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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62화 (162/252)

162화

* * *

노예가 된 존재 15명, 그들 중 대장인 놈이 서은서에게 물었다.

“누님? 그런데 우리는 어디를 가는 겁니까?”

“일단은 왕가의 계곡.”

“……네?”

대장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그래서 다시 물었다.

“……왕가의 계곡이요?”

“어.”

그곳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다. 최소 팔다리 중 하나는 사라진다. 그것은 상식이고 진리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왕가의 계곡에 들어간다니.

대장은 입술을 씹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하루에 한 번,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할 뿐이었다.

그리고 서은서와 존재들의 대화를 듣던 성현은 신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누님?’

인상은 깡패처럼 생긴 놈이 서은서 앞에서 살살 긴다.

‘뭐지?’

그러고 보니 꼬마도 마찬가지, 서은서를 보며 “누나, 누나.” 하고 지껄이고 있다.

존재들은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만큼 자존심이 강하다.

저들이 아무리 최하위 등급의 존재라 해도, 그래서 우르르 몰려다니며 도적질이나 한다 해도 인간을 ‘누나’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런데 이건 뭐야?’

고개를 갸웃거리던 성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서은서에게 직접 물었다.

“얘들이 지금 서은서 씨에게 누나라고 부르는 것 맞죠?”

“그러네요. 이유는 모르겠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부르고 싶다고 그랬어요.”

그 말과 동시에 노예 열다섯과 꼬마의 시선이 홱홱 서은서를 향해 틀어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내뱉는 악마 같은 모습, 그들은 성현에게 진실이 무엇인지 토해 내고 싶었다.

그리고 ‘저런 여자는 만나면 안 돼!’라고 가르쳐 주고 싶었지만 서은서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졌다.

헤헤, 웃으며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예쁘면 누나가 맞죠.”

* * *

왕가의 계곡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노예 15명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텐트를 치고 있었다.

성현은 서은서만 조용히 불렀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이동 후 서은서에게 알약 하나를 건넸다.

“뭐예요?”

“드세요. 지금보다 마력을 2배 이상 올려 줄 거예요. 권능 때문에 막혀도 매개체 없이 자연스레 뚫어 줄 거고요.”

성현이 호수에 내려가 ‘여’를 잡아 오며 챙긴 알약이었다.

‘마력을 2배 이상? 권능 이해도를 매개체 없이 뚫어 준다고?’

서은서는 눈을 깜빡였다.

이런 것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성현의 말이 맞는다면 수백억의 가치가 있을 알약이다.

하지만 그녀는 의심하지 않았다.

성현이 가져온 것은 믿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걸 제가 먹어도 돼요?”

“네.”

알약은 2개였고 이 약이 효과를 보는 것은 단 한 번.

욕심을 부려 2개를 먹는다 해도 더 이상의 효과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경매장에 내놓았다가는 지연우가 꿀꺽할 수도 있으니 차라리 서은서에게 먹이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적어도 이 약을 먹으면 왕가의 계곡 또는 소멸의 바다에서 쉽게 죽지는 않을 테니까.

“창고에 가서 먹고 오세요. 그리고 카디르버를 부른 다음에 먹어야 해요.”

그냥 먹는 게 아니라 창고로 가라니, 게다가 계약된 존재인 카디르버까지 부르라고 한다.

서은서는 성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현이 슬쩍 웃었다.

“많이 아플 거예요. 지금 입고 있는 옷은 다 타 버리겠죠. 어쩌면, 아니 의식도 잃을 거예요. 그때 카디르버가 도와줄 겁니다. 아, 이건 진통제. 상관 말고 다 드세요.”

“……이만큼이나요?”

진통제가 한 움큼이었다.

하지만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모자랄 거예요.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참으세요.”

잠시 후, 서은서는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 채 창고로 떠났다.

성현도 마찬가지 그녀가 사라진 직후 창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성현은 곧장 지르힐을 불렀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뭐긴, 약 먹으려고 하는 거지.”

-그게 뭐지?

이 알약은 존재도 모르고 있다.

오랜 시간 숨겨져 왔기 때문에 알고 있었어도 기억 저 멀리 숨겨져 있을 거다.

“그런 게 있어. 내가 죽을 것 같으면 살려 주고.”

지르힐의 금빛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대, 또 어떤 미친 짓을…….

