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 * *
“갑주를 가져와!”
성현은 갑주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관리자의 등장.
관리자를 막을 방법은 갑주, 그것만이 성현의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한아성의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소멸의 바다에서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살아왔다.
관리자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지금 바깥세상에 대한 실낱같은 희망을 얻었다.
언니라는 그리운 이름, 반드시 만나고 싶었다.
“가져와!”
성현의 말에 그녀는 몸을 틀었다.
“자, 잠시만…….”
그녀가 떠나는 것을 본 성현은 다급히 시선을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에 난 구멍, 그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눈동자.
핏발 선 그것이 성현을 응시하고 있었다.
정확히 그리고 또렷이.
떠나는 한아성의 동생은 신경도 쓰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 눈빛에 의도는 명확히 살기, 성현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다.
그 눈동자의 주인공은 피를 마시는 성녀.
그녀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감히, 살아 있는 생명체가 내 세상을 망가뜨리려 하는 것인가?
성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성현 역시 하늘의 존재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소멸의 바다에 온 것은 처음이지만 회귀 전, 존재들과 싸우며 귀동냥한 게 있어서다.
당시 존재들의 말에 의하면 소멸의 바다를 관리하는 두 관리자의 성격은 선과 악을 넘어선 순수한 파멸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현은 지금 성녀의 분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지?’
성현이 이곳에 온 것이 30년이다.
매일같이 싸워 왔고 그동안 무(無)로 돌려보낸 마물이 몇 마리인지 기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섬의 주인도 마찬가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기억하는 것만 해도 서른 이상의 섬의 주인이 성현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나타난 거지?’
그동안 그렇게 많은 마물을 죽이는 동안에도 관리자는 단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성현이 날뛰어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죽고 죽이고 계속 죽여도 관리자는 조용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튀어나왔다.
‘갑자기 왜?’
성현의 의문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젠장.’
회귀 후, 성현은 의문이란 것을 크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었고 상대의 약점이 머릿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성현 역시 소멸의 바다는 처음.
지금의 상대는 약점은 물론이고 그 정보조차 알지 못한다.
상대를 모르는 상태에서, 그것도 어떤 정보도 없이 몇 단계 위의 적과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
성현의 한숨이 깊어질 때, 머릿속에 마법사의 음성이 울렸다.
-갑주를 지키기 위해서지.
“……?”
태초에 세상은 하나밖에 없었다.
남신 게히얼과 여신 로안을 섬기는 그곳이 이 세상의 전부였다.
하지만 플로르가 에느가인에 탐욕을 느꼈고 이런 빌어먹을 세상이 만들어진 거다.
-그때 창조주는 내 갑주를 보관할 장소를 고민했어.
“……!”
-또한 죽지 않을 존재와 계속해서 나타날 생겨날 생명체, 그 생명체에는 인간도 포함됐고 창조주는 그 개체 수를 걱정했지.
“…….”
창조주는 여러 우주를 조절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떠올린 것이 소멸의 바다.
선과 악을 떠나 세상의 각 숫자를 조절하기 위한 시스템이었다.
선한 사람은 죽는다. 악한 사람 역시 죽는다. 그렇게 모든 인간은 죽는다.
그렇지 않으면 포화 상태가 되어 상상할 수 없는 자원의 한계를 느껴야 할 거다.
세상 역시 마찬가지다.
끊임없이 늘어나는 존재, 계속해서 커져 가는 우주, 무엇인가는 소멸되어야 하고 그 숫자와 크기를 줄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창조주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창조주의 변명이야. 그전에 소멸의 바다가 만들어진 이유는 내 갑주를 숨기기 위함이다. 저 관리자의 가장 중요한 소명은 내 갑주를 지키는 것이다. 이곳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뿐이다.
성현은 입술을 씹으며 성녀의 눈동자가 보이는 곳으로 시선을 틀었다.
무시무시한 눈동자는 지금도 성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소멸의 바다는 존재에게도 위험한 곳이라고 들었었다.
하지만 직접 이곳을 경험한 이후 성현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존재가 위협을 느낄 만큼의 위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죽을 뻔한 적은 있지만 그 정도의 위험 요소는 바깥세상에서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처음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다.
마녀 또는 군주 나모르를 상대로도 느끼지 못했던 소름 끼칠 만큼의 공포.
