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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80화 (180/252)

180화

한아성의 동생은 플로르의 환영을 보며 생각했다.

지금껏 만난 그 어떤 것보다 믿을 수 있다고, 그 속삭임이 거짓이라도 믿어야 한다고.

‘앞에 선 존재는 절대 선…….’

물론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플로르의 겉모습은 그 외의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을 본 플로르의 환영이 살짝 미소 지었다.

“착한 아이구나.”

“가, 감사합니다.”

한아성의 동생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순간 한아성의 동생을 바라보는 플로르의 눈빛이 슬프게 변했다.

“고생을 많이 했어.”

“네?”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썼구나…….”

그 목소리가 진심처럼 여겨졌다.

플로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평범한 소녀가 소멸의 바다에 떨어져서 섬의 주인이 되기까지.

정말 처절하게 버텨 왔던 그 과거.

그녀는 권능을 얻고 마력을 사용하며 피를 뒤집어써야 했다.

그리고 플로르의 안타까운 목소리는 그녀의 그 시간을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한아성의 동생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이내 고개를 숙이고 펑펑 울었다.

“그 슬픔, 내가 안아 주마…….”

플로르의 환영은 잠시 그녀를 더 바라봤다.

이어서 자박자박 울고 있는 그녀를 스쳐 얼음 앞에 섰다.

동굴을 꽉 채우고 있을 정도로 거대한 얼음.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의 단단함.

평범한 마력으로 이 얼음을 녹일 수도 부술 수도 없을 거다.

그리고 플로르의 시선은 그 얼음 안에 박혀 있는 마법사의 갑주를 향했다.

‘갑주라…….’

플로르의 환영이 이곳에 온 이유.

플로르는 성현이 카심과 떠난 후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성현은 이계가 위험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런데 동료를 내버려 두고 자리를 피했다는 것은…….

‘뭔가 있었다는 게지.’

그래서 소멸의 바다로 환영을 보냈다.

‘그 선택은 훌륭했어. 마법사의 갑주가 여기 있었다니.’

플로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 미소는 잠시였다.

갑주를 바라보던 플로르의 눈동자에 분노가 스치고 있었다.

과거를 떠올린 거다.

‘……도대체.’

플로르는 창조주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태초에 창조주는 지르힐과 마법사를 만들었고 신을 만들고 세상을 관리하라 지시했다.

‘그리고 창조주는 오랜 시간 모습을 감추었어.’

당시의 생명체는 그런 창조주의 의도를 여러 가지로 해석했다.

그 대표적인 추측은 두 가지.

-창조주는 세상에 직접 개입하지 못할 것이다.

-창조주는 세상에 관심이 없다.

창조주는 정말 오랜 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생명체의 추측은 모두 틀렸다.

창조주는 세상에 관심이 없었던 게 아니며 개입 역시 가능했다.

그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다시 창조주가 나타난 것은 플로르가 에느가인에 탐욕을 가졌을 때였다.

‘창조주는 다시 등장했어.’

창조주는 세상에 저주를 내렸다.

룰을 어긴 마법사를 망령으로 만들었고 그 갑주를 숨겼다.

‘그리고 나와 같은 존재에게는…….’

어머니에게는 끊임없는 출산의 고통을, 군주에게는 계속된 마력의 고갈을.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창조주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 하나 있었다.

‘바로 지르힐…….’

지르힐에 대한 창조주의 행동을 떠올리면 변덕 그 자체였다.

‘지르힐을 공격하던 그날…….’

플로르와 존재의 단체 교 그리고 지르힐을 두려워한 모든 존재.

그들이 지르힐을 상대로 몇 년을 싸웠는지 모른다.

세상은 피로 가득했고 비명으로 채워졌으며 사체의 썩은 내가 진동했다.

지르힐은 그만큼 강한 존재였다.

하지만 숫자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은 지르힐을 몰아세웠고 그 끝이 탑이었다.

플로르는 지르힐을 구속했다.

그녀의 모든 마력을 빼앗아 죽이려 했다.

‘그런데…….’

창조주의 변덕이 일어난 거다.

지금껏 조용히 있었던 창조주가 지르힐을 지켰다.

호의를 가진 자 외에는 누구도 탑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왜?’

여기서 플로르는 의문을 가졌다.

창조주가 지르힐을 생각하고 아꼈다면, 봉인되기 전에 도왔어야 한다.

