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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73화 (173/252)

173화

* * *

카심은 세트리아니의 목에 칼을 꽂은 채 그대로 멎어 있었다.

원수를 죽였다 해서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아내는 살아날 수 없고 왕가는 몰락했으며 카심은 망령일 뿐이다.

아내는 고통 속에서 죽었고 아들은 억겁의 시간 동안 이름도 없이 이계를 떠돌았다.

그리고 카심과 함께했던 동료들 역시 아직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카심의 입에서 끄으으윽, 울음을 참는 신음 소리가 흘렀다.

칼을 잡은 손이 부르르 떨려왔다.

카심은 눈을 질끈 감고 현실을 외면하려 했지만 감긴 눈 속에서 지옥 같은 과거가 펼쳐졌다.

카심은 후회하고 있었다.

왜 왕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던 남신 게히얼을 위해 싸웠던 이유는 도대체 뭘까.

실패한 과거가 그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그의 거친 손 위로 작은 손이 올라왔다.

카심의 아들, 꼬마다.

꼬마가 망령이 된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는다.

카심의 시선이 꼬마에게 틀어졌다.

카심과 꼬마 사이에 대화는 없었다.

그저 서로 바라볼 뿐.

카심이 껄껄 웃었다.

지금껏 망령이 된 채 살아왔던 이유, 의미가 없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아들을 만났으니까.

카심이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잘 컸네. 엄마를 똑 닮았어.

“…….”

-그래, 이름을 지어 줘야지?

이름, 카심은 꼬마의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이곳에서 억겁의 시간을 보내왔다.

꼬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심이 천천히 말했다.

-너는 위대한 몬테라세 왕국의 왕.

카심은 죽었다.

자연스레 왕이라는 지위는 꼬마에게 전승되었다.

카심은 꼬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지만 꼬마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자신도 모르게 애처럼 울 것 같아서다.

카심은 담담히 말을 이어 갔다.

-네 이름은 ‘진 마이어 빈 압드 알 벨토르 델라 몬테라세’. 편히 마이어라 부르면 될 게야.

꼬마는 마이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카심의 앞에 무릎을 꿇고 최대한 울먹이는 목소리를 삼키며 입을 열었다.

“와, 왕국을 꼭 재건하겠습니다.”

꼬마가 카심에게 처음으로 전한 말, 그런데 카심은 고개를 저었다.

-원하는 것은 왕국의 재건이 아니다.

“……!”

-아들아, 행복하게 살아라. 가족을 만들고 네 가족을 위해 살아라.

카심이 옥쇄를 전해 주며 계속 말했다.

-이 옥쇄는 가보 정도로만 사용했으면 좋겠다.

카심의 후회였다.

보잘것없는 명예 때문에 전장에 나갔고 가족이 가장 힘들 때, 카심은 곁에 없었다.

카심은 그 덕에 비극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너에게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게 하고 싶지 않다.

그 말을 끝으로 카심의 모습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원했던 아들을 만났고 원수까지 갚은 상황, 카심의 망령은 떠나야 한다.

그게 룰이다.

꼬마도 카심의 모습이 희미해지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울지 않는다.

꾹 참으며 최대한 웃으며 꼭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보고 싶었어요.”

카심이 꼬마의 머리를 헝클더니 꼭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참으려 했던 눈물을 터뜨렸다.

-……나도 보고 싶었다.

잠시 후, 카심이 성현을 향해 다가갔다.

카심의 모습은 얼핏 보면 모를 정도로 투명해진 상태였다.

이제 미련 가득한 삶을 놓을 시간.

그 전에 성현에게 해야 할 말이 있었다.

-그래, 자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가?

카심은 죽기 전 꿈을 통해 성현을 본 적이 있다.

성현이 아들과 함께 찾아왔고 자신을 향해 무엇인가를 요구하던 모습.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성현이 무엇을 요구했는지 기억이 흐려졌지만, 그게 아니어도 뭐든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성현이 원하는 것은 충격적이었다.

