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성현은 세트리아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종말의 어머니 플로르의 딸이며 어지간한 군주나 어머니보다 강하다.
특히 그녀는 살생 그 자체를 태어난 것 같은 성격을 갖고 있다.
몸에서 피어오르는 살기가 심각할 정도로 사나웠고 공간을 지배하는 마력은 모두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성현과 카심을 제외한 모든 계약자와 열다섯의 존재는 손끝부터 심장까지 발발 떨며 의지와 상관없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세트리아니가 모두를 살펴본다.
그녀는 이 상황을 즐기며 잠시 후 있을 미식의 순간을 상상했다.
겁을 집어먹은 자들의 근육은 뻣뻣하게 굳어 있다.
그 질긴 근육을 찢어 먹는 맛.
세트리아니가 입맛을 다시며 입을 열었다.
“누구부터 죽여 줄까? 난 여기에 있는 놈들을 살려 둘 생각 없어.”
“……!”
계약자들이 눈을 번쩍 떴다.
그들은 세트리아니가 플로르의 딸인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세트리아니가 아군이라고 생각했는데.
‘살려 둘 생각이 없다고?’
당황한 그들의 눈을 보며 세트리아니가 사뿐사뿐 걸었다.
“착각했나 봐? 여기에 내 계약자는 없잖아? 그런데 내가 왜 살려 두겠어? 이렇게 맛이 좋을 것 같은 고기가 한가득인데.”
“……!”
세트리아니가 플로르에게 지시받은 것은 오직 하나.
‘유성현을 죽여라.’
다른 존재의 계약자를 살려 두라는 거추장스러운 지시는 없었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면 다른 존재의 전력이 떨어진다는 거잖아?”
“……!”
“그런데 내가 너희를 살려 둘 이유가 있을까?”
계약자들이 입술을 씹을 때였다.
세트리아니가 천천히 시선을 틀어 카심을 향했다.
“오랜만이야.”
-……날 아는가?
카심의 반응에 세트리아니가 눈을 반짝였다.
“어마? 날 잊어버린 거야? 아니면, 워낙 오래돼서 얼굴도 기억 못하나? 나야, 나.”
세트리아니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카심은 모르는 눈치다.
카심은 세트리아니의 얼굴을 세세히 뜯어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다.
-……누구지?
“아, 넌 날 모르겠구나. 아니, 모르는 게 당연하지. 미안. 네가 죽고 왕국이 무너진 것은 알지? 그때 선봉에 섰던 게 나야. 네 아내의 하반신을 벗겨 병사들에게 던져 줬고…….”
세트리아니가 분노로 차오르는 카심의 눈빛을 보며 깔깔 웃었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왜 그래? 전쟁이란 원래 그런 거잖아? 몰락한 왕가의 왕비가 편하게 죽을 수 있다고 착각한 거야?”
세트리아니는 일부러 카심을 자극하는 중이었다.
카심이 흥분해서 날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세트리아니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온전한 카심을 상대로 싸우면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
‘그 위기 상황에서…….’
유성현이 어떤 변수라도 일으키면 자칫 최악의 순간이 일어날 가능성도 존재한다.
세트리아니는 승리를 위해 단 하나의 변수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카심을 자극했고 흥분해 날뛰는 사냥감을 죽이는 것은 갓난애의 팔을 비트는 것보다 쉬운 일.
하지만 세트리아니의 의도는 실패했다.
카심은 넘어가지 않았다.
분명 분노했지만 꾹 참고 있다.
세트리아니의 의도가 빤히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내가 욕보이고 있었지만 싸움에서 감정이 우선되는 순간 필패다.
그러자 세트리아니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통하네.’
세트리아니의 시선이 이번에는 성현에게 틀어졌다.
그런데 성현도 마찬가지.
표정에 어떤 동요도 없다.
성현은 담담히 세트리아니를 지켜보며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계획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상대야.’
세트리아니는 지난번 싸운 나모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나모르 정도는 가볍게 찢어 죽일 거다.
그런데 이곳의 전력은 계약자 몇백 명과 최하위 존재 열다섯.
