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그런데, 그때.
-잠깐.
마법사가 성현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성현이 눈을 찌푸리며 마법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왜 그래? 네 갑주가 앞에 있다며? 빨리 찾고 싶은 것 아니야?”
마법사의 갑주를 찾는 것, 그것은 성현이 소멸의 바다라는 지랄 같은 곳에서 수십 년을 헤맨 이유 중 하나.
그런데 그 갑주를 앞에 두고 마법사가 시간을 끌려 하자 성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네 힘으로 이 섬의 주인을 이기기는 힘들다.
이 섬의 주인은 마법사의 갑주를 몸에 걸치고 있다.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갑주를 걸쳤다 해도 그 힘을 온전히 재현할 수는 없지만 성현이 우습게 볼 상대는 아니었다.
-그리고 갑주를 찾는다 해도 손에 쥘 수 없을 거다.
갑주는 비록 아이템이지만 스스로 주인을 선택한다.
마법사는 성현이 갑주를 손에 쥔다 해도 갑주가 성현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그냥 갈까?”
성현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법사의 걱정은 이해됐지만 상대가 강하다 해서 그냥 돌아갈 수는 없다.
싸워서 빼앗아야 한다.
그래야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그리고 성현은 바깥 세상에 있을 때보다 월등히 강해진 상태였다.
강한 상대와의 전투를 통해 그 힘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리고 주인을 선택한다는 아이템.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그것은 신이 직접 만들어 마법사에게 건넨 것이고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있으며 주인을 선택한다는 기물.
“그게 날 어떻게 생각할지는 직접 봐야 아는 것 아니야?”
-안 봐도 알고 있다. 일단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오라.
“여기서?”
성현이 무의식에 빠지면, 신체는 잠든 것처럼 무방비 상태가 된다.
마물이 나타나는 순간 목숨을 잃는 거다.
-잠시 바다로 이동하지.
뭍으로 내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또 바다로 가자니.
이해되지 않았지만 성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이런 식으로 말을 걸어온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다.
성현은 다시 바다로 향했고 부채를 뗏목으로 만든 후 그 위에 올랐다.
그리고 잠시 후 뭍에서 멀어지자 성현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다.
동시에 성현의 신체는 끈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뗏목의 바닥에 쓰러졌다.
성현은 마력을 보관하기 위해 두 번째 무의식의 벽까지 깨뜨렸고 이후 자유롭게 그 공간을 오갈 수 있었다.
그곳은 마력이 검은 물처럼 발목까지 차오른 공간.
찰박찰박, 성현이 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둘러봤다.
“왜 이곳에 오라고 한 거야?”
검은 물이 성현의 앞에서 꿀렁꿀렁 움직이더니 형체가 만들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매끄러운 검은색의 고무를 뒤집어쓴 인간의 모습.
마법사였다.
성현이 마법사를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호칭을 얻은 지 오래됐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 손에서 두꺼운 책이 스르륵 나타났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네가 내 권능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것은 극히 미미한 것, 인간에게 그 이상의 권한을 주어도 괜찮을지 고민했다.
더 말을 듣지 않아도 이 책이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마법사가 꺼낸 것은 ‘스킬 북’, 책에 있는 내용을 익히면 마법사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거다.
성현이 무심한 눈으로 책을 건네받은 후 촤르륵 펼쳤다.
존재와 계약을 했다 해서 바로 모든 권능을 사용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스킬 북을 통하거나 존재의 허락 또는 어떤 이벤트가 있어야 한다.
성현이 지르힐의 권능을 마음대로 사용하는 것은 회귀자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일 뿐, 보통은 지금과 같은 과정을 겪어야 했다.
책을 살펴보던 성현이 고개를 들어 마법사를 바라봤다.
“네 권능을 익히면 상위 존재와 싸워서도 이길 수 있나?”
성현은 소멸의 바다에 들어와 몇 배나 강해졌다.
쌓아 뒀던 막대한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거다.
하지만 최상위 어머니나 군주에 비하면 미물이나 마찬가지.
놈들과 싸워야 하는 성현을 비유하자면 바위에 던져지는 계란의 운명이다.
그래서 혹시나 마법사의 권능을 익히면 놈들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냉소적인 웃음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파리가 있다 해도 파리채에 맞으면 죽어야 하지.
“…….”
-너희는 너희가 사는 지구를 거대하다 말한다. 수백만 평의 땅을 보며 광활하다 표현한다. 하지만 우주에서 본 지구는 의미조차 없는 먼지와 같다. 너는 그곳에 사는 인간, 그 한계는 명확하다.
결국, 권능을 익힌다 해도 존재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가능성은 없다는 거다.
성현은 슬쩍 웃었다.
회귀 전만 해도 성현이 승리하는 것은 무량대수 분의 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성현은 벼랑 끝을 기어 왔고 그 가능성을 극단적으로 끌어 올렸다.
그리고 지금은 지연우 정도는 쉽게 박살 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지연우의 몸에 플로르가 강림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있어야 하지만.
그래서 성현은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가능성이 없다는 말은 믿지 않았다.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정하는 순간 나약해진다.
“알았으니까, 시작하자.”
성현은 마법사의 권능을 익히기로 결정했다.
성현의 당찬 목소리에 마법사가 슬쩍 웃었다.
-쉽지는 않을 거다.
“쉽게 살아온 인생이 아니라 상관없어.”
-책을 찢어라.
성현은 망설이지 않고 책을 찢었다.
동시에 책에서 여자의 목소리로 느껴지는 처참한 비명 소리가 흘러나왔다.
-꺄아아아악!
그리고 성현의 머릿속에 마법사의 기초적인 권능이 심겼다.
