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플로르의 피를 머금은 에느가인이 부르르 떨었다.
쩍, 쩍 금이 가며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이 플로르의 몸을 휘감는다. 플로르의 말초신경을 건들었고 동시에 그녀는 끝없는 쾌락을 느꼈다.
온몸이 간질간질하며 붕 뜨는 기분, 팔과 다리 그리고 혓바닥이 잘린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플로르가 몸을 꿈틀거리며 계속해서 웃었다.
‘이제 신이 되는 거야. 신이 될 수 있어.’
로안에게 고개 숙일 필요가 없다.
지르힐 따위에게 벌벌 기지 않아도 된다.
이제 세상의 중심은 플로르,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거다.
그리고 쩌저저저적! 에느가인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세상 모든 곳에서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땅이 찢기고 뒤집혔으며 하늘이 조각나며 떨어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플로르의 웃음소리가 깔깔깔 들려왔다.
* * *
“이게 원하는 거라고? 고작, 고작! 이런 게!”
지르힐이 마법사를 땅에 처박으며 외쳤다.
지르힐은 느끼고 있었다.
에느가인이 폭발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신의 노여움이 시작됐다는 것을.
마법사는 땅에 누운 채 피를 토하고 있었다.
하지만 마법사는 고통 속에서도 웃었다.
“지르힐, 다시 말하지. 생명체는 이기적이야. 내가 건들지 않았어도 자멸했을 거야. 같은 종끼리 서로 죽이고 또 죽이고 그러다가 멸망으로 향했겠지. 난 그 시간을 앞당겨 줬을 뿐이야.”
“넌 미쳤어.”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세상이 미친 거지. 너도 조금은 느끼고 있었잖아? 창조자가 실패한 거야.”
마법사는 이제 신을 신으로 부르지도 않는다.
창조자라 부르고 있다.
지르힐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에게 마법사는 유일한 친구였다.
이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아내와 자식을 잃은 슬픔에 세상을 저주하는 악마가 되었다.
지르힐이 중얼거렸다.
“지금은 너와 입씨름하고 있을 시간 없어. 에느가인은 내가 막을 거야.”
그리고 그녀의 몸을 금빛 광채가 휘감았다.
세상의 번개가 모두 그녀에게 모이는 것만 같았다.
어두웠던 세상이 대낮처럼 밝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모든 힘을 쏟기 시작한 거다.
마법사가 끌끌끌 웃으며 말했다.
“지르힐, 늦었어. 그리고 지금 네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지르힐 역시 마법사와 싸우며 만신창이가 되었다.
온몸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중이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말했다.
“아니, 막을 수 있어.”
그녀는 얼마 전, 성현을 만났다.
그리고 성현은 먼 미래의 이야기를 전해 줬다.
그 말에 거짓은 없었고 그 이야기에 따르면 에느가인을 막는 것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네 미친 짓은 성공할 수 없어.”
지르힐은 마법사를 내버려 둔 후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었다.
꽈아아아앙!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느낀 것은 지르힐만이 아니었다.
각 왕국의 여왕들과 군주들, 그들도 세상이 쪼개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신탁이 들어왔다.
로안과 게히얼의 목소리가 그들의 머릿속을 울렸다.
-지금 당장 탑으로 가서 플로르를 막아라.
세상의 모든 군주들와 여왕들이 탑으로 향했다.
* * *
-싸움이 시작됐죠. 플로르를 막기 위해 지르힐과 모든 여왕 그리고 군주가 애를 썼습니다.
비가 주륵, 주륵 내리는 곳, 무너진 성벽이었다.
성현은 그곳에서 나모르를 앞에 둔 채 시스템 알림음을 듣고 있었다.
-하지만 실패였어요. 플로르도 그리고 지르힐도.
‘어? 둘 다 실패했다고?’
-그건 가짜 에느가인이었어요. 신이 생명체를 시험하는 유일한 금단. 애초에 신의 힘에 위협이 될 에느가인을 누구나 알 수 있는 곳에 던져뒀다는 게 이상하잖아요?
‘그래서?’
-가짜 에느가인이 폭발했죠. 그리고 그 파편이 군주와 여왕 들의 가슴에 박혔습니다. 그게 힘의 원천이 된 코어입니다.
