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소멸의 바다에 사는 마물이라 해서,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해서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단 한 방에 동료의 머리가 박살 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20마리의 마물들은 공포에 질려 다리가 굳었다.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일 수 없었다.
성현이 그들을 향해 자박자박 걸어갔다.
“인간은 아니고…….”
그들의 모습은 신기했다.
염소의 머리에 인간의 몸.
지구가 아니라 다른 세계에 사는 생명체.
성현이 움직였다.
이곳에서 죽으면 무(無)가 된다는 것을 알지만, 어차피 저놈들도 성현을 죽이려 한다.
사정을 생각할 이유는 없었다.
-크아아악!
한 놈이 몸을 돌렸다.
다가오는 성현을 피해 도망치려 한다.
‘늦었어.’
성현은 놈의 뒷목을 쥐었다.
퍼억! 퍼억!
성현의 주먹에 놈은 인형처럼 흔들거렸다.
퍼억! 후두두둑!
주먹을 몇 번 내지르지 않았는데, 놈은 목숨을 잃었고 바닥엔 몸속에서 흘러나온 장기가 떨어졌다.
마물들은 본능적으로 숲을 빠져나가려 했다.
동료가 죽었지만 지금 슬픔을 나눌 시간은 없다.
악마 같은 성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가장 앞서 도망치던 마물의 머리채가 갑자기 튀어나온 성현의 손에 콱 잡혔다.
나무 사이로 훅 하고 빨려 들어갔다.
콰드드득!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사이에서 시냇물처럼 핏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아아아악!
마물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달려 봤자 성현의 손바닥 안이다.
놈들은 동시에 성현을 공격하기로 마음먹고 나무 사이에 숨은 성현을 향해 우르르 달려들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습이 꽤 용맹하다고 생각했지만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나방과 같았다.
성현은 놈들의 칼을 피하며 주먹을 쑤셔 넣었다.
단순한 동작.
단순한 주먹질.
하지만 놈들은 피하지 못했다.
쾅! 쾅! 쾅! 쾅! 콰직!
광대가 으깨지고 두개골이 짓이겨지며 복부에 구멍이 뚫렸다.
사방에 핏물이 튀었고 땅에 떨어진 이빨과 뽑힌 갈빗대 그리고 내장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후우우우욱!
성현의 주먹을 얼떨결에 피한 마물이 나무에 등을 바짝 기대섰다.
떨리는 눈으로 성현을 바라보던 놈의 입에서 딸꾹질이 새어 나왔다.
제발 살려 달라는 애원의 모습.
하지만 성현의 손에 감정은 없었다.
살려 두면 기회를 엿보고 습격하는 게 마물이다.
이놈들의 생명에 대한 탐욕은 인간의 돈에 대한 집착보다 더 강하다.
성현은 손으로 놈의 머리를 쥐었다.
이어서 다른 손으로 놈의 다리를 잡았다.
찌이이이익!
상체와 하체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크아아악!
놈은 절규의 비명을 내질렀다.
아직 살아 있는 놈들은 눈을 부릅뜨며 현실을 부정했다.
상체와 하체가 잘려 나간 동료를 보며 ‘꿈이야. 꿈! 지옥도 이 정도는 아닐 거야!’라는 눈빛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성현은 피 묻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확실히…….’
확실히 강해졌다.
3년 동안 나모르를 상대한 것은 시간 낭비가 아니었다.
마력을 통제할 수 있었고 집중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마녀급의 존재는 어렵지 않게 찢어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갑주를 찾으면 더 강해진다고?’
분명 마법사는 말했다.
-갑주를 얻으면, 어쩌면 나모르 정도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갑주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게 만들 거다. 넌 충분히 강해졌고…….
성현의 눈에 기대가 가득해졌다.
그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단 이곳에서 최대한 난장판을 벌여야 한다.
그래야 섬의 주인이 나타날 거다.
쉬이이익!
콰직!
한 마물이 바위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저었다.
