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지금껏 시야에 들어왔던 모든 풍경이 거짓말인 것처럼 사라졌다.
아래와 위, 좌와 우가 모두 시커먼 어둠으로 채워진 공간.
모두 마른침을 삼켰다.
공간의 끝에서부터 천천히 몸을 죄여 오는 마력은 순수한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모두는 오한이 온 것처럼 몸을 떨기 시작했다.
미지의 힘, 압도적인 마력의 앞에서 보잘것없는 자신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힘은 드넓은 우주에서 보면 먼지만도 못하다.
아니, 존재의 가치도 없다.
그런데 그 알량한 힘을 가졌다고 얼마나 목에 힘주고 있었나.
그들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왕이 귀한하시니, 모두 무릎을 꿇어라. 명령을 받들지 않는 자의 생명은 앗아 가실 것이니.
공간을 울리는 습한 목소리에 자신들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급기야 “아…….” 하고 신음을 흘리는 계약자도 나타났다.
하지만 성현은 달랐다.
긴장은 했지만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성현은 언제나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 싸워 왔고 이겨 왔다.
그 자신감이 지금 두 다리로 서 있을 수 있게 해 줬다.
그 덕에 힘에 굴복해 무릎을 꿇는 비참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자를 상대로 지금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성현이 숨을 내뱉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플로르의 지시를 받고 쫓아온 수백의 계약자와 열다섯의 존재는 모두 무릎을 꿇고 있다.
하지만 서은서는 다르다.
이런 상황을 몇 번 경험해 봐서 그런지 떨리는 다리를 참으며 굳게 서 있다.
그리고 꼬마, 그는 멍한 눈으로 공간의 끝을 보고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억겁의 시간동안 기다려 왔던 아버지가 어떤 모습일지 긴장된 시선으로 기다리는 중이다.
‘서은서와 꼬마의 도움은 받을 수 있겠네.’
성현이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머릿속에 들리는 시스템 알림음에 귀를 기울였다.
-본격적인 퀘스트가 시작됐습니다. 이제 카심의 망령을 찾으세요.
‘카심은 곧 나올 것 같은데, 바로 가면을 주나?’
생각과 동시에 시스템 알림음이 대답했다.
-글쎄요. 찾을 수 있을까요?
코어에 다녀온 뒤로 시스템 알림음의 대화법이 조금 바뀌었다.
조금은 싸가지 없게, 때로는 인간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시스템 알림음을 갖고 뭐라 할 시간은 없다.
지금은 카심을 만나야 한다.
성현이 펜던트를 뜯어 모든 마력을 개방함과 동시에 땅을 박차며 공간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서은서는 물론 꼬마가 말릴 틈도 없었다.
쉬이이이익!
공간의 끝에는 검은 연기가 일렁이고 있었고 그 안에는 눈동자 하나가 보였다.
카심의 망령이었다.
카심의 망령은 멀리서부터 달려오는 성현의 기운을 느끼며 조금은 당황했다.
카심의 망령은 억겁의 시간 동안 왕가의 계곡에서 지내 왔다.
그 시간 동안 이곳을 침범한 생명체의 숫자는 일일이 세기도 어려울 정도였고, 뫼비우스의 공간을 통과해 여기까지 내려오는 것은 극소수였다.
게다가 지금껏 모든 생명체는 해골 병사의 선에서 끝났다.
아니, 이곳까지 왔어도 카심의 마력을 느끼면 얼어붙어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이 공간에 들어온 게 수백.
심지어 성현은 카심의 마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어둠을 헤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그 기운을 느끼던 카심은 분노에 사로잡혔다.
-내가 비록 코어를 받지 못했고 얼어붙은 사막에서 사망하며 군주가 되지 못했지만 나는 위대한 왕 중 하나. 하찮은 생명체가 병장기를 들고 뛰어올 정도로 허접한 왕이 아니다.
카심의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곧 검은 마력이 그 눈동자에 흡수되며 거대한 거인의 모습이 만들어졌다.
높이만 3미터.
온몸이 검다.
눈동자와 이빨만 허옇게 보인다.