그런데 성현은 웃기 시작했다.
미쳐서가 아니다.
강자와의 싸움, 그것은 강해진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무대.
피가 튀고 뼈가 으스러진다 해도 이곳에서 승리하면 미래를 바꾸는 위대한 꿈에 한 계단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생각.
‘마법사, 하나만 묻자. 관리자와 플로르 중 누가 세지?’
-당연히 플로르다.
‘그럼 플로르가 저 관리자보다 얼마나 강하지?’
-플로르가 죽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리고 온전한 힘을 사용한다면, 저 관리자 정도는 손가락 하나에 끝날 거다.
성현이 끌끌 웃었다.
기뻐서 웃는 게 아니다.
손가락 하나라는 말을 듣자, 플로르의 손가락에 죽은 이서아가 떠올라서다.
그 기억이 성현의 분노를 끌어 올리고 있었다.
‘그럼 내가 저 관리자와 싸워 이길 가능성은?’
-갑주가 없다면 제로.
마법사는 단 하나의 고민조차 없이 단번에 대답했고 성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법사는 가능성이 제로라고 말했다.
하지만 성현의 목표는 플로르, 그런데 그보다 약한 관리자를 상대로 망설이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무서워도 움직여야 한다.
공포로 다리가 떨려도 달려들어야 하는 거다.
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거침없이 행동해야 승리할 수 있다.
성현의 손에 들린 창에 마력이 검게 물들었다.
마법사도 성현의 기세를 느꼈다.
그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을 울렸다.
-소멸의 바다는 신이 급하게 만든 세상이다. 완벽하지 않다.
“…….”
-생각해 보라. 이곳은 영혼이 소멸된 마물이 있는 세상, 태어나지 못한 아기가 있는 세상 그리고 뇌사 상태의 생명체가 있는 곳. 그런데 모든 것은 무(無)로 돌아가지 않는다. 어떤 것은 깨어나서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가기도 한다.
“…….”
-관리자 역시 마찬가지, 완벽하지 않다. 저놈들이 왜 갑주를 지키려 할까? 내 힘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겁먹지 마라. 넌 신이 최초로 만든 존재, 마법사와 지르힐의 권능을 갖고 있는 자다.
관리자는 한아성의 동생이 갑주를 가지러 떠나는 것을 내버려 뒀다.
한아성의 동생이 돌아오기 전 성현을 죽일 수 있다고 자신해서다.
성현은 그 오만을 노리기로 했다.
‘그러니까 복잡한 과거사 따위 집어치우고 심플하게 말하면 한아성의 동생이 갑주를 가져올 동안 견뎌야 한다는 거지?’
-옳다.
‘간단하네.’
그때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려왔다.
그 빛과 함께 각 섬의 주인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성현이 있는 이 섬은 소멸의 바다, 그 입구에서 30년 정도 걸리는 초입.
하지만 지금 소환되는 주인들은 다르다.
500년, 1,000년 또는 그 너머의 시간 동안 바다를 헤매야 만날 수 있는 마물들.
지금껏 초입에서 만난 섬의 주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각각의 모습 역시 천차만별.
인간처럼 보이는 녀석도 있었지만 두 발로 선 돼지, 키가 10미터는 넘어 보이는 거인, 물고기의 머리를 가진 놈.
그 숫자가 이십.
소환된 놈들이 노골적인 살기를 풍기며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소환되기 전 관리자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몰라도 대화는 필요 없다는 거다.
일단 싸워야 한다.
성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창을 단도로 바꿨고 팔을 살짝 그었다.
몽글몽글 솟아난 핏방울이 총알처럼 놈들을 향해 쏘아졌다.
파파파파박!
놈들이 몸을 비틀며 핏방울을 피해 냈다.
그런데 그 찰나의 순간 성현은 두 발로 선 돼지 앞에 도착해 있었다.
놈이 깜짝 놀라 아가리를 쩍 벌렸다.
-카아아아!
성현이 휘두른 발이 놈의 머리를 가격했다.
콰직!
보라색 피가 허공에 치솟았다.
성현은 곧장 손가락을 움직여 그 피를 조종했다.
피가 마물들의 머리 위에서 폭격처럼 떨어져 내렸다.
콰콰콰쾅!
성현은 멈추지 않고 양팔을 벌렸다.
전기가 사방으로 뻗어 간다.
