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성현과 카심은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 시작될지 모를 세트리아니의 공격에 대비하여 자세를 낮추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세트리아니는 성현과 카심을 공격하지 않았다.
붉은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몸을 틀었다.
그리고 아직 무릎을 꿇고 있는 계약자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세트리아니가 다가오는 것을 본 계약자들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죽음이 가까이 오는 것을 느낀 거다.
그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침음을 흘리는 자, 눈물을 흘리는 자, 어떤 자는 파리처럼 손을 비볐다.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세트리아니는 그들을 살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너희를 마지막에 죽이려 했는데, 계획이 바뀌었어.”
처음 세트리아니에게 계약자들은 관심 밖의 상대였다.
하지만 유리안드레이에게 기습을 당한 후 생각이 변했다.
성현과 카심을 상대하기 전에 계약자들부터 죽일 생각이다.
아무리 개미보다 못한 인간이라 해도 저들은 살아 있는 생명체.
“나비 1마리가 일으킨 날갯짓이 태풍을 일으킨다는 말이 있잖아?”
전투 중에 계약자들의 난입은 큰 변수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이들의 숫자는 몇백.
객체 하나하나의 돌발 행동을 생각하면 수천, 수만 가의 변수를 신경 써야 한다.
그런 신경을 쓰느니 지금 죽여 버리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세트리아니가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었다.
자신을 향해 벌레처럼 빌며 몸부림치는 인간들의 행동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이만 죽자.”
세트리아니의 손에서 손톱이 길게 뻗었다.
촤아아악!
세트리아니의 발밑에서 머리를 조아리던 남자의 목이 갈렸다.
남자의 머리가 툭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른다.
그저 학살.
그리고 살육.
의미 없는 비명 소리와 선명하게 드러나는 핏물.
세트리아니를 향해 목숨을 구걸하던 계약자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몸을 일으켜 검은 공간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그들이 도망치는 그 앞에 세트리아니가 서 있었다.
“어머? 도망치려고?”
주우우욱!
세트리아니의 손톱이 계약자의 뱃가죽을 갈랐다.
“쿨럭!”
계약자는 몇 발자국 더 움직이다가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자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내장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야.”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 할 수 없었다.
분명 유성현을 죽이라는 퀘스트를 받고 이곳에 왔다.
그런데 난데없이 카심이 나타났고 뜬금없이 세트리아니가 등장했다.
그리고 지금은 쏟아지는 내장을 바라보며 죽어 가는 중이다.
“젠장!”
계약자는 분했고 어딘지 모를 공간에서 죽어야 한다는 게 억울했다.
그래서 마지막 마력을 쥐어짜며 세트리아니를 공격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분노했다고 해서 세트리아니를 이길 수는 없다.
계약자가 팔을 휘저었지만 콰직! 세트리아니의 손이 계약자의 뱃가죽을 뚫고 반대편으로 튀어나왔다.
“컥!”
그게 끝이었다.
계약자의 숨은 끊어졌다.
세트리아니가 계약자의 몸에 쑤셔 넣은 손을 꺼냈다.
그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위가 들려 있었다.
잠시 위를 바라보던 세트리아니가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저 멀리 서 있는 카심을 바라보며 말했다.
“카심, 이 내장을 보니까, 네 아내의 마지막이 하나 더 기억났어. 어때, 얘기해 줄까?”
-…….
카심은 입을 닫고 있었고 세트리아니는 과거를 떠올리며 볼에 홍조가 올랐다.
“병사들이 네 아내를 범한 후, 내가 다가갔어. 네 아내가 말하더라고, ‘차라리 죽이라고’. 그래서 난 네 아내의 자궁을 적출했어, 살아 있는 상태에서. 궁금했거든, 언제까지 죽여 달라고 말할 수 있을지.”
세트리아니는 카심이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지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심의 몸은 후들후들 떨리는 중이었다.
도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참기 힘들었다.