하지만 창조주는 지르힐이 탑에 봉인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리고 풀어 주지 않았다.

그저 탑에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플로르는 생각했다.

창조주의 변덕.

의미 없는 행동.

‘이 세상을 만든 것은 그저 재미였을까? 한계가 있는 생명체끼리 아동바동 사는 것을 지켜보려고? 에느가인 역시 마찬가지였나?’

에느가인은 애초에 세상에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생명체의 탐욕을 일으킬 뿐인 그것을 세상에 놓아 둔 이유.

‘재미…….’

여기까지 생각한 플로르는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신을 논리적으로 판단하려 하는 것은 비합리적인 일.

존재도 초월적인 존재지만 창조주란 그 너머에 있다.

자신의 이성으로 그 생각을 파악하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신이 된다면 알 수 있겠지, 어떤 생각이었는지.’

모든 생각을 마친 플로르의 환영이 얼음에 손을 댔다.

환영이기 때문에 만질 수는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이 갑주는 진짜다.

이게 마법사의 손에 들어간다면 어떤 비극이 일어날지 모른다.

플로르의 시선이 한아성의 동생을 향했다.

“이 갑주를 꺼내려 하는 게냐?”

“아, 네.”

한아성의 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르가 선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이 갑주를 꺼내도록 도와주마.”

“저, 정말요?”

“그런데…… 하나 조건이 있다. 이 갑주를 내게 바치거라.”

“네?”

한아성의 동생, 그녀의 눈이 떨려 왔다.

이 갑주를 성현에게 가져다줘야 이곳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고 믿어서다.

그럼 그리운 언니, 부모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갑주를 플로르에게 바친다면 그런 행복한 미래는 사라진다.

그녀의 고민을 플로르가 읽었다.

플로르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너를 바깥으로 돌려보내 주마. 그리고 널 내 계약자로 삼아 주겠느니라.”

“……계약이요?”

“난 플로르,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정점 중 하나. 너같이 착한 딸이 있었으면 했다.”

한아성의 동생이 눈을 깜빡일 때, 플로르가 말을 이었다.

“이 갑주…… 유성현이란 놈이 찾아 달라 했겠지?”

플로르는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고 한아성의 동생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플로르의 다정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놈을 믿느냐? 그 말을 믿었다면, 안타깝게도 넌 속은 게다. 그놈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는 자.”

“네?”

한아성의 동생은 깜짝 놀랐다.

뜬금없이 세상의 멸망이라니, 비현실적인 이야기였다.

하지만 플로르는 그녀의 혼란을 상관하지 않았다.

한아성의 동생은 이미 자신에게 현혹됐다.

몇 가지 말로 확신을 주면 자신을 도와 갑주를 꺼내 바칠 게 분명하다.

플로르의 목소리가 계속됐다.

“이 갑주가 그놈의 손에 들어가면 세상은 멸망한다. 완벽한 파괴. 그게 그놈의 목적이다. 그래서 내가 보관하려 하는 게지.”

“…….”

“놈의 싸움을 지켜봤는가?”

한아성의 동생은 잠시 성현을 떠올렸다.

성현은 피를 움직인다.

생명체답지 않은 마력과 그 잔혹한 성격.

성현은 필요 이상으로 상대를 짓이겼다.

내장을 끄집어내고 눈동자를 파내고.

생각하는 것만으로 끔찍했다.

한아성의 동생이 성현을 떠올릴 때, 플로르가 말했다.

“생각해 보라. 피를 마시는 성녀, 쉽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저 존재가 왜 이곳에 나타나 유성현을 막으려 할까?”

“…….”

“유성현은 죽은 자를 다스리는 권능을 가진 자, 흉악한 웃음의 마법사와 계약된 자, 버림받은 악이라 불리는 존재와 계약한 자. 그들이 원하는 것은 세상의 파멸이다.”

“…….”

“난 그 파멸을 막고 우리의 세상을 지키려는 자, 내 자식들이 행복하고 충만하게 살 수 있는 유토피아를 약속하고 있다.”

“……!”

“나를 도와 세상의 멸망을 막겠는가? 그럼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이 이뤄질 게다. 세상의 멸망을 막은 자에게 그 정도의 보답은 당연한 일이지.”

플로르는 환영이다.

직접 저 얼음을 어찌할 수 없다.

반드시 앞에 선 한아성의 동생, 그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플로르는 활짝 웃었다.