나모르를 상대로 수천 명의 계약자가 토벌대로 나섰던 것을 떠올리면, 지금의 전력으로 세트리아니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이곳엔 카심이 있다.
카심과 힘을 합치면 이길 가능성도 존재한다.
비록 코어를 받지 못해 군주가 되지는 못했지만 이곳은 왕가의 계곡.
이 모든 곳이 카심의 배 속과 같다.
‘가능할까?’
협력해서 싸우려면 호흡이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가 서로의 전투를 방해하며 졸전을 벌이다가 죽을 수도 있다.
1+1은 꼭 2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다.
성현이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세계 랭커 유리안 드 레이는 어금니를 씹고 있었다.
머릿속에 계약한 존재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의지를 집어넣고 있었다.
-네가 세트리아니의 지시를 받을 필요는 없다.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다. 일어나라. 정면으로 상대를 응시하라. 넌 나의 계약자다.
유리안 드 레이가 계약한 존재 역시 플로르의 딸.
그런데 그 딸은 세트리아니가 실패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플로르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유는 존재끼리의 서열, 복잡한 그들의 정치 싸움이었지만 유리안 드 레이가 거기까지 생각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머릿속에서 울리는 존재의 메시지에 집중할 뿐이다.
-유리안 드 레이, 내가 너에게 힘을 주마.
그 말과 동시에 유리안 드 레이의 허벅지에 핏줄이 솟아올랐고 몸에는 마약 같은 마력이 꿈틀댔다.
그 마력은 유리안 드 레이의 판단력을 흐리게 했다.
-공포를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주마. 세트리아니를 죽여라. 그럼 난 너에게 인간이 느낄 수 없는 한계 이상의 쾌락을 약속하리라.
존재의 목소리는 말초신경을 자극했고 유리안 드 레이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리안 드 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카심과 대화를 나누는 세트리아니가 보였다.
‘지금이라면…….’
유리안 드 레이의 머릿속에 ‘공포’라는 이름의 단어는 사라졌다.
오직, 세트리아니를 죽인 후 얻을 쾌락에 침을 질질 흘렸다.
그리고 기습 공격에 성공하면 이길 수 있다고 여겼다.
‘할 수 있어.’
유리안 드 레이가 세트리아니를 향해 튀어 나갔다.
‘죽어라!’
세트리아니가 카심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를 노린 기습.
손에 쥔 칼이 거세게 흔들리더니 수십 개의 잔영을 보였다.
촤라라라락!
갑작스러운 공격에 세트리아니가 눈을 크게 떴다.
* * *
플로르의 성.
플로르의 아홉 딸 중 여덟 번째 딸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플로르 몰래 자신의 계약자 유리안 드 레이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중이었다.
메시지는 다른 존재가 볼 수 없다.
메시지를 보내는 과정만 숨긴다면 완벽 범죄가 되는 거다.
그리고 모든 메시지를 보낸 후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다행히 플로르는 어떤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일렁이는 연기를 통해 전투 상황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다가 유리안 드 레이가 튀어 나가는 것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저놈의 계약 존재가 누구지?”
여덟 번째 딸이 곧바로 대답했다.
“제 계약자입니다.”
“왜? 세트리아니를 공격하는 게냐?”
“죄송합니다. 제가 메시지를 보내 말리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세트리아니가 전부를 죽인다 한 말이 자극이 된 모양입니다. 자신은 살고 싶다 전했습니다. 공포를 이기지 못한 것 같습니다.”
“됐다. 어차피 인간 하나의 발버둥이다. 저런 놈은 세트리아니에게 어떤 피해도 입힐 수 없다.”
여덟 번째 딸은 고개를 숙이며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내뱉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데 여덟 번째 딸은 고개를 숙인 채 웃고 있었다.
‘그래, 유리안 드 레이는 세트리아니에게 죽을 거야. 하지만 지금의 공격으로 세트리아니에게 빈틈은 만들 수 있지. 그 빈틈을 이용해 유성현이나 카심이 공격한다면……?’
여덟 번째 딸의 음모로 가득한 눈빛이 힐끗 플로르를 향했다.