가짜라 해도 신이 직접 만든 것.
그 힘은 엄청났다.
-그리고 가짜 에느가인이 깨지며 신의 저주가 시작되었어요. 생명체에게는 영원에 가깝게, 누군가에게 살해되지 않으면 끝까지 살아야 하는 저주, 로안과 게히얼은 봉인되어 지내야 하는 저주 그리고 낙인.
‘낙인?’
-플로르의 이름에 ‘종말’이 들어가 있죠. 그게 낙인이에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이름. 그리고 그 이름에 걸맞게 플로르는 가장 어둡고 습한 곳으로 내던져졌습니다.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제 지르힐과 마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차례였다.
시스템 알림음이 목소리를 이어 갔다.
-마법사는 망령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르힐은 어떤 저주도 받지 않았죠. 애초에 신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왜 탑에 갇힌 거지?’
-그게…….
탐욕스러운 생명체들, 여기서 끝냈으면 그래도 행복했을 거다.
하지만 힘을 얻은 여왕과 군주 들은 더한 싸움을 시작했다.
네가 신을 화나게 했다, 우리가 진짜 신의 사도다, 그렇게 패거리가 갈렸다.
그리고 플로르를 중심으로 ‘교’라는 단체가 생겼다.
그들의 사상은 세상을 지르힐에게 맡겨 둘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진짜 에느가인을 찾아 신의 힘을 얻은 후 저주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진짜 목적은 지르힐에게 죽는 게 두려웠던 것이었죠.
플로르는 언제 지르힐이 자신을 죽이러 올지 몰라 두려워했다.
그래서 교를 움직여 자신들의 위협이 되는 지르힐을 공격했다.
아무리 지르힐이라 해도 힘을 얻은 수천수만의 그들을 이겨 낼 수 없었다.
-그래서 탑에 갇힌 겁니다. 힘을 쓸 수 없도록 봉인된 채로요. 그래도 창조주는 지르힐을 아꼈습니다. 그 탑에 접근하는 여왕과 군주 또는 그들의 세력이 있으면 태워 죽였거든요. 그곳에 접근하는 것이 지르힐에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진 생명체가 아니면 불가능해진 거죠.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참…….’
씁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저주는 끝나지 않았어요. 지금 하늘이 쪼개지고 있죠?
성현이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비와 함께 하늘이 유리 조각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기회를 준 거였어요. 생명체들이 지금 가진 힘을 합쳐 세상의 멸망을 막기를 바란 거죠. 하지만 그들은 싸웠고 세상의 멸망을 앞당겼어요. 이 세상은 200년 후에 폭발할 거예요.
이 세상의 조각, 조각들이 먼지가 되어 별이 되고 이곳의 생명체들은 존재라는 이름이 되어 새로운 세상으로 옮겨진다.
사막과 얼음으로 뒤덮인 저주의 땅에.
-본격적인 저주가 시작되죠.
여왕은 어머니라는 이름이 되어 평생 출산의 고통을 느껴야 했다.
계속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군주는 자신의 마력을 소비해 세상을 유지해야 하는 저주를 받았다. 힘을 모으고 또 모아도 자신에게 쓸 수 있는 것은 한정되었다. 그 마력은 계속해서 새어 나가야 했다.
-그 저주를 풀기 위해 존재들이 진짜 에느가인을 찾는 겁니다.
‘…….’
-에느가인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어떤 차원이든, 어떤 행성이든 찾아가 쑥대밭을 만들어 냈죠. 저주는 고통스러웠고 그들은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요.
그리고 이번엔 그 에느가인이 지구에 있다는 소리를 들은 거다.
그래서 존재의 시선이 지구로 모이고 있었다.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그러자 시스템 알림음이 말했다.
-이제 나모르를 죽이세요. 저놈은 이곳에서 도망쳐서 탑으로 향할 겁니다. 그곳에서 코어를 몸에 심으면 코어는 다시 나모르를 주인으로 인식할 거예요.
성현의 시선이 나모르에게 향했다.
나모르는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내…… 병사들에게 알려라.”
나모르는 끝까지 멋있는 척하고 있었다.
* * *
초소 뒤, 성현의 몸이 스르륵 나타났다.
나모르를 죽이고 문이 열렸다.
