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지르힐의 눈빛은 무심했다.
플로르를 앞에 두고 벌레를 보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지르힐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 기운만으로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졌다.
그리고 지르힐이 플로르를 향해 가볍게 창을 던졌다.
‘휙!’ 소리와 동시에 꽈아아앙!
탑의 벽이 사정없이 무너지며 바깥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하지만 먼지가 사라졌을 때, 그곳에 플로르는 없었다.
지르힐이 창을 던지는 순간 플로르는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사용해 지르힐의 창을 피해 냈기 때문이다.
지르힐이 무너진 돌무더기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제법이네?”
그리고 지르힐이 시선을 틀었다.
플로르는 거미처럼 탑의 벽에 붙어 있었다.
플로르가 악을 내지르며 양손을 펼쳤다.
“네가 뭔데!”
플로르의 손에 검은 마력이 일렁였고 공기가 찢어지며 소용돌이쳤다.
보통의 생명체였다면 그 마력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기운에 휘말려 죽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지르힐은 웃었다.
지르힐이 보기에 플로르의 마력은 조잡했다.
“다행이야.”
“……!”
지르힐이 손을 뻗으며 빙긋이 웃었다.
그 손에 다시 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플로르는 눈을 부릅떴다.
“……다행?”
“걱정했거든. 네가 쉽게 죽으면 어떻게 하지? 그럼, 너무 싱겁잖아. 네가 저지른 죄가 있는데, 세상의 모든 고통을 느끼고 죽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혓바닥부터 발가락까지 모두 잘라 버린 후 죽이려 했는데, 살아 줘서 고마워.”
플로르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지르힐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정말 플로르를 사정없이 난도질해 죽일 생각이다.
지르힐의 살기가 탑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플로르를 향해 둥실 떠올라 눈을 마주쳤다.
“난 중립을 지키는 신의 대리자 지르힐, 생명체에게 공포를 주어 죄를 짓지 않게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고 이 세상을 균형 있게 지켜야 할 책임이 있지.”
지르힐은 서늘하게 웃고 있었지만 플로르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 죽는다는 것을 느낀 거다.
잔인하게 그리고 고통스럽게.
지르힐의 창이 플로르의 코끝에 닿았다.
“플로르, 생명체이면서 신의 자리를 넘본 그 탐욕, 거기까지만 했어야 해. 넌 선을 넘었어. 탑에는 오지 말았어야 했어.”
“사, 살려 주세요.”
“말했잖아, 쉽게 안 죽일 거라고. 네 몸뚱이는 사막에 던져 놓을 거야. 썩어 가는 몸을 사막의 벌레가 씹어 먹겠지. 견뎌라, 일찍 죽지 말고 최대한 살아라. 그리고 반성해라.”
플로르의 눈에 핏발이 섰다. 번뜩이는 눈으로 함께 온 병사들을 향했다.
“뭐 하는 게야! 빨리, 빨리 지르힐을 공격……!”
순간, 지르힐이 병사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병사들의 머리가 ‘퍽! 퍽!’ 소리와 함께 폭발했다.
비명조차 없었다.
머리가 없어진 그들이 비틀대다가 땅에 처박혔다.
플로르는 당황했다.
“어, 어떻게…….”
엄선해서 데려온 병사들이다.
어느 왕국의 귀족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마력이 있었다. 지르힐이 신의 대리자라지만 조금은 버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르힐을 상대로 그들은 힘 한 번 펼치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지르힐의 눈동자가 플로르에게 옮겨졌다.
플로르가 기겁했고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정말 간절한 목소리가 플로르의 입에서 흘렀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다시는 안 그럴…….”
순간 썩뚝, 플로르의 손목이 잘렸다.
플로르가 멍한 눈으로 자신의 손을 향했다.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지는 손이 보였다.
지르힐을 향해 빌고 있던 그 모양 그대로다.
“아…….”
플로르가 잠시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곧 비명을 내뱉었다.
“꺄아아아아악!”
지르힐이 미간을 찌푸리며 “시끄럽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계속해서 창을 휘둘러 플로르의 몸뚱이를 잘랐다.
허공에 플로르의 손가락과 발가락, 무릎과 팔꿈치가 튀어 올랐다.
탑의 벽에는 플로르의 핏물이 툭툭 튀었다.
이건 싸움이 아니다.
그저 살육이자 고문이다.
이어서 팔과 다리가 사라진, 몸뚱이만 남은 플로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르힐 역시 사뿐히 바닥에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창을 움직여 플로르의 입에 댔다.
“혀를 잘라야 하니까, 입 열어. 안 그러면 입술도 잘라 버릴 거야.”
