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 * *
카심과 살아남은 병사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저게…….”
도저히 생명체의 싸움으로 볼 수 없었다.
그만큼 성현과 마법사의 싸움은 대단했다.
창과 창이 맞부딪치는 힘에 공기가 일그러졌고 그 소리만으로 성벽에 금이 갔다.
‘쩡! 쩡!’ 하는 소리가 귀가 아프게 들려왔다.
기묘한 권능이 쉬지 않고 펼쳐졌다.
불꽃이 나타났다가 얼음이 쏟아지기도 했다.
“저, 저게…….”
카심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병사가 카심의 옷깃을 잡았다.
“와, 왕자님…….”
“왜?”
“비보가 들어왔습니다.”
“지금?”
머리 위에 왕가의 소식을 전하는 새가 날개를 펄럭이고 있었다.
카심이 조심스레 새의 발목에 묶인 쪽지를 풀어 읽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왕의 사망을 알려 오는 소식, 새로운 왕의 탄생을 알리는 소식이었다.
“일단 가시죠! 왕국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병사가 카심의 옷깃을 끌었지만 카심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나 혼자 살 수 있겠느냐…….”
그 시선이 다시 성현과 마법사에게 향했다.
마법사의 거친 공격에 성현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아무래도 인간의 몸이다.
한계는 명확했고 빠르게 지쳐 갔다.
급기야, 마법사의 창이 성현의 몸을 꿰뚫었다.
퍽!
옆구리를 뚫고 나가며 성현의 몸에서 핏물이 꿀렁였다.
마법사의 입에서 습한 목소리가 흘렀다.
“장난칠 시간은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성현이 슬쩍 웃으며 입을 열었다.
“1초 전으로.”
뜬금없는 목소리에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뜰 때였다.
-고대 유물의 권능 1초 전으로 가기를 사용했습니다(3/5).
1초 전으로 가는 권능은 하루 다섯 번 사용할 수 있다.
능력을 얻자마자 카심에게 시험해 보며 한 번을 사용했으니 이제 세 번의 기회가 남았다.
그리고 성현은 1초 전으로 되돌아왔다. 앞에는 거세게 창을 휘두르는 마법사가 보였다.
‘여기서 옆구리를 찔러 왔어.’
마법사는 1초 전과 똑같이 행동하고 있었다.
성현의 머리를 공격하는 척, 솟아올렸던 창을 꾹 내리며 곧바로 옆구리를 찔러 들어왔다.
알고 있던 공격이다.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현이 몸을 비틀었고 휘이익, 목표를 잃은 창이 성현을 스쳤다.
마법사는 당황했다.
‘어, 어떻게?’
확실히 닿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여유롭게 피한 성현이 비틀린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그래서 네가 짝퉁이라는 거다.”
성현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리고 뻐버버버버벅! 마법사를 난타했다.
성현의 주먹이 지나간 흔적이 마법사의 갑주에 선명하게 남았다.
그리고 성현이 휘두른 다리가 마법사의 얼굴을 가격했다.
꽈직!
붉은 피가 허공에 솟구쳤다.
동시에 성현이 땅을 밟고 위로 뛰어올랐다.
손을 뻗어 마법사를 겨눴다.
“헬파이어.”
성현의 손에서 불꽃이 일렁였고 뜨거운 화마가 마법사를 덮쳤다.
가가가각!
마법사가 손을 교차하며 불꽃을 어그러뜨렸다.
성현이 미소 지었다.
‘통하지 않을 것은 알았어.’
헬파이어는 시야를 가리기 위한 공격이었다.
마법사가 불꽃에 휩싸여 성현을 보지 못할 때, 성현은 허공을 박차며 마법사를 향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성현의 주변에서 수백 개의 불꽃이 나타났다.
그것들이 다연발 미사일처럼 마법사를 향해 꽂혔다.
콰콰콰쾅!
마법사는 손을 휘저으며 모든 공격을 막아 냈다.
그렇게 마지막 불꽃을 튕겨 냈을 때다.
‘어?’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성현이 마법사를 발로 내리찍었다.
꽈앙!
마법사의 얼굴이 땅에 처박히며 성벽이 뒤집혔고 거대한 벽이 부서졌다.
