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서은서가 조용히 시선을 틀어 성현을 바라봤다.
“……제가 원하는 거요?”
“네.”
서은서는 잠시 침묵했다.
그녀는 계약자 전부가 죽여 없어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상대를 죽여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굳이 찾는다면 잠시의 쾌감과 우월감? 하지만 서은서에게 그런 감정은 관심 밖이다.
서은서는 모두가 무릎 꿇고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녀를 손가락질했던 그 모든 손이 영원히 자신을 찬양하고 비비기를 원했다.
하지만 솔직한 감정을 성현에게 전달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성격을 꾹 누른 채 성현의 곁에 있는 중이다.
성현에게 잘 보이고 싶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살려 줬으면 좋겠어요.”
일단 놈들의 목숨을 어떻게 할지는 잠시 후 생각하기로 했다.
지금은 계약자들이 문제가 아니다.
노골적인 살기를 뿜어내며 그들의 앞에 서 있는 세트리아니부터 해결해야 한다.
세트리아니가 성현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녀의 붉은 드레스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숨겨져 있어야 할 하얀 속살이 고스란히 노출된 상태다.
하지만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레스의 밑단을 북 찢어 버리며 움직이기 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성현을 바라보는 세트리아니의 눈빛에 어둠이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어.”
“더 보여 줄 것이 있다는 것인가? 방금 네 공격은 하찮았어.”
세트리아니가 뒷짐을 졌다. 산책을 나온 듯 성현과 카심의 주변을 돌며 말을 이었다.
“코어를 받지 못한 왕과 존재의 세상에서 추방된 지르힐과 계약한 계약자. 그리고 망령이 된 마법사.”
“…….”
“아, 마법사와 카심의 공통점이 있구나? 둘 다 아들을 잊지 못해 망령이 되어서까지 남아 있는 거잖아?”
세트리아니가 말을 잇는 도중이었다.
세트리아니의 눈에 채워진 어둠이 검은 불꽃이 되어 이글거리고 있었다.
이내 그 불꽃이 모습을 드러내 피어오를 정도였다.
세트리아니는 주변의 마력을 흡수해 자신의 마력을 끌어 올리는 중이었다.
최상의 컨디션으로 성현과 카심을 단번에 죽이기 위해서다.
성현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가만히 있었다.
카심도 마찬가지,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성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계약자들이 세트리아니를 향해 마력을 쏘아 댈 때, 성현이 조용히 다가와 말했었다.
“세트리아니가 마력을 모두 모을 때까지 무슨 말을 해도 참아.”
카심은 고개를 끄덕인 채 입을 다물고 있었다.
‘난 이제 여한이 없다.’
카심이 망령이 된 이유는 하나, 꼬마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꼬마를 만났고 늠름한 모습을 봤다.
‘이름만 지어 주면 세상을 떠나도 상관없다.’
카심은 아직 꼬마에게 이름을 지어 주지 못했다.
꼬마가 이름을 갖지 못하고 몰락한 왕가의 왕자로 불리는 이유다.
‘그 전에 저것을 죽여야겠지.’
카심은 세트리아니를 노려봤다.
세트리아니를 죽여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만난 아들의 주검을 봐야 할 수도 있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를 농락한 세트리아니에게.
‘반드시 죽인다.’
세트리아니는 카심의 몸에서 흐르는 살기를 느끼며 비웃었다.
“카심, 태초의 시간에는 위대한 왕이었던 자, 하지만 지금은 더러운 벌레와 같아.”
“…….”
“계속 놀아 줄 시간은 없을 것 같구나. 오라. 둘 다 상대해 주마.”
그 말을 끝으로 세트리아니는 몸에 가득한 기운을 느꼈고 살생을 저지르고 싶은 마음에 잠식됐다.
누군가를 죽이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었다.
찢어 죽인 후 그 피를 마셔야 타는 듯한 갈증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 생각만으로 쾌락과 활력이 느껴졌다.
그 감각이 비명처럼 흘러나왔다.
“오라고!”
동시에 성현의 모습이 스르륵 사라졌다.
세트리아니는 깔깔 웃었다.