파지지지직!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 때, 성현은 이를 악물고 땅을 쾅 발로 내리찍었다.
‘쩌어어엉!’ 소리와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갈라졌다.
성현은 균형을 잃은 놈을 향해 달려가 창을 휘둘렀다.
카카카캉!
놈이 다급히 칼을 들어 막았고 스파크가 튀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놈을 보며 성현이 슬쩍 웃었다.
‘아, 소용없네.’
잠시 요란하게 날뛰었지만 죽은 놈이 단 하나도 없다.
어떤 놈도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다.
다들 성현의 기습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지만 거기까지였고 그게 전부였다.
놈들은 멀쩡했다.
그리고 놈들이 각자 손에 든 병장기를 들고 성현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럼 더 놀아 줘야지?’
성현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성현의 창에 두 발로 선 도마뱀의 꼬리가 썩둑 잘려 나갔다.
놈이 비명을 지를 때, 성현은 놈의 목숨을 끊기 위해 창을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려 했다.
‘죽어라.’
하지만 성현의 공격은 생각대로 펼쳐지지 않았다.
순간 성현은 급브레이크를 밟은 것처럼 동작을 멈춰야 했다.
후우우우웅!
뒤에서 돼지 인간이 철퇴를 휘두른 거다.
한 놈을 공격하면 다른 곳에서 연계 공격이 들어오고 있다.
‘귀찮게.’
성현이 허리를 굽혀 철퇴를 피하며 창을 뒤로 돌려 돼지의 몸을 꿰뚫었다.
퍼억!
돼지는 꾸르르륵 소리를 내며 자신의 배에 박힌 창을 바라봤다.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멍하니 있을 때, 성현의 창이 놈의 몸을 양단했다.
촤아아아악!
‘일단 하나.’
하지만 위기 다음은 기회이며 기회 다음은 위기.
성현이 돼지를 죽이기 위해 집중할 때, 다른 마물들이 성현을 향해 달려들었다.
카카카캉!
성현이 다급히 창을 들어 공격을 막았지만 수적으로 불리하다.
게다가 놈들의 실력은 만만치 않다.
성현의 몸에 상처가 생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성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번 싸움의 목표는 간단하다.
한아성의 동생이 돌아올 때까지만 견디면 되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화르르륵!
갑자기 하늘에서 불꽃이 떨어져 내렸다.
관리자의 눈에서 시뻘건 불꽃이 성현을 향해 쏘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한 마물이 그 불꽃에 맞았다.
-크아아아악!
그 불꽃에 피아는 없었다.
관리자는 자신이 소환한 마물이 타 죽는 것도 상관하지 않았다.
성현과 대등하게 싸웠던 놈인데, 불꽃 하나에 고통으로 가득한 비명을 질러 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성현이 억지로 웃었다.
머릿속에 마법사가 한 말이 떠올라서다.
‘내가 이길 확률은 제로라고 그랬지?’
* * *
그 시각, 한아성의 동생은 동굴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가 다급히 동굴의 끝을 향해 달렸다.
이곳에 갑주가 있다.
성현이 말하는 갑주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이게 맞을 거다.
동굴의 끝, 빙하 같은 얼음 속에 들어 있는 갑주.
얼음 앞에 선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깰 수 있을까?’
그녀는 갑주를 발견한 뒤부터 얼음을 깨려 했었다.
거무튀튀한 갑주는 보는 것만으로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
어떤 짓을 해도 얼음에 타격을 준 적이 없다.
그녀의 손에 마력이 솟아났다.
이번만큼은 반드시 저 갑주를 빼내겠다고 생각하며 이를 악물고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꽝! 꽝! 꽝!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 얼음은 깨지지 않는다.
‘부숴야 해! 제발!’
꽝! 꽝! 꽝!
그때였다.
“……잠깐만.”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아성의 동생이 그 목소리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어?”
그곳에 정말 아름다운 여성이 서 있었다.
칠흑같이 검고 긴 생머리 그리고 그에 대비되는 하얀 피부, 누구나 선망하는 비율의 몸매.
보는 것만으로 홀릴 것 같은 묘한 느낌.
플로르의 환영이었다.
“난 플로르라고 한다.”
속삭이는 목소리조차 아름답다.
그 환영이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자박자박 한아성의 동생 앞으로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