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죽이라는 퀘스트가 나왔다.
그래야 마법사의 갑주를 얻을 수 있다.
‘죽인다.’
성현은 망설이지 않고 달려들었다.
성현이 내지른 창이 공기를 찢으며 그녀를 향했다.
엄청난 속도에 그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상상 이상으로 빠르고 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성현과 맞서 싸우는 것을 포기했고 빠른 판단은 무(無)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쉬이이익!
날카로운 창끝이 그녀의 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뭐야?’
성현이 창을 툭툭 털며 그녀를 바라봤다.
“제법이야.”
그녀는 느꼈다.
소멸의 바다에 온 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잘 모르지만, 성현은 그동안 만났던 마물과 다르다.
비록 섬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더 넓은 바다의 괴물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마물 중에서는 가장 강해.’
순간, 성현의 몸에 시커먼 마력이 일렁였다.
이어서 성현의 모습이 사라졌다.
빠른 속도를 눈으로 따라가지 못한 거다.
그리고 ‘어?’ 하는 순간 성현이 그녀의 코앞에 섰다.
심지어 성현이 쥐고 있던 창은 근접 공격에 유리한 단도로 바뀌어 있었다.
쉭! 쉭! 쉬익!
빠르게, 더 빠르게!
성현의 공격이 점차 빨라졌고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대로라면 성현의 단검에 심장이 꿰뚫려 죽을 게 분명하다.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무리였다.
그녀는 계속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턱, 바위가 그녀를 방해했다.
동시에 ‘후우우웅!’ 하고 성현의 단검이 그녀의 목을 향해 휘둘렸고 그녀는 눈을 콱 감았다.
이제 무(無)로 돌아가는 거다.
그런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며시 눈을 떠 보니 성현이 눈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너 누구야?”
“……?”
성현은 그녀가 익숙했다.
분명 어디선가 마주쳤던 인물일 것이라 생각됐다.
-죽여! 죽여! 죽이라고! 어서!
의식 속에서 마법사가 외치고 있었지만 성현은 그 목소리를 가볍게 외면했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 얼굴.
심지어 한국말까지 사용하고 있다.
아는 사람이라면 죽일 수 없다.
그건 인간임을 포기하고 백정이 되는 거다.
성현이 그녀의 목에 단검을 들이밀며 다시 물었다.
“누구냐고 물었는데?”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기억이 날 것 같아?”
성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기억이 난다 해도 그게 옳은 기억일까? 인간이었던 것은 기억해. 그런데 인간은 고작 일주일 전 먹은 점심이 무엇인지도 기억 못하지 않나? 난 기억을 버렸어.”
그러고 보니 바깥세상에서의 1초는 이곳에서 1년, 1분이면 60년, 하루는 8만 년을 훌쩍 넘어간다.
게다가 이곳에 있는 것들은 늙지도 않는다.
성현은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가늘게 입술을 떨었다.
이서아를 떠올린 거다.
만약 이 어딘가에 이서아가 있다면, 그녀는 성현을 기억하고 있을까?
이서아는 수십억 또는 수백억년을 겪었을 거다.
그 시간은 성현의 앞에 선 여자가 한 말처럼 모든 것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외로움의 고통을 느끼며 생명에 대한 간절함으로 마물이 되었을 시간이다.
여자는 성현의 눈동자를 살폈다.
그리고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이야!’
그녀가 발로 땅을 쾅, 찍었다.
섬이 흔들리더니 기괴한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키아아악!
동시에 하늘이 검게 물들었고 성현의 시선이 다급히 하늘로 향했다.
거대한 새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그것들이 동시에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정확히 성현을 목표로 해서 부리를 벌린다.
-키에에엑!
저 새의 이름은 ‘고대의 날개’.
소멸의 바다를 맴돌며 마물을 잡아먹고 사는 짐승.
한 마리, 한 마리는 성현보다 약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숫자가 여덟이다.
여자는 생각했다.
저것들과 힘을 합치면 성현을 이길 수 있다고.
그런데 착각이었다.
‘고대의 날개’가 성현을 먹기 위해 부리를 벌리는 순간이었다.
성현은 그 부리를 향해 창을 휘둘렀고 썩둑, 그 부리가 베였다.
정말 간단하게.
동시에 성현의 주먹이 ‘고대의 날개’의 몸을 가격했다.
꽈앙!
강하다고 생각했던 ‘고대의 날개’의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반으로 잡혔다.
이어서 몇 그루의 나무를 부서뜨리며 돌멩이처럼 땅을 굴렀다.
콰콰콰콰쾅!
‘고대의 날개’가 구른 곳은 쑥대밭이 되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쾅! 쾅! 쾅!
성현은 닥치는 대로 ‘고대의 날개’를 죽이기 시작했다.
큰 덩치를 갖고 있었지만 성현에게는 닭과 같았다.
날개를 찢어 버리고 부리를 뽑아냈다.
사방에 새의 눈알과 내장이 나뒹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자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생명체라고?’
말도 안 된다.
저건 괴물이다.
언젠가 어디선가 들었던 이 소멸의 바다를 관장하는 두 관리자.
악마처럼 여겨지는 천사와 피를 마시는 성녀, 그 두 존재도 성현의 앞에 서면 잔혹함을 한 수 접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마지막 삶을 포기했다.
그리고 마지막 ‘고대의 날개’가 땅에 처박혔을 때, 그녀는 무(無)로 돌아가기를 기다렸다.
성현이 창끝에 묻은 피를 털며 건조한 눈빛으로 뚜벅뚜벅 여자에게 다가섰다.
“마법사의 갑주, 네가 가지고 있지? 넘겨. 그러면 무(無)로 돌아가지는 않게 해 주지.”