“하! 다를 게 없잖아?”
아무리 빠른 속도로 움직인다 해도 성현은 인간이다.
보잘것없는 신체로 한계를 초월한 움직임을 보일 수 없다.
성현의 행동은 세트리아니의 눈에 고스란히 보였다.
‘느려!’
세트리아니의 손톱에 검은 연기가 일렁였다.
날카로운 손톱이 칼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손을 뻗어 성현의 가슴에 쑤셔 넣고 심장을 뽑아내면 된다.
‘죽어라.’
하지만 세트리아니는 성현을 향해 손을 뻗을 수 없었다.
뜬금없이 죽은 계약자가 일어나 세트리아니의 팔을 콱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보통은 갑작스레 시체가 움직이면 놀라야 한다.
그런데 세트리아니의 눈에 즐거움이 가득했다.
‘맞아. 이놈은 사체를 움직일 줄 알지?’
성현은 잡기술이 많다.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코너에 몰아넣고 사냥한다.
하지만 상대는 세트리아니였다.
뜯어먹을 게 생겼다는 기쁨에 오히려 깔깔깔 웃었다.
이어서 몸을 옆으로 틀며 성현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시체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시체의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른다.
하지만 세트리아니는 인간이 육회를 먹듯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계약자들은 더 기겁했다.
상상한 적도 없는 고어.
인간을 먹이로 생각하는 포식자.
광기 어린 눈빛으로 존재하는 생명 모든 것을 먹이로 생각하는 육식동물.
그게 세트리아니였다.
그렇게 세트리아니의 붉은 입술이 피로 물들었다.
그녀의 온몸은 시체의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세트리아니가 흉측하게 변해 버린 시체를 옆으로 던지며 입을 열었다.
“아직 나는 목이 말라. 네 피는 내 갈증을 해소해 줄까?”
“미친.”
“그럼, 이제 내가 간다.”
세트리아니가 움직였다.
파아아앙!
단 한 번의 도약.
순식간에 성현의 앞에 도달했고 원래의 의도대로 성현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그 순간이다.
세상이 일그러지더니 공간이 바뀌었다.
직전까지 있던 사방이 검은 세상이 아니다.
이곳은 뫼비우스의 공간, 왕가의 계곡 입구로 변해 버렸다.
성현을 공격하려던 세트리아니는 눈을 깜빡이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뭐지?’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피를 마시고 싶어 애원하던 갈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 설마…… 내 약점을 알아?’
세트리아니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플로르만이 알고 있는 자신의 약점.
그 외에는 누구도 모르는데, 성현이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깊은 생각을 할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세트리아니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심의 공격부터 해결해야 했다.
카심이 거대한 칼을 든 채 세트리아니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정말, 이게 약점이었나? 우습군.
세트리아니는 주변의 마력을 모아 이용하는 존재다.
갑자기 공간 이동이 되면 그동안 모았던 마력이 순식간에 흩어지고 찰나의 순간 나약한 존재가 되어 버린다.
그 순간을 이용하면 철저히 망가뜨릴 수 있다.
-이곳은 왕가의 계곡이며 나의 배 속과 같은 공간. 또 마력을 모아 봐라. 장소를 바꾸는 일은 일도 아니다.
세트리아니는 카심과 거리를 벌리기 위해 다급히 뒤로 물러섰다.
비록 마력이 없어졌다 해도 채워지는 시간은 짧다.
최고의 컨디션까지는 어려워도 일정의 수준까지는 금방 모을 수 있다.
하지만 세트리아니의 뒤에는 성현이 서 있었다.
“헤이?”
세트리아니가 눈을 부릅뜰 때 성현의 손에서 여러 갈래로 찢겨 나온 전기가 그녀를 향했다.
성현이 노리고 있던 순간이다.
막대한 마력을 모으고 있다가 텅 비었을 때의 상실감.
자신의 약점이 드러났다는 것에 대한 의문.
그 모든 감정이 합쳐졌을 때, 상대는 혼란스럽고 전투에 집중할 수 없다.
콰콰콰쾅!
