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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51화 (151/252)

151화

동시에 지르힐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검게 타 버린 침대 등의 흔적이 없었다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잠시 멍하니 있던 성현이 자신의 뺨을 만져 봤다.

아직도 지르힐의 촉감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씁쓸하네.’

지금 만난 지르힐의 성격은 밝았고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억겁의 시간 동안 탑에 갇혀 지내며 그 성격이 틀어졌다.

갇혀 있는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혼자 지내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얼마나 힘들었을지를 생각하면 씁쓸하기만 했다.

성현이 얼굴을 쓸어내린 뒤 문을 열었다.

문밖에서는 아직도 카심과 부하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갔는데.”

성현의 말에 카심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가셨나?”

“어.”

카심의 시선이 텅 빈 방을 살폈다.

당연하지만 그 안에는 이제 아무도 없었고 카심의 눈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여신과 남신이 대립하는 세상에 지르힐은 그 중심을 잡는 자다.

그래서 카심은 지르힐에게 ‘한마디 응원의 메시지라도 받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카심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성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며칠 후에 여신의 광신도들이 헤그네스 왕국에 모인다는 첩보를 들었다. 우리는 그쪽을 공격할 예정이고. 함께 가겠나? 아니, 함께 가 줬으면 좋겠는데.”

성현의 머릿속에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 헤그네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100명을 죽여라]

보상 1 : 코어의 기억

보상 2 : ???

성현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는 퀘스트였다.

성현은 코어의 기억을 장악하는 중이다.

거기에 ‘???’로 이뤄진 보상은 무엇일지 몰라도 성현에게 꽤나 도움이 됐다.

방금 지르힐의 마음을 얻으며 받은 권능의 심도가 깊어지는 보상만 해도 그렇다. 성현의 권능은 밖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강해지는 중이었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카심이 빙긋이 웃었다.

“고맙군. 그리고 이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은 좀 그렇겠지?”

지르힐의 권능으로 성현이 묵기로 했던 방은 시커멓게 타 버린 상태였다.

성현이 입을 열었다.

“다른 방이 있을까?”

“잠시만 기다려.”

카심의 부하가 새 방을 알아보기 위해 몸을 틀었다.

그리고 그곳엔 성현과 카심만 남았다.

성현은 벽에 기대 지르힐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마법사는 지금 제 여자와 자식을 잃었다고 세상을 멸망시킨다고 돌아다니는데?”

‘제 여자와 자식을 잃었다?’

마법사는 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다.

코어의 기억 속에서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분노는 세상을 얼려 버릴 것처럼 냉랭했다.

성현이 카심에게 시선을 틀었다.

“혹시…….”

“말하게.”

“지르힐…… 님에게 마법사가 제 여자와 자식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거든. 그게 무슨 이야기인지 혹시 알고 있어?”

카심은 단번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떻게 모를 수 있지?’라는 표정으로 성현을 바라봤다.

이 세계에서는 꽤나 유명한 이야기인 것 같다.

성현이 ‘모를 수도 있지.’라는 눈빛을 보내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러자 카심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로안의 광신도와 사랑에 빠졌다는 이야기는 유명하지. 룰을 어긴 거니까.”

세상을 만든 창조주가 가장 먼저 정한 규칙이다.

중립을 지켜야 하는 마법사와 지르힐은 사랑을 하면 안 된다고 정했다.

남신과 여신은 자신의 신도를 사랑하고 아껴도 상관없으며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사랑하기를 원했지만, 마법사와 지르힐에게 사랑은 금단이었다.

사랑에 빠진 자는 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바른 중립을 지킬 수 없어서다.

“하지만 마법사는 우리 같은 생명체와 사랑에 빠졌어.”

흔해 빠진 이야기였다.

냇가에서 빨래하던 여성과 별것 아닌 일로 인연을 맺고 감정이 생기게 된 것.

“그래서 아이까지 가졌다고 들었어.”

마법사는 룰을 어겼다.