* * *
유리안 드 레이의 칼이 세트리아니에게 쏘아지고 있었다.
촤아아아악!
그런데 놈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세트리아니만이 아니었다.
성현도 깜짝 놀랐다.
인간의 힘에 비하면 세트리아니는 신에 가깝다.
보통은 가만히 있다가 죽는 게 일반적.
아무리 세계 랭커라 해도 처음 세트리아니 같은 존재를 만나면 심장이 굳어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성현은 유리안 드 레이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성현은 놈의 계약 존재가 누구인지 안다.
그리고 놈이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 뒷배경에는 반드시 그 존재의 손길이 있다고 판단했다.
‘플로르 성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나?’
성현이 마른 입술을 핥았다.
‘어쩌면 이용할 수도 있겠어.’
성현의 머릿속에 계획 하나가 더 추가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획을 잠시 미뤄야 한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세트리아니를 없애는 것.
‘저놈은 죽을 거야. 하지만 그 순간 세트리아니에게서 빈틈이 보이겠지.’
성현은 창을 꽉 쥐고 유리안 드 레이가 죽는 순간을 기다렸다.
‘조금만 있으면…….’
성현은 앞으로의 전투 상황을 예측했다.
세트리아니는 유리안 드 레이의 칼을 피하고 뒷걸음질 친 후에 병장기를 뽑을 거다.
그다음의 결과는 뻔하다.
유리안 드 레이의 죽음이다.
그런데.
‘어?’
유리안 드 레이의 검에 세트리아니의 어깻죽지가 죽, 갈렸다.
“끼아아악!”
세트리아니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유리안 드 레이는 세트리아니를 놓치지 않고 쫓았다.
땅을 박차며 세트리아니를 향해 파고들었다.
놈의 검이 빠르게 좌와 우, 허공을 가르며 세트리아니를 난도질한다.
촥! 촥!
세트리아니가 피하려 했지만 무리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성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지?’
저 몸놀림은 회귀 전 봤던 세트리아니가 아니다.
‘이게 세트리아니라고?’
급기야 촤아아아악! 세트리아니의 뱃가죽이 찢겼다.
붉은 드레스에 핏물이 뚝뚝 떨어지며 내장이 쏟아진다.
세트리아니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자신의 내장을 잡으며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유리안 드 레이는 멈추지 않았다.
빈틈이 보이면 당연히 죽여 없애야 한다고 배워 왔다.
쉬이이이익!
칼을 휘둘러 세트리아니의 팔을 베었다.
빙글 몸을 틀며 그녀의 다리까지 베어 냈다.
비틀비틀 흔들리는 세트리아니를 보며 유리안 드 레이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유성현! 마녀를 죽였다고? 군주를 죽였다고? 존재는 별것 아니었어! 하하하하!”
유리안 드 레이는 자신의 몸에 용솟음치는 마력에 중독됐다.
지금 힘이면 세계 상위 랭커도 짓밟아 죽일 수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핏발 선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는 세트리아니를 향해 더 빠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성현은 지금의 전투를 보며 결론 내렸다.
‘가짜야.’
상대가 보잘것없는 존재라 해도 존재는 존재.
유리안 드 레이에게 이 정도로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상대는 플로르의 딸 세트리아니다.
저 우스운 몸짓은 분명 가짜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았다.
미친 것처럼 달려들던 유리안 드 레이의 앞에 또 다른 세트리아니가 나타났다.
이어서 세트리아니가 활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좋았어?”
유리안 드 레이의 눈이 기겁했을 때다.
세트리아니가 팔을 뻗어 유리안 드 레이의 머리에 손을 쑤셔 넣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세트리아니의 손이 유리안 드 레이의 머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세트리아니가 손을 뽑자 유리안 드 레이는 풀썩 쓰러졌다.
유리안 드 레이는 허무할 정도로 즉사했다.
세트리아니가 피 묻은 손을 툭툭 털며 붉은 입술을 움직인다.
“내가 당하는 모습을 보여 주면 협공할 줄 알았는데, 나름 머리는 돌아가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