그렇게 신체를 구성해 낸 카심이 주먹을 쥐며 포효했다.
-카아아아악!
공간의 끝을 향해 달려오던 성현이 그 포효를 들었다.
그런데, 그 포효 자체가 공격이다.
공기가 흔들리며 엄청난 음파로 성현을 향해 쏘아지고 있다.
성현이 다급히 창을 들어 포효를 막아 냈다.
쩌어어엉!
성현의 몸이 흔들렸다.
먼 곳에서 내지른 소리만으로 두어 발자국 밀릴 정도였다.
‘제법.’
성현은 모든 마력을 개방한 상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밀려 버렸다.
‘다시 간다.’
성현의 눈이 번뜩였다.
허벅지에 힘을 주며 자세를 한껏 낮췄다.
그런데, 그 순간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공기가 지금과 달라진 거다.
성현은 마치 물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을 받았다. 움직임이 둔해졌고 숨을 쉬는 것도 힘들다.
-모든 공간을 카심이 장악했습니다.
시스템 알림음의 친절한 설명과 함께 머릿속에서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외쳤다.
-몸을 내놓으라. 너는 카심의 상대가 될 수 없다. 내게 넘기면 당장 카심을 소멸시켜 주지.
‘아, 죽일 생각은 없어.’
성현은 마법사의 말을 거절했다.
카심이 훨씬 강한 것은 안다.
성현은 그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은 거다.
-그러다 죽으면? 너도 이곳에서 해골 병사가 되어 카심을 지킬 생각인가?
마법사의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성현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죽을 생각도 없고.’
그 생각과 동시에 성현의 앞에 카심이 나타났다.
우두커니 서서 성현을 내려다봤다.
-무릎을 꿇어라.
성현의 입술이 뒤틀어졌다.
‘변했을 것은 예상했지만…….’
기억 속에서 봤던 카심은 왕자였지만 무릎을 꿇으라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다.
모든 것을 내려 두고 병사들과 함께했다.
술자리가 끝나면 직접 접시를 치웠고, 쓰러진 성현의 옆에서 간호를 했다.
카심에게 권위적인 모습은 없었지만 카심의 병사들은 진심으로 그를 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눈빛부터 고압적이다.
나라를 지키지 못했다는 기억, 마지막 왕이라는 치욕, 죽어서도 자신을 지키는 불쌍한 병사들.
그 모든 것이 얽힌 자격지심.
카심은 권위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망령이 되었다.
“이것도 플로르의 욕심으로 생긴 일이란 거지.”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플로르의 탐욕, 그 나비효과가 이들을 이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플로르는 반성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 탐욕의 끝을 보기 위해 신이 되려 하고 있다.
“플로르는 반드시 죽여야겠어.”
그때 카심이 버럭 외쳤다.
-무릎을 꿇라!
그 말과 함께 성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카심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감히…….
보잘것없는 생명체가 싸움을 건다는 것이 같잖게 생각됐다.
이곳은 왕가의 계곡이다.
군주와 어머니도 함부로 들어오지 않는다.
이 공간 전부가 카심의 망령이기 때문이다.
의미는 다르지만 그나마 쉽게 예를 들자면, 이곳은 카심의 배 속이자 정신세계 같은 곳.
그래서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성현이 어디에 있는지, 이곳에 들어온 자들이 몇 명이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카심이 손을 뻗었다.
그 손에 뛰어오던 성현의 목이 잡혔다.
“컥!”
성현이 외마디 비명을 지를 때, 카심은 돌멩이를 집어 던지듯 성현을 땅에 내동댕이쳤다.
꽈아아앙!
그리고 광기 어린 눈동자로 고통스러워하는 성현을 노려보며 발을 들었다.
꽝! 꽝! 꽝!
사정없이 성현을 짓밟았다.
-꿇라! 무릎을 꿇고 나를 존경하라! 너 따위가 올려다볼……!
성현은 카심에게 밟히며 의식이 깜빡거리는 것을 느꼈다.
확실히 수준 차이가 크다.
하지만 지금 카심의 행동으로 성현은 알아챈 게 있었다.