세트리아니는 성현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 냈고 그녀의 입에서 고통으로 가득한 신음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현은 빠르게 그녀의 몸으로 파고들어 주먹을 뻗었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성현의 주먹에 묵직한 타격감이 느껴졌고 세트리아니의 몸이 휘어졌다.
그때였다.
-비켜!
카심의 목소리에 성현이 허리를 굽혔다.
카심의 거대한 칼이 세트리아니의 목을 노렸다.
세트리아니가 몸을 틀며 가까스로 칼을 피했다. 하지만 그 바람에 균형은 무너졌고 성현이 주먹에 또 복부를 가격당해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꽝! 꽝! 꽝!
연속적인 주먹질에 세트리아니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방금만 해도 성현과 카심을 씹어 먹을 것처럼 비웃던 그녀였는데, 지금은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갈비뼈가 부서지고 근육이 찢어질 것 같은 아픔에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입에서는 피까지 흐르고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을 짧았다.
세트리아니는 일정의 마력을 회복했고 온몸이 시커먼 연기로 뒤엎였다.
‘죽여 주마.’
세트리아니는 자신의 약점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카심이 언제든 공간을 바꿀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 전에 성현이든 카심이든, 둘 중 하나를 죽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죽이기 편한 것은 카심보다 인간인 성현이다.
‘타깃은 정했고.’
콰아아앙!
엄청난 소리와 함께 세트리아니가 뛰었다.
순식간에 성현의 앞에 도달했다.
가볍게 내지른 세트리아니의 주먹.
성현은 부채를 방패로 만들어 그녀의 공격을 방어했다.
쩌어어엉!
귀를 찢을 것 같은 소리와 함께 성현은 허공에 던져진 것처럼 날아갔다.
방패로 만들어 막았지만 그 충격이 고스란히 성현의 몸에 전해진 것 같았다.
“죽어!”
세트리아니가 성현을 향해 손바닥을 펼쳤다.
빛이 번쩍이더니 공간이 충격파를 받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동시에 그 파동이 성현에게 쏘아졌다.
콰르르릉!
성현은 빠르게 방패를 들어 막았지만 모든 충격을 빗겨 내기는 어려웠다.
뼈가 으스러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또다시 주르르륵 밀려야 했다.
하지만 세트리아니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어느새 성현의 앞에 도착한 세트리아니가 쉭, 손톱을 뻗었다.
성현은 몸을 좌우로 비틀며 세트리아니의 공격을 피해 냈다.
고도의 집중력.
세트리아니의 마력을 읽으며 언제 어떤 공격이 들어올지 예측해야 한다.
단 한순간이라도 집중을 잃으면 세트리아니의 손톱에 갈기갈기 찢겨 죽고 말 거다.
쉬이이익!
전투를 지켜보던 계약자들은 눈을 깜빡였다.
세트리아니의 마력이 방금보다 약해진 것은 그들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쳐도 성현의 몸놀림은 대단했다.
세트리아니의 공격을 물러서지 않고 얽혀 있다는 것 자체로 손뼉을 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생각했다.
‘어떻게 저럴 수 있지?’
단지 마력의 문제가 아니다.
초등학생이 고성능의 스포츠카를 손에 쥐었다고 해서 운전을 할 수 없는 것처럼 성현의 움직임은 놀라울 만큼의 경험이 쌓이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저 나이에?’
‘저게 가능해?’
물론 성현은 죽을 맛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세트리아니의 마력은 다시 높아지는 중이었고 성현의 신체는 점차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인간의 신체로 존재와 똑같은 속도로 계속 움직이기는 힘든 법. 게다가 신체 능력이 떨어지면 몸 곳곳에 섞인 제 각각의 마력이 폭주를 시작한다.
성현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났다.
조금 있으면 치명상을 입을 수도 있다.
‘어서.’
성현은 카심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신호를 느낀 카심이 곧바로 공간을 이동시켰다.
마력이 또다시 흩어졌다는 것을 느낀 세트리아니가 분노했다.
“아아아아! 이 치사한 새끼들아!”
“쏘리.”
성현이 들고 있던 방패를 휘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