“소멸의 바다로 가는 길, 알고 있지? 거기에 가고 싶거든.”

-……소멸의 바다?

그곳은 저승과 다른 개념의 공간.

들어가는 순간 성현 역시 소멸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성현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길을 알려 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찾아갈 거야. 하지만 가르쳐 주면 조금 더 편하게 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카심은 한숨을 내뱉었다.

왕가의 계곡에 소멸의 바다로 가는 문이 있다.

성현은 그걸 찾기 위해 이곳에 온 것.

하지만 카심은 그 문을 열어 주는 게 은인을 지옥에 밀어 넣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 마음을 읽은 성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으니까, 열어 줘.”

카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현의 눈빛을 보면 말려도 갈 것 같다.

그리고 방금 세트리아니와의 싸움을 생각해 보면, 성현은 소멸의 바다에서도 살아 돌아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심이 성현만 들을 수 있도록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땡큐.”

-다만, 다른 이들은 데려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그러려고 했어.”

-소멸의 바다에서의 1년은 이곳의 1초와 같으니, 자네가 돌아올 수만 있다면 저들은 그리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게야. 그리고 소멸의 바다는 시간조차 소멸된 곳이니 늙지도 않을 테고.

“좋은 정보네.”

성현은 잠시 “1초, 1년.”이란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카심에게 “잠깐만.”이라는 말을 남긴 채 서은서를 향해 다가갔다.

이곳에서 성현이 혼자 훌쩍 떠나거나 돌아오지 않으면 유일하게 걱정할 사람.

안심은 시켜 주고 떠나는 게 예의다.

서은서의 앞에 선 성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10분만 기다려 주겠어요?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서요.”

“어디요? 같이 가요.”

서은서가 서둘러 짐을 챙겼다.

하지만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10분요, 10분. 멀리 가는 것 아니니까 짐 챙기지 마세요.”

“네?”

“같이 가기는 좀 그래서요.”

“아…….”

서은서는 착각했다.

왕가의 계곡에 들어온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고 성현은 아직 화장실을 다녀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다녀오세요.”

성현은 서은서에게 인사한 후 이번에는 꼬마를 향했다. 그리고 다른 자들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를 전했다.

“10분이 지나도 내가 안 오면 그냥 가라.”

“네?”

이곳에서 10분이면 소멸의 바다에서는 600년, 죽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성현이 말을 이었다.

“남은 약이 있으면 좀 주고.”

꼬마는 성현이 소멸의 바다에 들어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가방을 뒤적여 한 움큼의 알약을 건넸다.

“단골이니까…… 서비스로 드릴게요.”

“땡큐.”

“그리고 나중에 사게 되면 그때도 서비스 좀 드릴 테니까.”

“그 말 잊지 마.”

“……네.”

성현이 빙긋이 웃으며 꼬마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마이어라는 이름, 괜찮네. 축하해.”

성현은 그렇게 카심의 옆에 섰다.

이제 떠날 시간.

카심이 성현의 어깨에 손을 댔다.

그리고 조용히 꼬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 아들아.

그 말을 끝으로 성현과 카심의 모습이 사라졌다.

성현과 카심이 사라진 공간에는 퍽퍽한 모래만 남아 있었다.

꼬마는 잠시 그 자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평생 보고 싶었던 아버지와의 만남과 이별.

모든 것이 모래와 함께 무너졌고 사라진 것처럼 여겨졌다.

“하…….”

꼬마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 냈고 짐승처럼 울었다.

서은서는 시선을 틀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방금 자신에게 삿대질했던 계약자들이 보였다.

‘10분?’

충분히 교육시키고도 남을 시간이다.

서은서가 그들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그들은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서은서와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눈을 마주치면 죽어.’

그것보다 인간의 세상으로 돌아가서의 일도 문제였다.

서은서는 페이트 길드의 딸.

이들이 아무리 랭커라 해도 가진 권력의 크기가 다르다.

게다가 페이트 길드는 독을 전문으로 사용하는 집단이다.