죽음의 공포, 무(無)로 돌아간다는 근원적인 두려움, 그런 게 아니다.
대항할 수 없는 폭력 앞에 원초적인 공포를 느낀 거다.
그리고 놈은 볼 수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입을 벌리고 있는 동료들의 머리가 땅에 툭 떨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쾅!
이미 죽은 마물의 머리를 성현은 발로 짓이겼다.
마물은 “으으으으…….” 하고 괴로움을 토해 내며 머리가 반쯤 박살 난 동료의 머리를 지켜봤다.
성현이 모든 것을 지켜보던 마물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 섰다.
-크아악!
마물이 미친 사람처럼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바위가 가로막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마물의 눈동자가 주변을 살폈다.
머리가 없는 동료들의 사체, 그리고 상체가 분리된 사체.
자신도 곧 그렇게 죽을 게 분명하다.
그때 성현의 목소리가 그의 정신을 돌아오게 했다.
“섬의 주인은 어디에 있지?”
마물은 성현의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
애초에 다른 세계에 살던 생명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서로 짐승을 바라보듯 보는 게 전부다.
하지만 마물은 어떻게든 성현의 말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그래야 할 수 있다.
마물은 젖 먹던 힘까지 짜내며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몇 번 마주했던 인간이라는 종족의 행동을 기억해 냈다.
놈이 털썩 무릎을 꿇고 애원하며 입을 열었다.
-카아아아.
성현은 물끄러미 놈을 바라봤다.
분명 지금의 행동은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거다.
콰직!
성현의 발이 놈의 허벅지를 밟았다.
놈은 뼈가 부러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를 악물며 참아 냈다.
-카아아아!
성현이 허리를 굽히며 놈과 눈을 마주쳤다.
“이 섬의 주인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나?”
-카아아아.
놈의 눈빛은 이미 투쟁심을 잃었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모양새가 꼬리를 말아 버린 개와 같았다.
성현은 고개를 저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됐다.”
어차피 말도 통하지 않는 것, 더 이야기를 나눠 봤자 시간 낭비다.
성현은 몸을 돌린 뒤 창을 던진 곳으로 향했다.
마물 1마리를 살려 둔 이유는 하나.
뛰어가서 이 섬의 주인에게 상황을 전달하라는 뜻이다.
잠시 후, 성현은 창을 손에 들었다.
창이 스르륵 작아지더니 부채의 모양으로 바뀌었다.
성현은 부채를 허리춤에 꽂은 뒤 숲을 둘러봤다.
마물이 사라진 숲은 고요했다.
그 시각, 살아남은 마물은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공포를 느꼈던 감정이 분노로 바뀌었다.
인간 따위가, 동료를 모두 죽였다.
그리고 그 분노는 생명에 대한 탐욕으로 변했다.
이들의 생명에 대한 탐욕은 본능을 넘어설 정도로 대단했다.
저놈의 생명을 갈아 마시면, 어쩌면 이 빌어먹을 공간을 탈출할 수도 있다.
-카아아아…….
놈이 주먹을 쥐었다 폈다.
염소의 머리, 그 끔찍한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갔다.
놈이 동료의 칼을 손에 쥐었다.
습격을 하면 된다.
아무리 강한 놈이라 해도 습격 앞에서는 답이 없는 법.
놈의 머리가 성현이 사라진 곳으로 홱, 틀어졌다.
* * *
성현은 숲을 걷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나올 줄 알았는데……. 더 난리를 피워야 하나?’
성현의 생각에 마법사가 끌끌 웃었다.
-직접 찾아갈 생각은?
‘없어.’
이 섬은 작지 않다.
해안선은 끝이 없어 보였고 멀리 보이는 산만 해도 그 거리가 수십 킬로미터는 되어 보인다.
이 모든 공간을 샅샅이 뒤지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직접 오게 만들어야지.’
숨어 있는 적을 끄집어내는 것, 그게 가장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성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마력.
빠른 속도로 성현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성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비틀었다.