성현은 지르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알약을 씹어 삼켰다.

그 시각.

“아아아악!”

서은서의 비명이 창고를 채우고 있었다.

피를 토하고 관절이 기형적일 정도로 비틀어졌다.

독으로 단련된 서은서의 신체였지만 마력이 증폭되는 고통을 참기 힘들었다.

곧 뜨거운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옷이 불타올랐다.

그녀의 하얀 피부에 수포가 보글보글 솟아나기 시작했다.

아름다웠던 몸이 징그럽게 변한다.

하지만 서은서는 자신의 외모를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아아아아!”

서은서의 비명이 고통스러웠다.

진통제…… 그 많은 것을 다 먹었지만 이 고통은 끔찍했다.

급기야 서은서는 툭,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카디르버는 그 앞에 서서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나에게 뭘 하라는 거냐!

성현은 카디르버가 도와줄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카디르버는 난데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알약도 처음이었고 이 정도로 고통스러워하는 서은서도 처음이었다.

카디르버가 할 수 있는 것은 ‘유성현 개새×’를 중얼거리며 서성이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서은서의 몸에 솟아오른 수포가 퍽, 퍽 터졌다.

그 수포에서 악취가 난다.

검은 피가 질질 흘렀고 새 살이 돋아났다.

기형적으로 꺾여 으스러진 뼛가루가 재생된다.

흉터를 비롯해 오염됐던 모든 것이 완벽히 만들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마력…….

서은서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2배? 아니, 3배?

문제는 그 마력이 서은서의 몸을 잠식하고 있다.

이대로 두면 마인이 된다.

카디르버는 이제야 성현의 말을 이해했다.

-이걸 하라는 것이었어.

카디르버는 곧장 자신의 마력을 쏟아 내며 서은서의 마력을 다스렸다.

그 마력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강제로 움직였다.

서은서의 혈관으로 보내고 심장으로 옮겼다.

한편, 성현은 아직 의식을 잃지 않았다.

바닥을 박박 기며 괴로워하고는 있었지만 폭발할 것 같은 마력을 자신의 의지로 제어하는 중이었다.

얼마나 바닥을 기었는지 손톱이 빠각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하지만 성현은 견뎠다.

‘찾아야 해.’

성현은 서은서와 몸 상태가 달랐다.

성현의 신체에는 원래부터 마력이 가득했다.

마법사와 마녀 그리고 지르힐의 권능, 그 모든 마력이 발가락 끝까지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알약을 먹으며 그 모든 마력이 2배 이상 증폭됐다.

당연하지만 그 마력을 신체에 보관할 여력이 없었고, 그래서 또 무의식의 공간으로 이동시켰다.

마력이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콰아아아아앙!

“끄으으읍!”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예전에 열어 뒀던 무의식의 공간, 꽤 넓다고 생각했는데 마력이 순식간에 바다처럼 채워졌다.

남은 마력이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젠장.’

그래서 성현은 또 무의식을 부수기로 했다.

예전에 부쉈던 것은 가장 첫 번째 벽.

이번에는 두 번째 벽을 부순다.

‘가라.’

성현은 마력을 움직여 두 번째 벽을 강제로 부수려 했다.

하지만 번번이 헛수고였다.

‘다시!’

성현은 필사적이었다.

이러다가 의식을 잃으면 기껏 얻은 마력이 갈 곳을 잃은 채 연기처럼 사라질 거다.

그게 아니면 마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갈기갈기 찢겨 죽고 말 게 분명하다.

‘살아야 해! 아직은 죽을 수 없어!’

그때 성현의 의식 속에 마법사가 나타났다.

검은 갑주를 입은 그가 절그럭절그럭 성현의 앞으로 다가왔다.

마법사가 성현을 향해 말했다.

-내가 지금껏 너를 보며 느껴 온 게 있다.

‘헛소리할 거라면 꺼져.’

마법사는 틈만 나면 성현의 의식을 차지해 그 몸까지 얻어 내려 한다.

지금도 그런 거다.

성현이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이곳에 나타나 혓바닥을 움직이고 있다.

‘꺼지라고!’

하지만 마법사는 성현의 외침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내 목표가 끝나면 스스로 사라질 거다. 그런데 넌 네 목표를 이룬 뒤에 뭘 할 생각이지? 할 게 있는 가?