“……뭐?”
예상 못한 말에 여자는 눈을 깜빡였다.
“갑주만 받으면 얌전히 떠나겠다는데, 괜찮은 조건이지 않아?”
성현은 전투의 순간에도 계속해서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여성.
어떤 인연이었을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
성현은 굳이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죽이지 않겠다는 건가?”
“찝찝하거든.”
성현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의식 속에서 마법사가 외쳤다.
-이곳의 마물에게 자비를 베풀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가? 이 여자 역시 너를 기습할 거다. 죽여라!
하지만 성현은 이번에도 마법사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적어도 이 여자의 능력은 내게 위협될 수 없어. 기습을 해도 마찬가지야.’
성현은 그녀보다 몇 단계 위의 마력을 갖고 있다.
그 덕에 그녀의 작은 움직임까지 모두 느낄 수 있었고 기습을 하는 순간 곧바로 무(無)로 보내 버릴 자신도 있었다.
성현이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넘겨. 무(無)가 되는 것보다는 낫잖아?”
그녀는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에 사는 마물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무(無).
그것은 본능이다.
이미 소멸되었거나 죽음의 근처에 있는 자들이지만 무(無)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성현과 싸워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순순히 성현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물론, 따르는 척하기로 한 거다.
‘저곳만 가면…….’
그녀의 시선이 섬의 중심에 있는 산으로 틀어졌다.
그곳에 만약을 대비한 마법진이 있다.
마법진이 발동하는 순간 그녀는 다른 섬으로 이동할 거다.
그럼 이 괴물 같은 성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따라와.”
그녀는 몸을 돌려 섬 중앙의 산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성현은 그녀의 뒤를 쫓으며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갔다.
그녀가 누구일까, 어디서 봤을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만난 적이 없다.
성현은 과거로 회귀하며 기억에 대한 세포가 상당히 예민해진 상태.
작은 것도 놓치지 않는데 그녀에 대한 것만은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성현은 자신이 만났던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가정했다.
그럼 좁혀지는 것은 누군가의 자식 또는 형제.
‘어?’
성현이 걸음을 멈췄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한……아성?”
한아성은 성현의 고등학교 친구다.
질투의 여왕 맨티스와 계약한 것으로 추정되던 사람.
성현의 머릿속에 한아성의 얼굴과 앞서 걷고 있는 여성의 얼굴이 겹쳐졌다.
‘비슷해.’
닮았다.
그 느낌마저 비슷하다.
순간, 한아성이란 이름을 들은 그녀의 걸음 역시 멎었다.
그녀가 천천히 성현을 향해 시선을 틀었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한아성? 그게 누구지?”
성현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그녀의 얼굴을 세세히 살폈다.
몇 번을 확인했지만 맞다.
한아성의 얼굴과 많은 부분이 닮아 있다.
그리고 성현은 언젠가 한아성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동생이 식물인간이라는 말.
존재와 계약했던 이유 역시 동생이 깨어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이었다던 말.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곳에서 한아성의 동생을 만나게 되자, 이 바다 어딘가에 이서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얻게 된 거다.
“한아성이 누군지 물었잖아!”
그녀가 강하게 물었고 성현이 조용히 대답했다.
“네 언니야.”
“……언니?”
그녀의 눈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였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애써 잊으려 했던 이름, 그게 그녀에게는 한아성이란 이름이었다.
성현이 그녀에게 한 발 다가서며 말했다.
“넌 죽지 않았어. 바깥세상에서 너는 식물인간인 상태야.”
“…….”
“가자, 내가 널 깨워 줄게.”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이었다.
성현은 주변이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어서 오싹한 기운을 감지했다.
성현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하늘이 흔들리고 있었다.
곧 와장창창! 유리 깨지는 소리와 함께 하늘이 후드드득 떨어져 내렸다.
하늘이 깨진 공간은 검게 비어 있었다.
우주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 더 아득한 것.
그 사이에 눈동자 하나가 나타났다.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이더니 성현을 지켜본다.
그 눈동자를 본 한아성의 동생이 파르르 떨며 중얼거렸다.
“피, 피를 마시는 성녀…….”
명백하고 노골적인 살기.
성현이 한아성의 동생에게 빠르게 말했다.
“갑주, 갑주는 어디에 있지?”
* * *
플로르의 여덟 번째 딸 올리비아.
그녀가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3초 지났네.”
그녀의 한마디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한 계약자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안…….”
하지만 그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머리가 ‘퍽!’ 소리와 함께 터졌기 때문이다.
사방에 갈기갈기 찢긴 뇌가 흩어졌다.
“으…….”
계약자들이 겁에 질린 눈동자로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올리비아가 활짝 웃었다.
“왜? 유성현이란 놈이 금방 온다며? 그래서, 약속했잖아. 3초에 1명씩 죽이기로. 원래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 죽는 건데, 그게 3초든 50년이든 무슨 상관이야? 난 나름 자비를 베푼 거야.”
올리비아는 그 말을 하면서도 또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퍽!
또 한 명이 머리가 터져 죽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올리비아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올리비아는 세트리아니보다 더 미쳐 있으며 훨씬 강하다.
올리비아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것으로 인간을 죽일 수 있다.
싸우려 마음먹는 순간 다가서기도 전에 머리가 터져 죽어 버릴 거다.
지금도 마찬가지.
올리비아는 시간을 재며 손가락만 까딱거릴 뿐.
퍽!
또 1명이 죽었다.
올리비아가 손가락을 까딱거릴 때마다 인간은 허무할 정도로 생명을 잃어야 했다.
“유성현…… 언제 오는 거야? 이러다가 여기 있는 애들 다 죽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