마음만 먹으면 이들이 평생 불안함에 떨며 살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데 서은서가 그들을 보며 상큼하게 웃고 있었다.

“고개 드세요. 괜찮아요. 저도 처음 존재와 싸웠을 때는 많이 무서웠어요. 그 심정 다 이해해요.”

상량한 목소리에 그들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될까요?”

“그럼요. 대신 앞으로 페이트 길드의 일을 한 번씩 도와주셨으면 해요.”

서은서가 힘차게 주먹을 쥐어 보이자 계약자들은 환호했다.

그들에게 지금 서은서는 날개만 없을 뿐 천사였고 성녀였다.

게다가.

“시장하실 텐데, 빵 좀 드릴까요? 물도 있고요.”

“네!”

그들은 페이트 길드가 왜 비난을 받는지 모르겠다며 서은서가 건네준 빵을 손에 들었다.

바로 먹지는 않았다.

비록 맥주는 없지만 빵을 통해 승리의 축배를 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든 사람의 손에 빵이 건네졌을 때, 그들은 약속한 대로 다 같이 한입에 베어 물었다.

그리고 그들은 오장육부가 녹아내리는 맛을 맛볼 수 있었고 곧 서은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열다섯의 존재들은 중얼거렸다.

“악마지?”

“어, 진짜 악마야.”

“지옥에서 나왔을 거야.”

그렇게 잠시의 소란이 지났을 때였다.

갑자기 ‘꽈아아아앙!’ 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이 번쩍이더니 하늘에서 마력이 쏟아져 내렸다.

“뭐, 뭐야!”

“피해!”

한 번에 끝나는 일회성 공격이 아니다.

계속해서 ‘꽝! 꽝!’ 하고 미사일이 폭격하듯이 쏟아졌다.

서은서와 계약자 그리고 각 존재들은 숨을 수 있는 곳을 향해 몸을 피했다.

미처 피하지 못한 자는 그 한 번의 공격에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갈기갈기 찢겼다.

주변으로 살점과 피 그리고 뼛가루가 파파팍 튀었다.

모래 먼지가 솟구쳤고 비명이 이어졌다.

그렇게 폭격이 끝났다.

거짓말처럼 조용해진 그곳에서 모두는 모래 먼지가 가득한 중심을 바라봤다.

일렁이는 그림자, 플로르의 여덟 번째 딸, 악귀라 불리는 올리비아였다.

온몸을 금빛 드레스로 휘감은 올리비아가 감정 없는 눈빛으로 세트리아니의 주검을 향해 다가갔다.

올리비아가 처참하게 찢긴 세트리아니의 사체를 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동생, 많이 아팠겠네?”

그리고 올리비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냉랭한 시선이 여기저기 숨은 자들을 살폈다.

“너희들도 많이 아프게 해 줄게.”

* * *

성현은 20여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사자 머리 동상 앞에 서 있었다.

이제 흐릿해질 때로 흐릿해진 카심이 말했다.

-이 입으로 들어가라.

성현은 코어를 꺼냈다.

코어는 카심의 말대로 사자 머리 동상을 가리켰다.

저 입으로 들어가면 드디어 소멸의 바다다.

카심이 입을 열었다.

-고맙다.

“몇 번을 말하는 거야.”

-몇 번을 말해도 모자라지. 정말 고맙다.

“카심, 그쪽은 썩 괜찮은 왕이었어. 꼬마…… 아니, 마이어도 그걸 알고 있을 거야. 그리고 약속 하나를 더 하지.”

-약속?

“플로르, 꼭 죽여 줄게. 내가 약속은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믿어도 좋아.”

이제 카심은 형태만 남아 있었다.

웃고 있는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거다.

그렇게 카심은 완벽히 사라졌다.

성현의 시선이 사자의 머리를 향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뚜벅뚜벅 그 안을 향해 걸었다.

동시에 사자의 울음소리가 난폭하게 들려왔고 성현이 들어가자 그 입이 콱 닫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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