세트리아니는 그 심경의 변화를 읽었고 더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결국 비명을 질렀고 애원하더라, 제발 살려 달라고. 일국의 여왕이라는 사람이 한심했어.”
-…….
“사랑하는 여자의 마지막을 얘기해 주는 내가 막 사랑스럽지 않아?”
하지만 카심은 끝까지 참았다.
눈을 감고 세트리아니를 외면했다.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세트리아니가 눈을 깜빡였다.
“와, 이것도 참는 거야? 나라면, 정말 찢어 죽이고 싶을 것 같은…… 어?”
그런데 그때였다.
성현이 튀어 나갔다.
쉬이이이익!
엄청난 속도로 세트리아니를 향해 달려간 후 곧장 창을 휘둘렀다.
파아아앙!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창끝이 세트리아니를 향했다.
하지만 세트리아니는 한발 물러서며 성현의 공격을 가볍게 빗겨 냈다.
성현이 창을 꽉 쥔 후 세트리아니의 좌우를 노렸다.
팡! 팡! 팡!
이어서 성현의 공격은 조금씩 속도가 빨라졌고 곧 창끝이 수백 개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났다.
파파파파팡!
그런데 세트리아니는 그 모든 공격을 상체를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해 냈다.
또렷한 눈으로 창끝을 지켜보며 싱긋 웃기까지 했다.
“고작…… 이 정도였어?”
급기야 비웃는다.
“조금은 기대했는데, 인간 주제에 나모르를 잡았다고 해서 어떤 돌연변이가 탄생했는지 궁금했는데, 기대할 것도 없네.”
성현은 세트리아니의 말에 대꾸할 시간도 없었다.
그저 공격을 하느라 바빴다.
하지만 세트리아니는 끝까지 느긋하게 성현의 고격을 피하며 계속 입을 열었다.
“그 잘난 마법사라는 것, 구경 한번 하고 싶은데, 안 되나?”
순간, 서은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그 말과 동시에 성현이 뒤로 물러섰고 그녀를 향해 수백의 마력이 쏘아졌다.
콰콰콰쾅!
세트리아니가 계약자를 죽이는 동안 성현이 서은서에게 말했다.
세트리아니를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계약자들을 설득하라고.
지금처럼 협공을 할 수 있도록.
서은서는 페이트 길드의 막내딸이고 그녀의 목소리에 계약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죽는 것보다 발버둥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계속!”
계약자들은 이를 악물고 마력을 쏟아 냈다.
저마다의 권능을 뿌리며 말 그대로 젖먹던 힘까지 끌어 올렸다.
“할 수 있어!”
검은 공간이 번쩍였다.
휘몰아치는 모래가 자욱했다.
포탄이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울렸다.
꽝! 꽝! 꽝! 꽈아앙!
성현을 쫓아온 열다섯의 존재도 필사적이었다.
* * *
그 시각, 세트리아니가 움직였다는 사실은 존재의 세상에 빠르게 전해지고 있었다.
각각의 세력의 어머니와 군주.
어떤 이들은 이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세트리아니라면 아홉 딸 중 하나가 아닌가? 그런 전력이 인간 하나를 죽이기 위해 왕가의 계곡으로 들어갔다고? 그게 말이 되는가?”
“플로르는 욕심이 많습니다. 분명 어떤 꿍꿍이가 있을 겁니다!”
“그 꿍꿍이라는 것은?”
“에느가인이 아닐까 합니다!”
에느가인이란 말에 군주는 입술을 씹었다.
“멍청한……. 실존하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은 에느가인 때문에 또 그 전쟁을 일으키려 하는가?”
군주는 눈을 감았다.
그는 세상이 한 번 멸망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도 플로르였어.”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이 상황을 기회로 여겼다.