그 문을 통했더니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머릿속에서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고생하셨습니다!
‘끝난 건가?’
성현은 손에 쥔 코어를 바라봤다.
코어는 성현의 손길에 어떤 거부도 하지 않는다. 순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건 됐고.’
성현의 시선이 다른 손으로 틀어졌다.
부채가 보인다.
고대의 유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아이템이 그대로 손에 들려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힘들다.
아이템을 들고 왔어도 그 권능이 계속 유지될지는 알 수 없었다.
성현이 부채를 펼쳤다.
‘창으로.’
부채가 길어지며 날카로운 창의 모습을 구현해 냈다.
기억 속에서와 똑같은 능력을 가진 게 분명하다.
우려하던 일은 없었다.
‘좋네.’
성현은 다시 부채를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성현은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창고로.’
성현의 모습이 다시 사라졌다.
백색의 공간.
창고에 도착한 성현이 곧장 지르힐을 불렀다.
“지르힐?”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성현의 앞에 나타났다.
-코어를 장악한 것은 봤다.
성현이 슬쩍 웃으며 벽에 등을 기댔다.
사실 코어의 기억을 살피며 성현은 우울한 기분만 느꼈다.
그곳의 지르힐이 정말 불쌍해서다.
세상의 멸망을 막으려 혼자 날뛰던 그 모습이 애처롭게 기억됐다.
그래서 지금의 지르힐을 보고 싶었다.
“거기서 널 봤어.”
-날?
“하……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지르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수백억 년 또는 그 이상 된 기억이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존재라 해도 그때의 일이 세세하게 기억되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성현은 그때 없던 사람이다.
성현을 만나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행동을 했을지, 지르힐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떨려 왔다.
-내가 뭘 했지? 그대에게 무슨 말을 하던가?
“하…… 너 참, 지금과 많이 다르더라?”
-어?
성현은 지르힐의 당황한 모습이 재밌었다.
평소에는 “하지 마, 하지 마.” 같은 말만 했는데, 지금은 위축되어 있다.
성현이 지르힐을 보며 느릿하니 입을 열었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그리고 너와 계약을 했다고 말했더니, 이런 말을 했어. ‘뭐, 계약이란 게 뭔지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그대를 선택한 이유는 예상이 되네.’라고.”
지르힐이 극단적인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난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들어 봐. 그다음 말이 중요해. 네가 어떤 걸 예상했을 것 같아?”
-……뭐지?
지르힐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려 왔다.
성현의 눈빛에는 장난기가 가득해졌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느릿하니 입을 열었다.
“뭐라고 했냐 하면…… ‘마음에 들어.’라고 했어.”
지르힐의 눈동자가 덜컥거렸다.
하지만 그다음 더 충격적인 말이 들려왔다.
“그다음에 내 뺨에 뽀뽀했어.”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아니야!
지르힐은 당장 코어를 내놓으라고 외쳤고 그 기억 속에 들어가 그 말과 행동을 한 기억 속 지르힐을 죽이겠다고 난리쳤다.
그 모습을 보며 성현이 낄낄 웃었다.
“성격이 많이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또 비슷하네.”
-그대!
* * *
지르힐이 갇힌 탑.
지르힐이 붉은 입술을 씹었다.
“대체…… 나모르, 그것은 어떤 기억을 갖고 있었기에! 그대, 그것은 모두 잘못된 기억이야! 나모르의 망상으로 만들어진 허상이야! 난 그런 짓을 하지 않아! 내가, 내 입술은 싸구려가 아니야!”
탑을 나갈 수가 있다면 당장 나모르의 기억 속으로 뛰쳐 들어갈 기세였다.
하지만 지르힐이 화를 낼수록 “푸하하하!” 하고 울려 퍼지는 성현의 웃음소리가 얄밉게 들려왔다.
“하…….”
지르힐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 웃어라. 웃어야지. 하지만 망상이야. 그건 잘못된 기억이야.”
지르힐이 반쯤 포기했다.
어차피 나모르의 망상 속의 일이라며 위안을 가졌다.
그때 지르힐의 귓가에 성현의 목소리가 스쳤다.
-그 탑에서 구해 줄게.
“……!”
-기다려. 기억 속이 아니라 현실에서 얼굴 한번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