‘기술이 없어.’
카심은 망령이다.
그저 기억과 분노를 갖고 있을 뿐이다.
마력과 힘으로 성현을 억누르려 한다.
그래서 수준의 차이는 컸지만 빈틈을 노리면 가능성이 보인다.
성현은 마구잡이로 짓밟히는 도중에 창을 손에 쥐며 중얼거렸다.
‘단도.’
창이 작아지더니 칼의 모습으로 변했다.
성현은 놈의 발길질을 피하며 데구루루 굴렀다.
그리고 벌떡 일어나며 카심을 향해 뛰어들었다. 허공으로 뛰어올라 칼을 휘둘렀다.
‘됐어.’
날카로운 단검의 끝이 카심의 살결에 닿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스르르륵, 카심이 사라졌다.
‘어디?’
성현이 땅에 발을 대며 카심의 기척을 살폈다.
‘뒤!’
성현의 뒤에 카심이 섰다.
파파파파팡!
카심의 주먹이 엄청난 속도로 성현을 난타했고 성현은 단검을 방패로 바꾼 후 몸을 가렸다.
하지만 쾅! 쾅! 쾅!
카심의 주먹을 몇 번 맞으며 방패가 찌그러지기 시작했다.
‘젠장!’
성현이 방패를 다시 창으로 바꿔 카심을 향해 찔렀다.
* * *
지르힐은 성현과 카심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0.1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수십 가지의 공방이 벌어지는 중이다.
그리고 그 싸움을 보던 지르힐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걸렸다.
‘이 싸움으로 더 강해지겠구나.’
지르힐은 성현의 위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다.
카심의 망령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망령이 성현을 죽이려 했다.
하지만 성현과 싸우던 중 망령은 마법사의 기운을 느꼈다.
‘죽기 전에 봤다지?’
카심이 죽기 전에 봤던 것, 마법사가 아들과 함께 찾아오던 모습.
카심이 망령이 되면서까지 기다리던 마법사다.
성현을 죽일 이유가 없다.
지금 싸우는 것은 하나, 자식을 찾아와 준 것에 대한 답례, 싸움을 통해 성현을 성장시켜 주려는 거다.
카심의 그 마음이 지르힐에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런데…….’
카심과 성현의 싸움을 지켜보던 지르힐이 눈을 찌푸렸다.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지르힐은 성현에게 스킬을 가르쳐 준 기억이 없었다.
스킬을 쓰려면 계약된 존재가 뭔가를 해 주고 배움의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성현은 제멋대로 쓰고 있었다.
지금도 먹구름을 끌고 와 번개를 떨어드리고 있다.
지르힐이 눈을 가늘게 뜨고 성현을 지켜봤다.
‘……넌 대체 누구냐?’
* * *
그 시각, 플로르의 성.
플로르는 다리를 외로 꼰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옆이 트린 치마를 입고 있었기에 허연 속살이 훤히 드러나 있지만 그걸 신경 쓰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모든 신하는 얼어붙은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왕가의 계곡으로 보낸 그들의 계약자, 카심의 마력에 겁을 먹은 그들의 모습을 플로르가 봤기 때문이다.
‘미치겠네…….’
신하들은 인상을 구겼다.
이 상황은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플로르가 직접 계약자들에게 길을 안내했고 보상까지 제안했다.
하지만 계약자들은 허접한 모습을 보였으며 급기야 무릎까지 꿇었다.
‘젠장.’
신하들은 지금부터 받을 벌을 떠올리며 뻣뻣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꽉 다물었다.
그런데 플로르의 입에서 예상과 다른 말이 흘렀다.
“유성현의 목적지가 어디라고 생각하느냐?”
“……네?”
“왕가의 계곡이 끝은 아닐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신하들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가 한 신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유성현은 극단적인 행동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혹시…… 왕가의 계곡 너머에 있는 소멸의 바다가 아닐까 싶습니다.”
플로르가 붉은 입술을 쓸었다.
‘소멸의 바다, 거기에 뭐가 있지? 설마 에느가인이 그곳에 있는가?’
그렇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플로르가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서, 설마 마법사의 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