하지만 창조주의 벌은 내려지지 않았다.

이미 이 세상에 창조주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세상의 일은 모두 여신과 남신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었다.

“로안과 게히얼 님도 내버려 뒀지.”

두 신은 서로 싸우느라 마법사에게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지르힐 님도 마찬가지였고.”

카심은 지르힐의 성격을 극단적일 정도로 개인주의라고 표현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크게 상관하지 않고 지켜보는 방관자, 그게 지르힐이라고 했다.

“문제는 생명체였지.”

누군가 선동했다.

“마법사의 일탈로 창조주가 나타나 세상을 엎어 버릴 거다. 창조주의 분노를 잠재워야 한다. 그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는 멸망할 거다.”

선동은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속도로 생명체의 마음을 움직였고, 그들은 두려워했다.

“그리고 마법사의 여자를 죽였어. 광장에 잡아 두고 나무를 쌓아 올린 뒤 불태웠지. 그 연기가 하늘에 닿아야 창조주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다 믿고.”

성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 뒤가 뻔했다.

마법사가 나타나 그곳에 있는 모든 생명을 앗아 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카심의 말은 성현의 예상과 달랐다.

“지르힐 님이 분노했어.”

“어? 지르힐이?”

“마법사의 여자를 죽였다며 그곳에 번개를 내렸어. 그리고 그 지역은 지도에서 사라졌지. 땅은 무너져 내렸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될 때까지 비를 내렸어. 그곳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수장시켰고 다시는 그 왕국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어.”

“허…….”

성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방금 지르힐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마법사가 싫어. 그 흉측한 놈! 생각만 해도…….”

그렇게 말했으면서 복수를 해 주다니.

츤데레처럼 정은 있었나 보다.

“잠깐만, 그때 마법사는 뭘 하고 있던 거야?”

“참았어.”

“어?”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신의 잘못이 있다고 생각해서 피눈물을 흘리며 참았어.”

거기까지면 좋았다.

하지만 생명체의 왜곡된 생각은 마법사와 지르힐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룰을 어겼는데, 왜 우리가 수장되어야 하나.’

‘룰을 어긴 마법사는 사과조차 하지 않았는데, 왜 왕국의 이름을 사용할 수 없지?’

비난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마법사의 분노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논리적으로 자신들은 잘못한 게 없다고 설파하며 마법사가 가만히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논리는 길거리의 개가 짖는 소리보다 못하다.

그들의 논리를 들은 마법사는 흉악하게 웃었다고 한다.

정말 미친 듯이 껄껄껄껄.

그는 그동안 중립을 지키며 이 세상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생명체를 위해 일했다.

사랑했던 여인은 로안의 신도였지만 마법사는 중립을 지키기 위해 로안과 게히얼, 어느 측의 손도 들어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여자가 죽었지만 꾹 참았다.

하지만 생명체는 그 선을 넘어 버렸다.

“마법사와 사랑에 빠졌던 여자 있지? 창녀였대.”

“진짜? 로안이 보낸 거래. 마법사를 꼬시라고.”

“아니야, 게히얼이 로안의 신자인 척 속여서 넣은 거야.”

“그 아들도 죽여야 해! 그렇지 않으면 룰이 있을 필요가 없잖아?”

고작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기가 화형대에 올라갔다.

마법사의 아들이었지만 어떤 힘도 없는 평범한 생명체였다.

그 어린것이 그렇게 제물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마법사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이기적인 생명체로 가득한 세상을 멸망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마법사님은 로안의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지.”

카심은 마법사의 분노가 로안의 광신도에게 향해 있다고 믿는다.

마법사가 이 세상 전체를 박살 낼 생각이란 것은 모르고 있다.

성현은 그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기억 속이다.

하나의 기억이 끝나면 이들은 다시 아무것도 모른 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마치 영화를 보는 것처럼 자막이 올라가면 처음으로 되돌려져 다시 싸우고 죽고.

생각하던 성현이 픽 웃었다.