“카심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체로 죽은 위대한 왕, 그래서 그 지역은 지금껏 중립 지역으로 내버려 뒀다. 그런데 플로르가 우리의 룰을 위반했다. 이것은 처단해야 할 일이며 내버려 둘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룰의 위반은 명분일 뿐, 이들은 사사건건 전쟁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존재들은 억겁의 시간을 살아오며 무수히 많은 자식을 출산하는 중이다.
드넓은 우주라 해도 이들의 영역에는 좁고 또 좁았다.
그런데 그 영역을 넓힐 순간이 왔다.
서로의 생각이 무엇이든 세상을 피로 물들 톱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 거다.
* * *
그리고 다시 왕가의 계곡.
10여 분이 지나자 시끄럽게 쏘아지던 계약자들의 마력은 바닥을 드러냈다.
그들이 지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제발…… 제발, 제발, 죽어 있어라.’
이들은 각국의 랭커다.
그것도 몇백 명.
아무리 플로르의 딸이라 해도 몇백 명이 쏘아 대는 마력을 견뎌 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들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결과는 뻔했다.
연기가 가라앉으며 일그러진 표정의 세트리아니가 보였다.
붉은 드레스는 찢어지고 타들어 갔으며 군데군데 상처도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치명상은 전혀 없다.
계약자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어 갈 때, 세트리아니가 자신의 몸을 툭툭 치며 소름 끼치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감히 공격을 해? 미쳤어? 편히 죽기 싫어? 난 나름대로 배려해 주고 있었는데.”
“…….”
“지금부터 너희는 고통을 느낄 거야. 손톱을 뽑고 그 위에 나사를 박아 주지. 정강이뼈를 뽑아서 옆구리에 꽂아 줄게. 너희는 지옥이 무엇인지 알게 될 거야.”
세트리아니의 말에 한 계약자가 울부짖듯이 외쳤다.
“우, 우리가 원해서 공격한 게 아니에요. 모두, 모두 저 여자가 시킨 일이에요!”
계약자는 서은서를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계약자들도 서은서를 가리킨다.
“맞아요! 저 여자예요!”
“공격하라고 그랬어요!”
서은서는 당황했다.
살기 위해 부탁한 것인데, 저들은 편히 죽기 위해 서은서를 팔고 있다.
인간이란 나약한 존재.
그 나약함의 틈새는 언제든 상대를 제물로 바칠 수 있는 거다.
그때 성현의 머릿속에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저런 자들을 구하려 하는 거냐? 이기적인 것들은 살아 있을 의미가 없다.
마법사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전부가 저런 것은 아니야.’
-그건 그렇고…… 세트리아니를 이길 수 있겠는가?
“지켜봐.”
성현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세트리아니는 강하다.
하지만 성현은 회귀자.
회귀 전, 세트리아니를 만난 적이 있고 그녀의 약점을 알고 있다.
물론 성현의 힘으로 그 약점을 파고드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일.
하지만 성현에게는 군주와 비슷한 권능을 쥐고 있는 카심이 있다.
그리고 계약자들이 세트리아니에게 마력을 쏟아부을 때, 성현은 카심에게 앞으로의 작전을 전했다.
약점을 알고 이뤄질 협동 공격.
이제야 1+1이 2가 되는 순간이었다.
성현의 시선이 다시 앞으로 옮겨졌다.
계약자들은 여전히 서은서를 탓하는 중이다.
“저 여자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위대하신 존재를 공격하는 일은 없었을 거예요!”
“저 여자는 인간 세계에서 꽤 큰 권력을 가진 딸이에요!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가족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어쩔 수 없었어요!”
“믿어 주십시오!”
서은서는 주먹을 꽉 쥐었다.
많은 인간 군상을 만나 봤다고 생각했는데 극한에 몰린 이기적인 자들을 상대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 외로웠다.
수백의 계약자들에게 둘러싸여 비난받는 일은 아무리 서은서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서은서의 옆으로 성현이 섰다.
그가 서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떻게 해 줄까요?”
“……네?”
“다 죽여 줄까요? 아니면 저 존재만 없애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