쉬익!
단검이 성현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단검을 쥐고 있는 것은 방금 성현이 살려 줬던 그 마물이었다.
‘멍청한 놈.’
성현은 칼을 쥐고 있는 놈의 손목을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놈의 손을 뽑아 버렸다.
핏줄을 길게 늘어트린 손바닥이 형편없이 바닥에 나뒹굴 때 “끼아아악!” 하고 놈의 입에서 소름 끼칠 정도로 심각한 비명이 울렸다.
하지만 성현은 멈추지 않았다.
잠깐의 자비를 베풀었지만 역시 이놈들에게 자비는 낭비다.
성현은 놈의 남은 손목도 콱 잡았다.
이어서 놈의 남은 한쪽 손도 치즈가 늘어지는 것처럼 천천히 뽑혀 나갔다.
-끄아아아아!
놈은 금방이라도 피눈물을 떨굴 것 같은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입에서 핏물을 튀기며 소리쳤다.
-카아아악!
비록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지금 놈이 하는 말은 충분히 이해됐다.
그 뜻을 풀이하면 ‘죽여, 새끼야! 쿨럭! 쿨럭! 죽이라고 개×끼야!’ 성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직이 답했다.
“원한다면.”
성현은 엄지로 놈의 한쪽 눈을 꾸욱 누르며 목을 비틀었다.
우두둑.
성현이 손을 놓자 마물은 초점을 서서히 잃어 가며 바닥에 쓰러졌다.
-강해진 기분은?
“똑같아.”
성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저 놈들의 사체로 지저분해진 이곳을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물론 그들의 주검은 스르륵 모래처럼 흩어졌지만 그것조차 바라보는 게 기분 나빴다.
그리고 강해졌다는 것에 대한 기쁨보다 또 다른 감정을 느끼며 씁쓸히 웃었다.
‘익숙해졌어.’
살생에 대한 익숙함.
바깥세상에 있을 때와는 또 다르다.
그때 역시 살생에 익숙했다 해도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손쓰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성현은 잔인했으며 악랄했다.
놈들에게 공포를 주기 위해 서슴없이 움직였다.
점점 인간이라는 단어에서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마음을 마법사가 읽었다.
-내가 말했던 것 기억하는가? 전쟁이 끝나면 넌 전쟁을 그리워할 거야. 이미 평범한 세상에서 살 수 없는 정신이 되었어.
“…….”
-평범한 세상이 되었다고 네가 평범하게 회사에 앉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가? 평범하게 가정을 꾸리고 던져지는 100만 원에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가?
“…….”
-너로 인해 다른 사람은 행복해지겠지, 짐승과 존재에 의해 안전한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넌 뭘 얻을 수 있지? 넌 행복하지 않을 거야.
성현이 고개를 저었다.
“악담을 해라.”
성현은 마법사의 말에 신경을 껐다.
평범한 세상? 지금 생각할 여유가 없다.
그것도 플로르와 존재들의 세상을 끝장내야 가능한 일.
그 답도 보이지 않는데, 그다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미련한 일이다.
지금은 강해지는 것에만 목적을 둬야 한다.
그때 성현의 뒤에서 어떤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깐?”
또렷한 음성.
그것도 알아들을 수 있는 한국말.
성현이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고개를 틀었다.
교복을 입은 여성이 바위에 앉아 있었다.
꽤 귀엽게 생긴 외모.
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어?’
익숙한 얼굴,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느낌.
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누구? 혹시…… 나를 알고 있나?”
하지만 그녀는 성현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역으로 질문을 던졌다.
“내 애완동물, 네가 죽였니?”
“뭐?”
“네가 죽였구나?”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눈이 점점 시뻘겋게 변했다.
주변에서는 작은 돌멩이가 종이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이 마력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이 섬의 주인.
그리고 성현의 머릿속에 시스템 알림음이 울렸다.
[퀘스트 : 섬의 주인을 죽이시오]
-보상 : 신이 직접 만든 마법사의 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