그 목소리가 성현의 마음을 흔들었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거다.

지연우를 죽이면, 플로르를 죽이면, 교를 망가뜨리면 그리고 존재를 없앤 다음은…… 뭘 하지?

죽어도 상관없다.

하지만 사는 것은 다른 의미다. 오히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두려웠다.

-넌 이미 평화로운 세상에 어울리지 않아. 그때가 되면 지금을 떠올리며 그리워할 거다. 싸울 상대를 찾고 죽이고 싶어 하겠지. 그리고 미쳐 버릴 거야. 지금의 나처럼, 예전의 나처럼.

‘……!’

-어차피 광인이 될 거라면, 지금부터 미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다 죽여라. 나에게 맡겨라. 그럼 세상을 없애 주마.

그런데 그때 지르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뭘 하나 했더니, 망령이 돼서도 이 짓을 하고 있었어?

성현과 마법사의 시선이 틀어졌다.

그곳에 지르힐이 보였다.

창고에서 보는 것처럼 눈동자만 떠 있는 게 아니다.

코어의 기억 속에서 봤던 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지르힐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미치라고? 잘못 판단했네, 얘는 이미 미친놈인데.

-지르힐!

-그리고 걱정하지 마. 그때가 와도 얘는 또 그 세상에 잘 적응할 거야. 미친놈이니까.

듣다 못한 성현이 말했다.

“저기…… 미친놈, 미친놈 그 말 좀 그만 해 줄래?”

지르힐이 성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성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대는 미쳤어. 처음부터 죽기 위해 살았어. 세상에 죽기 위해 사는 생명이 어딨니? 그러니까 모든 게 끝나면 살아, 열심히. 죽고 싶다는 마음은 네 생각이 가진 한계일 뿐이야. 그 벽을 앞에 두고 주저하지 마. 넘어가면 행복할 거야.

성현은 눈을 깜빡였다.

성현이 가진 미래의 기억은 종말이었다.

세상의 마지막이다.

그 기억을 토대로 살고 있다.

그런데 종말을 넘어서면…….

‘행복할 거라고?’

어쩐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종말을 넘어선 그 뒤를 보고 싶은 마음이 커졌다.

동시에 꽈아아아앙! 무의식의 벽에 쩍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성현은 그 벽을 향해 다가갔다.

가볍게 손을 댔다.

동시에 벽이 와르르르 무너지며 두 번째 무의식의 벽이 열렸다.

멈춰 있던 마력이 열린 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갔다.

그리고 두 번째 무의식의 공간은 넓었다.

그 많은 마력이 쏟아져 들어갔지만 고작 성현의 발목 정도를 채우는 게 전부였다.

태풍이 온 것처럼 파도치던 마력이 그 안에 들어가며 잠잠해졌고 평화를 찾았다.

* * *

잠시 후, 성현은 사막의 모래에 앉아 서은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서은서가 알몸으로 나올 것을 대비해 몸에 걸칠 로브도 준비해 뒀다.

그리고 조용한 눈으로 사막의 끝을 바라봤다.

그렇게 시간이 더 지났을 때, “꺅!” 소리와 함께 서은서가 나타났다.

예상했던 대로 알몸이었다.

옷이 모두 타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카디르버는 옷을 챙겨 줄 정도로 섬세한 존재가 아니었다.

“걸쳐요.”

성현이 눈을 감은 채 로브를 건넸다.

“봤……죠?”

“아뇨, 혹시 몰라서 계속 눈감고 있었어요.”

“하…… 감사합니다.”

서은서는 얼굴을 붉히며 로브를 걸쳤다.

성현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서은서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훨씬 강해졌네요. 기운만 보면 다른 사람인 줄 알겠어요.”

“감사해요.”

서은서가 대답하며 성현을 살폈다.

자신이 이만큼 강해졌는데 성현은 얼마나 더 강해졌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확인해 보고 싶었는데…….

‘어?’

그녀의 눈에 성현은 전혀 강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해진 것 같다.

‘마력이 안 느껴져…….’

계약자라면 아무리 약해도, 마력을 숨긴다 해도 기본적으로 그 기운이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성현은 아니다.

존재와 계약하지 않은 일반인처럼 느껴졌다.

“저, 저기…….”

서은서가 주저하며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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