‘나라고 다를 것은 없네.’

성현은 회귀자다.

마지막을 본 후 되돌려졌고 또 싸우는 중이다.

‘이번에는 어떻게 될까? 덧없이 죽고 말까? 아니면…….’

그 사이에도 카심은 계속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마법사님의 아들이 재가 되어 뿌려진 곳에…….”

그 순간이었다.

성현의 몸에 혈관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어?’

마법사의 권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 혈관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 망령이 되어 성현의 몸속을 떠돌아다니는 마법사가 카심의 말에 분노한 거다.

“끄으으윽!”

성현은 재빨리 목에 단 펜던트를 만져 봤다.

멀쩡하다.

‘그런데 이 힘은 뭐야?’

마법사의 망령은 펜던트의 힘을 이기고 성현의 몸을 차지하려 한다.

지금 당장 이 세상을 작살내려 하고 있다.

끊임없는 분노가 살기가 되어 질질 흐른다.

‘들어가! 이건 현실이 아니야! 코어의 기억이야!’

성현의 머릿속에서 마법사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 * *

그 시각. 플로르의 성.

검고 긴 머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 여왕 플로르는 왕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앞으로 가슴을 훤히 드러낸 여성이 달려와 허리를 굽혔다.

따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플로르가 그녀를 바라봤다.

“찾았는가?”

“네.”

마법사의 폭주로 맨티스 여왕의 왕국이 무너졌다.

맨티스 여왕은 도망쳤다고 하지만 그 왕국이 다시 일어날 일은 없을 거다.

플로르는 자신도 그렇게 될까 두려웠다.

미쳐 버린 마법사 때문에 죽고 사는 게 결정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플로르는 마법사를 대신해 신이 되기로 결정했다.

이 세상은 신과 가까운 시대,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창조주가 어딘가에 숨겨 뒀다는 에느가인을 찾아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 손에 얻으면 창조주의 권능을 펼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마법사를 없애고 눈엣가시 같은 지르힐을 죽이고 여신과 남신을 봉인한 후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다.

그런데 그걸 찾았다고 한다.

플로르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어디에 있지?”

“신의 탑에 있다고 합니다.”

“신의 탑이라…….”

플로르가 입술을 핥았다.

신의 탑은 세상의 중심에 있는 끝없이 높은 탑이다.

그 탑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는 있지만 갈 수는 없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체는 버려진 자들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게 룰이다.

“룰을 어긴다.”

하지만 플로르는 탑에 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세상을 지키기 위해 그곳으로 간다. 마법사를 내버려 두면 안 돼.”

플로르가 왕좌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며칠 후, 로안의 대축제 날, 헤그네스 왕국에 신도들이 모일 거다. 우리는 그때 축제에 참여하지 않는다. 신의 눈이 그쪽에 쏠려 있을 때 탑으로 이동해 에느가인을 손에 얻는다. 이 모든 것은 창조주의 뜻이며 세상을 위함이다.”

주변에 있던 모든 신하가 고개를 숙였다.

“명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때였다.

“창조주의 뜻? 세상을 위해? 그거 자기 합리화야.”

뜬금없이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허락받지 못한 자는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감히 누가!’라고 생각하며 눈을 부릅떴다.

그런데 그 자리에 언제 왔는지 지르힐이 서 있었다.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고 있지만 그 눈빛은 서늘하다.

그녀를 본 모든 자가 무릎을 꿇었다.

“지, 지르힐 님을 뵙습니다!”

이들 모두는 지르힐을 처음 봤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서 흐르는 기운에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모든 생명체가 두려워하는 지르힐이라는 것을.

플로르도 마찬가지였다.

무릎을 꿇고 지르힐을 맞이했다.

그리고 지르힐이 플로르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그녀의 발소리가 두렵게 울렸다.

동시에 지르힐의 손에 전기가 파직거렸고 그 전기가 창이 되어 날카롭게 번쩍거렸다.

지르힐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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