플로르의 눈동자가 스르륵 에느가인을 향해 틀어졌다.
붉은 빛을 내는 수정,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 신의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에느가인이 바로 옆에 있다.
저것만 손에 얻으면 여신이나 남신은 물론이고 지르힐이나 마법사는 우습지도 않을 거다.
그래서 저것을 얻기 위해 여기까지 왔는데, 지르힐에게 난도질을 당하며 죽어 가야 한다.
‘아아아아…….’
플로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륵 흘렀다.
억울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에느가인이 피처럼 붉은 빛을 내며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덜그럭, 지르힐이 플로르의 입에 창을 쑤셔 넣었다.
지렛대처럼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플로르의 입에 열렸다.
플로르는 여전히 에느가인을 보고 있었다.
에느가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아름다웠던 모습은 없다.
몸뚱이만 남은 끔찍한 모습으로 창에 입이 벌어져 있고 새하얗던 치아도 피가 배어 있다.
‘아…….’
그리고 지르힐이 장난처럼 웃으며 말했다.
“혓바닥이 잘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죽여 버릴 거야.”
“언제든.”
혀가 잘렸다.
플로르의 입에서 핏물이 꿀렁꿀렁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르힐이 플로르의 머리카락을 콱 잡아 들어 올렸다.
“사막에 던져 주지. 괴로워해라. 그리고 반성해라.”
그때 탑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금발 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성, 유르라헬이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앞에 선 유르라헬이 현장의 아찔한 광경에 비틀거렸다.
머리가 없어진 병사들과, 몸뚱이만 남은 채 지르힐에게 머리를 잡힌 플로르.
하지만 유르라헬은 그 상황에도 지르힐을 보며 살짝 무릎을 꿇었다.
“유르라헬이 지르힐 님을 뵙습니다.”
지르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유르라헬을 살폈다.
“넌…… 로안의 몸종이구나?”
“네.”
“그런데 여기가 어디라고 오는 거지? 금지된 곳인데?”
지르힐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다르다.
살기가 질질 흐르는 중이다.
대답 하나만 잘못해도 유르라헬 역시 플로르처럼 죽고 말 거다.
지르힐은 충분히 그럴 성격이다.
유르라헬이 다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는 어떤 사심도 없습니다. 그저 플로르가 이곳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막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럼 내려가. 상황 끝났어.”
“아, 네.”
유르라헬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에느가인을 보고 있었다.
핏빛처럼 붉은색, 보기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만져 보고 싶었고 소유하고 싶었다.
플로르가 저런 몸이 되면서까지 에느가인을 탐했는지 이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꽝! 지르힐이 창을 땅에 꽂으며 유르라헬의 상념을 깨웠다.
“내려가라고 말했잖아. 말, 잘 들어야지?”
“죄송합니다.”
유르라헬은 몸을 틀었다.
* * *
플로르의 몸뚱이는 사막에 내던져져 있었다.
그리고 밤이 되자 차가운 새벽이슬을 맞으며 플로르는 핏발로 가득한 눈으로 검은 하늘만을 바라봤다.
플로르는 몸이 벌레에 갉아먹히는 것을 느끼며 애처롭게 흐느껴 울고 있었다.
‘죽여 버릴 거야. 지르힐, 그것만은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죽일 거라고!’
그때 그녀는 저벅저벅 발소리를 들었다.
시선을 틀어 보니 검은 갑주를 입은 마법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플로르의 눈이 겁에 질렸다.
지르힐도 무서웠는데, 마법사는 그 이상이다.
지르힐은 그나마 이성이 있었지만 마법사는 지금 미쳐 있다.
세상을 멸망시킨다며 온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 버리는 게 저 마법사다.
어떤 고문이 이어질지 예상하기도 힘들었다.
“아…….”
플로르의 입에서 고통으로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 앞에 마법사가 멈춰 섰다.
그리고.
“도와주지.”
“……!”
“어차피 멸망시키기로 한 세상, 너 같은 것의 힘을 빌려도 괜찮겠지.”
플로르는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서다.
마법사가 플로르의 머리채를 잡으며 말을 이었다.
“네 힘으로 로안과 게히얼을 죽여라.”
“……!”
순간, “멈춰!”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마법사가 고개를 틀었다.
지르힐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르힐이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그건 아니야.”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됐고. 하지 마. 로안과 게히얼을 패고 싶다면 도와줄게. 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야. 하지 마. 선을 넘으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마법사가 껄껄껄 웃었다.
“네가 날 막을 수 있을까?”
“못할 것 같아?”
검은 하늘에 먹구름이 채워졌고 곧 쏴아아아, 빗줄기가 떨어졌다.
지르힐이 권능을 사용한 거다.
