고 거침이 없었다.
성현과 함께 이 전쟁의 끝을 볼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모닥불이 완전히 꺼지며 세상이 어둠으로 채워졌을 때였다.
성현의 침실이 번쩍였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침실에 둔 촛불이 저렇게 점멸할 수는 없다.
한 병사의 입에서 불안한 목소리가 흘렀다.
“뭐, 뭐지?”
순간 ‘꽈르르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번져 나갔다.
작은 창문에서 새어 나온 스파크가 하늘로 솟구치더니 세상이 번쩍거렸다.
“지, 지르힐 님이다!”
한 병사의 외침이었다.
저런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지르힐밖에 없다.
신의 분노, 죄를 지은 사람에게 하늘의 벌을 내리는 지르힐.
세상이 꽝, 꽝 울렸다.
대지가 흔들릴 정도였고 비가 쏴아아아 쏟아졌다.
병사들이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흙바닥에 처박으며 외쳤다.
“지르힐 님을 뵙습니다!”
“지르힐 님!”
그리고 한 병사가 카심을 향해 달렸다.
“왕자님께 알려야 해!”
그 시각, 카심은 주방으로 들어가 설거짓거리를 쌓아 두고 있었다.
문이 쾅, 열리며 병사가 들어왔다.
“와, 왕자님!”
병사의 다급한 목소리에 카심의 눈이 찌푸려졌다.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 거다.
“왜?”
“지, 지르힐 님이 강림하신 것 같습니다!”
“어?”
“지금 신자가 묵고 있는 침실에서!”
병사의 말은 두서가 없었다.
하지만 예상할 수 있었다.
‘꽈르르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돌로 지어진 성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안내해라!”
“네!”
카심은 병사의 뒤를 쫓아 성현의 침실을 향해 달렸다.
계단을 빠르게 올라 성현이 있는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들은 침묵했다.
성현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숨을 몰아쉬며 창을 지팡이 삼아 겨우 버티고 서 있는 게 전부다.
그리고 성현이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억지로 히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게 전부야? 이러면, 실망인데.”
성현의 시선이 닿은 곳을 향해 카심도 시선을 틀었다.
그곳에는 왕자의 신분인 카심조차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녀가 서 있었다.
지르힐이다.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카심과 병사가 곧장 무릎을 꿇었다.
“지르힐 님을 뵙습니다!”
카심은 성현에 비해 엄청난 마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지르힐을 대하는 것만으로 다리가 후들거렸고 서 있기가 어려웠다.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겨우 입을 연 거다.
하지만 지르힐은 카심을 신경 쓰지 않았다.
“나가.”
딱 한마디.
그리고 문이 저절로 쾅, 닫혔다.
다시 둘만 남게 되자 지르힐의 시선이 성현에게 향했다.
“더 해?”
“어. 이걸로는 약해. 무섭지가 않아.”
지르힐은 충분히 강하다.
성현을 향해 손가락만 까딱까딱 했을 뿐인데, 성현은 만신창이가 됐다.
아마 모든 힘을 다했다면 단 1초도 견딜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다른 자들은 신의 분노니 뭐니 하지만 플로르와 비하면 공포가 느껴지지 않았다.
지르힐이 살짝 웃었다.
“당연히 무섭지 않을 테지, 죽일 마음이 없으니까. 그리고 너도 내 마음을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그대가 무엇인지 알려 줬으면 좋겠어.”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성현이 기대한 공포는 살기가 아니라 근원적인 공포다.
하지만 지금 지르힐에게 느낄 수는 없을 것 같다.
성현이 창을 회수했다.
부채로 변한 창을 테이블에 두며 번개에 맞아 검게 변한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지르힐을 보며 입을 열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미래에서 왔다.”
이곳이 코어의 기억 속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자신들이 이 기억 속에서 영원히 반복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실 상관은 없지만 그 대상이 지르힐이다 보니까 배려하게 됐다.
“미래?”
“어.”
“어느 정도의 미래지? 혹시…… 내 후손인가? 하긴, 그래야 이런저런 잡종의 냄새가 나는 법이지.”
지르힐은 미래에서 왔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성현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에 자신의 권능이 녹아 있어서다.
하지만 후손이라니, 생각은 자유라지만 그 착각이 점점 도를 넘어섰다.
“잠깐만, 마법사의 냄새도 나는데…… 설마? 마법사와 내가? 어? 그런 거야! 아니지, 말이 안 되잖아? 마법사는 지금 제 여자와 자식을 잃었다고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돌아다니는데? 그리고 난 마법사가 싫어. 그 흉측한 놈! 생각만 해도…….”
지르힐이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성현은 처음으로 지르힐의 눈에서 분노를 봤다.
저런 눈빛이면 충분히 플로르 이상으로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것 같다.
성현은 지르힐을 이대로 놔두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아니야?”
“어. 정말 아니야.”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정말 다행이야.”라고 중얼거린다.
현실의 지르힐 성격과 정말 정반대다.
갇혀 있는 동안 왜 그렇게까지 음울해졌는지, 씁쓸하기만 했다.
성현은 대략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지르힐이 갇혀 있다거나 마법사가 죽었다는 것은 제외하고, 존재니 뭐니를 뺀 상태로.
“그 권능을 나눠 주며 나와 계약했지. 그때는 그쪽이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태지만 이런 전쟁이 계속되는 중이거든.”
지르힐은 그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깊은 생각은 안 하는 것 같다. 어차피 먼 미래에 펼쳐질 이야기, 지금부터 신경 쓰면 안 된다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한다.
“뭐, 계약이란 게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대를 선택한 이유는 예상이 되네.”
“뭔데?”
“마음에 들어.”
“뭐?”
순간 지르힐이 허리를 굽히며 성현의 뺨에 키스했다. 그리고 성현의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가장 아끼는 피조물이 너였을 것 같아.”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렸다.
-퀘스트 : ‘미인의 마음을 얻어라’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 1로 코어가 기억을 살핍니다.
-코어가 당신을 심각한 바이러스로 인식했습니다.
-보상 2로 권능의 심도가 깊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