한아성의 동생이 다 넘어왔다고 느낀 거다.

“내 딸이 되겠느냐?”

플로르의 환영이 한아성의 동생을 향해 하얗고 고운 손을 뻗었다.

그 손을 보며 한아성의 동생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그 시각, 성현이 비틀거렸다.

코에서 투두둑 피가 떨어졌다.

‘하…….’

혼자서 스물에 가까운 마물을 상대하기는 힘든 일.

놈들은 숫자가 가진 이점을 적절히 이용했고 성현을 몰아세웠다.

‘게다가…….’

하늘에서는 성녀가 쏟아 내는 불덩이가 뚝뚝 떨어지고 있다.

불규칙한 리듬으로 자신이 소환한 마물이 타 죽는 것도 상관하지 않은 채.

그걸 피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순간 성현을 향해 인간형 마물이 달려들었다.

성현이 비틀거리는 것을 기회로 여긴 거다.

하지만.

콰지지지직!

성현이 휘두른 창에 놈의 허리가 양단됐다.

핏덩이가 사방으로 팍 퍼져 나간다.

그런데 놈은 마물이다.

죽는 순간에도 성현의 창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젠장.’

성현의 행동은 주춤거렸고 도마뱀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놈의 주먹이 성현의 얼굴에 꽂혔다.

콰직!

성현은 광대뼈가 으깨진 것을 느끼며 땅을 굴렀다.

하지만 고통을 느낄 시간은 없다.

성현의 신체를 향해 마물들이 병장기를 쑤셔 넣고 있었다.

성현이 다급히 몸을 구르자 놈들의 병장기가 땅에 처박혔다.

콱! 콱! 콱!

숨 쉴 시간도 없는 공방.

‘집중력을 잃어서는 안 돼.’

저놈들에게 잡히면 휴지처럼 찢어질 거다.

어쩔 수 없이 당해야 한다면 치명타를 피하고 적절히 맞아야 한다.

콰직!

한 놈의 발길질이 성현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쿨럭!”

성현은 피를 토하며 또 다시 수십 미터를 굴렀다.

내장이 망가졌고 으스러진 뼛조각이 상처를 헤집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성현은 아픔을 뒤로하고 재빨리 일어섰다.

이어서 다시 놈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성현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죽음의 공포를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성현은 놈들과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한아성의 동생이 갑주를 가져올 때까지 견디면 돼.’

그렇게 생각했다.

그럼, 상황은 반전될 거다.

후우우웅!

피로 범벅된 성현이 주먹을 내질렀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물들은 혀를 내둘렀다.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상대.

마물들은 그런 상대를 처음 봤다.

하지만 놈들도 성현을 봐줄 수 없었다.

하늘에서 지켜보는 눈동자.

성녀의 지시를 어기는 순간 반드시 무(無)로 돌아간다.

-카아아아악!

폭력과 폭력이 이어지며 ‘쾅! 쾅!’ 소리가 대지를 흔들 때였다.

-내 갑주가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마법사의 목소리에 성현의 눈이 반짝였다.

-정확한 것은 모르겠지만 누군가가 손에 들고 있어. 아마, 이 섬의 주인이겠지.

성현이 슬쩍 웃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플로르의 마력이 느껴지고 있다.

마법사의 말에 성현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플로르가?’

-마력이 미미한 것을 보면 환영만 보낸 것 같은데…….

마법사의 목소리는 심각했다.

갑자기 이동하는 갑주 그리고 플로르의 마력.

환영만으로 어떤 짓을 할 수는 없겠지만 플로르는 새 치 혀를 놀려 댈 수 있다.

-만약, 이 섬의 주인이 플로르에게 넘어가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는 거다.

이 빌어먹을 소멸의 바다에 들어온 이유 중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

성현의 눈빛도 긴장으로 물들었다.

‘갑주가 넘어간 상태에서 내가 플로르를 이길 가능성은?’

마법사가 어이없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어머니급의 존재를 뭐로 생각하는 것이냐? 그 앞에 서면 놀아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플로르의 손에 갑주가 들어갔을 확률은 99%.

“…….”

-남은 1%의 확률을 기대하느냐, 아니면 여기서 목숨이라도 건질 수 있게 도망쳐야 하느냐, 그게 고민인…….

말을 하던 마법사의 뒷말이 줄어들었다.

잠시 조용하던 마법사가 다급히 말했다.

-갑주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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