드드드득!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성벽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한 거다.
바라보던 카심이 다급히 말했다.
“도망쳐!”
“어서요!”
거대한 성벽이 모래처럼 부서져 내렸다.
카심과 병사들은 살기 위해 달렸다.
이곳에 휩쓸리면 그대로 파묻혀 죽는다.
그때 휙, 그들의 앞으로 성현이 섰다.
그리고 카심과 병사들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성현이 전하라 했다. 너는 집에 가는 게 좋겠다고 하는구나.”
“……!”
카심의 눈에 의문이 들었다.
성현의 말이 뭔가 이상했다.
“같이 가고 싶었지만 그러기 힘들 것 같다고 하는구나. 그리고 혹시 지금 아들을 만나지 못해도 언젠가 망령이 된 너와 꼭 만나게 해 주겠다고 약속한다 했다.”
“그게 무슨……?”
“아들은 행복하다고 이야기해 달라 했다.”
“무슨 말이야!”
카심이 외쳤다.
하지만 성현의 말은 그게 끝이었다.
카심과 남은 병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빛이 번쩍였다.
“돌아가라, 너의 집으로.”
쩌어어엉!
공간이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카심과 병사들이 먼 곳으로 튕겼다.
그들이 떨어진 곳은 성의 바깥, 허허벌판이었다.
성현은 멀리 떨어진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마법사를 향해 튀어 올랐다.
그리고 일어서는 마법사의 얼굴을 다시 짓밟았다.
콱! 콱! 콱!
하지만 마법사도 만만치 않았다.
단도를 뽑아 성현의 다리를 그었다.
피하려고 했지만 늦었다.
성현의 발목이 잘리며 피가 주르륵 흘렀다.
그런데 성현은 이번에도 웃었다.
‘1초 전으로.’
-고대 유물의 권능 1초 전으로 가기를 사용했습니다(2/5).
스르륵.
세상이 되감겼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카심과 병사들이 먼 곳으로 튕기고 있었다.
그들이 안전히 일어나는 것은 1초 전에 확인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지체하지 않고 마법사를 향해 뛰어올랐고 그 머리를 짓밟았다.
콰직!
그리고 마법사가 단도를 쥐려는 그 손을 발로 밟았다.
“안 통해.”
마법사의 눈이 혼란에 휩싸였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성현의 눈빛이 이제 두렵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때, 성현이 발로 밟은 마법사의 팔에 창을 찔러 넣었다.
콱!
하지만 마법사는 여전히 싸울 의지가 있었다.
커다란 도끼가 허공에 나타났고 수백 개로 분열되더니 성현을 향해 휘둘렸다.
하지만 성현은 팔을 뻗어 휘둘리는 도끼를 잡았다.
“수백 개로 분열되었다고 해도 진실은 하나, 이게 진짜잖아?”
마법사가 눈을 부릅떴다.
저 도끼는 자신이 아니면 잡을 수 없는 것.
“……넌 누구냐?”
성현이 마법사의 목을 베기 위해 도끼를 치켜 올리며 입을 열었다.
“난 너다.”
“뭐라?”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안식이다. 편히 잠들어라.”
그때였다.
마법사가 끌고 온 먹구름이 걷히며 빛이 나타났다.
그곳에서 엄청난 마력이 느껴지며 구름 위에 앉아 허허 웃으며 체스를 두고 있는 두 신, 여신 로안과 남신 게히얼이 보였다.
여신 로안의 시선이 땅으로 향했다.
무심한 눈으로 마법사와 성현을 보며 그녀의 붉은 입술이 움직인다.
-신기하네? 마법사가 둘이야?
게히얼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말했잖아, 저쪽보다 이쪽이 더 재밌을 거라고.
그들이 말한 저쪽은 신의 에느가인을 찾으러 간 플로르가 있는 곳, 신의 탑이다.
하지만 이들은 신의 탑을 외면하고 마법사를 보러 왔다.
그리고 두 신이 나타난 순간 성현이 마법사를 죽이려던 것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그 입에서 살기 흐르는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죽일 놈들.”
여신 로안이 비웃듯 미소 지었다. 마치, ‘죽일 수 있으면 죽여 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성현이 입을 열었다.