하지만 마법사는 지르힐을 보지 않았다.
플로르를 보며 입을 열었다.
“네 대답만 남았다. 하겠는가? 원한다면 눈을 깜빡여라. 그럼 에느가인이 있는 곳으로 널 보내 주마.”
“하지 마!”
지르힐이 외쳤다.
하지만 마법사의 시선은 여전히 플로르에게 향해 있다.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지르힐…… 생명들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이기적이고 최악이지. 어린아이를 죽이고 약한 자를 겁탈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아. 게히얼이나 로안은? 놈들은 생명체를 장난감처럼 여기며 가지고 놀잖아?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계속 내버려 둔다고? 신이 만든 세상이니까, 그걸 지켜야 한다고?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부술 거야.”
마법사의 창이 지르힐을 향해 겨눠졌다.
마법사가 계속 말했다.
“에느가인이 부서지면 로안이나 게히얼도 땅으로 내려와야지. 신계가 사라질 테니까. 그럼 그 둘부터 죽일 거야. 미안하다, 지르힐. 네 임무는 여기까지야.”
마법사가 다시 플로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냐? 에느가인을 먹어 보겠느냐? 아니면, 여기서 벌레에게 뜯어먹히다 죽을 테냐?”
플로르의 대답은 빨랐다.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마법사가 빙긋이 웃으며 플로르의 몸뚱이를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지르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가 빠르게 플로르의 몸뚱이를 잡기 위해 땅을 박차고 뛰었다.
하지만 지르힐의 앞을 마법사가 가로막았다.
“미안하다, 지르힐.”
마법사가 지르힐을 향해 창을 휘둘렀다.
지르힐이 다급히 막았다.
창과 창이 닿은 그 충격에 공기가 일렁였다.
쩌어엉!
* * *
‘신계로 도망가면 잡을 수 없다는 거구나?’
-그렇다.
성현은 무너진 성벽에 앉아 있었다.
비가 주르르륵 내리며 핏물과 먼지가 씻기는 중이다.
성현은 씁쓸하게 웃으며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라는 호칭을 처음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마법사는 신을 죽여 달라는 부탁을 했었다.
‘이래서 그랬구나…….’
낮의 전투, 성현과 마법사가 힘을 합쳤지만 결국 신을 죽이지 못했다.
그들이 신계로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것도 깔깔깔 비웃으며.
그 비웃음 소리를 떠올리면 지금이라도 당장 죽이고 싶었지만, 어려운 일이다.
‘하…….’
성현이 고개를 저을 때, 머릿속에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 나모르를 찾아 죽여라]
-보상 1 : 코어의 기억 장악.
-보상 2 :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찾을 수 있음.
해야 할 퀘스트가 있다.
이곳의 원주인인 나모르를 죽이고 성현이 그 기억의 주인이 되는 거다.
그리고 이제 밖으로 나갈 시간이다.
이 기억의 끝은 최악으로 물들고 있었지만 현실은 바꿔야 한다.
성현이 시선을 틀었다.
벽에 기대앉은 나모르가 보였다.
정말 잘생기고 선하게 보였으며 정의로운 주인공처럼 생긴 얼굴이었다.
성현이 몸을 일으켜 나모르를 향해 다가갔다.
나모르가 시선을 들어 성현을 바라봤다.
“내 병사들에게 알려라. 내가 이곳에 있다고…….”
나모르는 낮에 마법사와 싸우며 큰 부상을 입었다.
실제 역사에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도망갔지만 보정된 기억에서 그는 멋진 주인공이었다.
목소리조차 멋있다.
‘미친놈.’
성현이 살려 달라 외치는 나모르를 향해 부채를 펼쳤다.
부채가 창으로 변했고 그 심장을 노렸다.
나모르가 눈을 부릅떴다.
“뭐 하는 거지?”
“이제 잠들어라. 고생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성현은 세상이 흔들리는 움직임을 느꼈다.
동시에 하늘이 유리 조각처럼 깨어져 떨어지고 있었다.
시스템 알림음의 목소리가 다급히 들려왔다.
-죽이세요. 죽여요. 어서, 나모르를 죽여요!
나모르를 죽여야 밖으로 나가는 문을 찾을 수 있다.
* * *
플로르의 몸뚱이가 에느가인의 모서리에 꽂혀 있었다.
뱃가죽이 뚫려 계속해서 핏물이 흐르는 중이다.
그 피가 에느가인을 적셨다.
플로르가 웃었다.
혓바닥이 없는 상태로 기괴한 웃음을 토해 냈다.
‘다 죽여 버릴 거야. 다! 전부! 누구든! 이 세상을 멸망시키고 내가 신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