지금껏 성현이 사용했던 마법사의 권능은 죽은 자를 움직이고 핏물을 모아 던지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알게 되는 것은 달랐다.
상대의 피를 증발시켜 죽이는 마법, 상대의 피를 흡수해 체력을 회복하는 마법 등등.
성현은 마법사가 알려 준 기초적인 마법을 보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이거 내가 생각하던 마법은 아니잖아?’
평범하게 마법사의 기초적인 기술을 생각하면 파이어 볼 같은 거다.
하지만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가 가진 권능은 생각하면 할수록 악마에 가까웠다.
-익혔나?
“뭐, 그런 것 같아.”
-익힌 것과 활용하는 것은 다르지.
마법사가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그러자 검은 물처럼 보이는 마력이 일렁거리며 흉측한 외모의 중년인이 만들어졌다.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나모르다.
“……?”
-지금 네 수준으로 이 정도도 어려울 거다.
성현이 픽 웃었다.
“원래 이렇게 생겼었어?”
코어의 기억 속에서 봤던 나모르는 정말 미남이었지만 마법사가 끄집어낸 나모르는 미남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생각을 이어 갈 수는 없었다.
-단 한 대만 때릴 수 있다면, 다음 단계로 넘어갈 거다.
성현의 머릿속에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 마법사의 스킬을 사용해 나모르를 때려라]
-보상 1 : 마법사의 다음 스킬 북.
-보상 2 : 모든 스텟 +3.
그리고 성현을 향해 나모르가 달려들었다.
콰아아아앙!
단 한 번의 주먹질.
성현이 가까스로 막았지만 주우우욱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나모르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파파파팍!
성현을 향해 쉬지 않고 주먹을 날렸다.
처음에는 피하려 했지만 무리였다.
성현의 광대뼈가 주저앉았고 갈빗대가 으스러졌다.
‘젠장.’
성현이 코를 훔쳤다.
걸쭉한 피가 만져진다.
그 피가 방울방울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마법사의 권능, 핏방울을 탄알처럼 사용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쉬이이익!
핏방울이 나모르를 향해 날아갔다.
스르륵.
나모르의 모습이 사라졌고 놈이 어느새 성현의 뒤에 섰다.
놈의 손바닥이 성현의 뒤통수를 향하고 있었다.
번쩍!
* * *
-도대체 언제쯤 때릴 수 있을까?
성현은 뗏목에 앉아 있었다.
무의식의 세계에 들어갔다 해도 신체의 공복은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물고기를 잡아먹는 중이다.
그런데 마법사는 계속 잔소리를 이어 가고 있었다.
-실제였다면 넌 몇 번이나 죽었을 게다.
지금껏 무의식의 세계를 드나들며 서른아홉 번이나 나모르와 싸웠다.
문제는 지금껏 단 한 대도 때린 적이 없다.
오히려 처참히 두들겨 맞았고 놈의 마력에 성현의 상반신이 사라졌던 것은 양호한 편이었다.
성현이 다 먹은 물고기를 바다에 던지며 입을 열었다.
“알았으니까, 또 해야지.”
무의식의 세계, 그곳에서의 전투는 편리한 점이 있었다.
꿈과 같다.
다치거나 죽어도 눈을 뜨면 상처는 말끔히 사라진다.
-또 죽으려고? 실전이었다면…….
마법사가 비아냥거렸다.
성현의 감정조차 극한으로 몰아가기 위해서다.
극단적인 상황은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서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현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내가 정말 실전처럼 싸웠다면 지금처럼 안 싸워. 군주를 상대로 정면으로 싸우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뭐라?
“실전이 아니니까 정정당당하게 싸우는 거야.”
마법사는 잠시 성현이 세트리아니를 상대하던 것을 떠올렸다.
세트리아니는 나모르보다 강하다.
하지만 성현의 앞에서 어떤 것도 보여 주지 못했다.
허우적대다 쓰러진 게 전부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마법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성현이 고위급 존재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부아아악!
나모르의 주먹이 성현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는 나모르의 공격이 조금은 보인다.
파파파파팍!
거침없이 이어진 공격도 마찬가지, 성현은 치명타를 피하며 상대의 손에 마력을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성현이 단도를 꺼내 자신의 팔을 살짝 그었다.
핏물이 몽글몽글 솟는다.
그 모습을 보던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성현은 이전에도 핏방울을 탄알처럼 사용해 나모르를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나모르는 가볍게 피하며 성현을 가루로 만들었다.
마법사는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한 달은 더 걸리겠어.
아무래도 성현은 인간이다.
아무리 강하다 해도 군주급 존재와 일대일로 싸워 한 방을 먹인다는 것은 쉽지 않다.
만약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했다면 몇 번은 때렸을 거다.
하지만 마법사의 권능은 아직 성현에게 익숙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마법사의 눈이 성현에게 집중됐다.
성현이 핏방울을 탄알처럼 날렸고 나모르가 스르륵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성현의 옆에 나타나더니 손바닥을 뻗었다.
여기까지는 지난번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성현은 나모르의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다.
놈의 마력을 피하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이어서 놈의 머리를 손으로 콱 쥐었다.
나모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성현이 나모르의 몸에 있는 피를 증발시키고 있었다.
물론 그 한 방으로 나모르의 모든 피가 사라질 수는 없다.
나모르가 인상을 구기며 팔을 휘둘렀다.
콰직!
성현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떴다.
다시 뗏목 위.
“또 죽었네.”
그때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마법사의 스킬을 사용해 나모르를 때려라’를 달성했습니다.
성현이 슬쩍 웃었다.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은 채, 마법사의 권능만으로 나모르에게 타격을 줬다.
그럼 지르힐의 권능을 사용한다면 결과는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성현이 입을 열었다.
“마법사, 한 번 더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