“왜 말리지 않았지?”
-어떤?
로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현이 다시 물었다, 아니 성현의 몸을 차지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물었다.
“왜 내 아들이 죽는 것을 말리지 않았지?”
“응?”
“너희는 알고 있었잖아? 말릴 수 있었잖아? 세상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신이잖아. 그런데, 왜!”
성현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그 마력만으로 세상이 흔들렸다.
하지만 두 신은 여유롭다.
로안이 깔깔깔 웃었고 게히얼도 낄낄낄 웃는다.
그렇게 한참을 웃던 로안이 가볍게 말했다.
“재밌잖아.”
오랜 세월을 살아온 두 신에게 자극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그게 생명체들의 전쟁이었고 지금은 마법사의 몸부림이었다.
로안이 새빨간 입술을 움직였다.
“네 아들, 6개월 됐다고 했었나? 비명 소리가 짧아서 아쉬웠어. 금방 죽더라.”
성현의 눈이 뒤집혔다.
땅을 박차고 그들을 향해 뛰어올랐다.
동시에 로안의 고운 손이 성현을 향했다.
빛이 번쩍거리더니 성현의 하반신이 한순간에 찢겼다.
성현이 고통을 참으며 입술을 씹었다.
‘1초 전으로.’
* * *
플로르는 탑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끝없이 높은 탑을 바라봤다.
탑은 구름을 뚫을 정도로 높았으며 그 끝은 신의 세계에 닿아 있다고 들었다.
‘드디어 왔어.’
플로르는 긴장된 숨을 내뱉었다.
지금부터 플로르는 이 세상의 룰을 어기는 거다.
에느가인을 찾지 못하면 어떤 벌을 받을지 예상하기도 어려웠다.
어쩌면 플로르뿐만 아니라 세상 전체가 벌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게 신의 노여움이다.
하지만 플로르는 결심했다.
‘어차피 죽는 것.’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고 여겼다.
자신이 죽으면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했다.
플로르가 계단을 밟아 위로 올랐다.
한 걸음, 한 걸음.
플로르의 뒤로 병장기를 든 병사들이 쫓았다.
모두의 눈에 긴장감이 가득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플로르는 최상층에 섰다.
“하…….”
플로르의 입가에 희열로 가득한 미소가 올랐다.
“느껴지는구나.”
그녀는 느끼고 있었다.
방에서 흘러나오는 마력,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 신의 에느가인.
“저 힘을 흡수하면…….”
플로르는 신이 될 수 있다.
창조자에 버금가는, 로안이나 게히얼이 감히 꿈꿀 수 없는 수준의 신!
플로르가 새빨간 혀로 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문고리를 잡았다.
끼이이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릴 때였다.
-플로르, 멈춰라!
유르라헬의 목소리였다.
이제야 탑 아래에 도착한 그녀가 권능을 사용한 목소리로 플로르를 말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머니께 용서해 달라 말씀드리겠다. 그러니까, 멈춰라. 그 뒤는 금단의 영역이야!
플로르가 히죽 웃었다.
플로르는 유르라헬이 가증스러웠다.
고작 신을 모신다는 이유로 자신보다 높은 곳에 서 있으려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발을 치렁거리며 아름다운 척, 착한 척 말하는 그 입술을 찢어 버리고 싶었다.
“어머니? 앞으로는 나를 어머니라 부를 거야. 그러니까 이제 나를 모셔라, 유르라헬…….”
플로르가 문고리를 돌렸다.
그리고 확, 열었다.
탐욕스러운 목소리가 플로르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나를 맞이하라! 에느가……!”
플로르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분명 에느가인은 있었다.
붉게 빛나는 거대한 수정, 높이만 약 3m, 저것이 에느가인이다.
그런데 문제는 에느가인의 위에 지르힐이 다리를 외로 꼰 채 앉아 있다는 것이었다.
지르힐의 시선이 플로르에게 향했다.
“늦었네?”
“아…….”
플로르가 말을 더듬을 때, 지르힐이 수정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그리고 생긋 웃으며 창을 들고 또각또각 플로르를 향해 다가왔다.
그 아름다운 미소가 플로르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미소였다.
지르힐이 창을 툭툭 털며 말했다.
“이제, 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