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마법사의 말과 동시에 성현도 느꼈다.
한아성의 동생, 그녀의 마력.
성현의 시선이 그 마력을 향해 틀어졌다.
그녀가 성현을 향해 달려오고 있는 게 확실하다.
나무에 가려져 보이지는 않지만 갑주를 품에 안고 달려오고 있을 거다.
‘마법사, 네가 틀렸어.’
마법사는 자신의 갑주가 플로르의 손에 들어갔을 확률을 99%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법사에게 생명체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만 생각하는 그 이기적인 생명체가 초월적 존재인 플로르를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의 확률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인간이다.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 것은 아니다.
잠시 어두웠던 성현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지만 안심할 순간은 아니다.
성현과 싸우던 마물들도 그녀의 등장을 알아챘다.
모든 시선이 그녀가 오는 방향을 향해 틀어져 있다.
하늘에 박힌 성녀의 눈동자도 마찬가지다. 아니, 하늘에 있기 때문에 또렷이 보고 있다.
무거운 갑주를 품에 안고 달려오는 한아성의 동생을.
성녀의 소명은 하나.
성현을 죽이는 게 아니라 갑주를 지키는 것.
-막아라. 저 갑주를 빼앗기지 마라!
성녀의 목소리가 대지를 울렸고 마물들의 움직임도 다급해졌다.
그들이 두 발로 또는 네발로 한아성의 동생을 향해 내달렸다.
그런데 다급한 것은 마물들만이 아니다.
성현의 의식 속 마법사의 목소리도 긴박해졌다. 성녀와 똑같은 말을 전하고 있다.
-막아! 갑주를 빼앗기면 안 돼!
성현이 창을 꽉 잡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
성현의 허벅지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곧장 마물들보다 앞서 튀어 나갔다.
성현이 지금껏 놈들에게 당했던 것은 놈들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개개별로 부딪혔다면 성현의 권능이 조금이나마 앞선다.
성현은 3년 동안 군주 나모르와 대적해 왔고 간간이 놈의 몸에 치명타를 입힌 적이 있다.
나모르에 비하면 이들은 한참 약하다.
따진다면 하급 귀족 정도.
당연히 성현의 속도가 그들을 상회했다.
쉬이이익!
어느새 성현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놈들의 눈이 일그러질 때, 성현이 창을 빙글 돌리며 입을 열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잖아?”
놈들이 성현을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휘둘리는 병장기에 성현은 재빨리 창을 휘둘렀다.
카가가가각!
불꽃이 튀고 요란한 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놈들은 성현을 압도하지 못했다.
칼을 휘둘러도, 철퇴와 도끼가 던져져도 성현의 창에 막힐 뿐이다.
카카캉! 캉!
성현은 놈들 앞에 벽처럼 서 있었고 놈들의 눈빛이 찌푸려졌다.
지금껏 놈들이 성현과 싸웠던 이유는 성현을 죽이라는 성녀의 지시였다.
하지만 지금 놈들의 목표는 한아성의 동생.
성현을 상대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지체하는 순간 성녀의 힘에 의해 무(無)로 돌아갈 거다.
그래서 놈들의 공격에는 다급함과 절박함만이 가득하다.
예리함이 사라졌다.
-키아아악!
놈들이 다시 달려들었다.
하지만 마찬가지, 병장기와 마력이 부딪치는 소리만 요란하다.
물론 놈들의 숫자가 우세하기에 밀리는 것은 성현이다.
칼을 막아서면 도끼가 휘둘렸고 피했다 싶으면 암기가 날아왔다.
성현은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다.
한아성의 동생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그 생각을 끝까지 지닌 채 계속해서 놈들을 막아 냈다.
* * *
한아성의 동생은 이를 악물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의 품에는 한눈에 보기에도 엄청 무거워 보이는 거무튀튀한 갑주가 들려 있었다.
“아…….”
그런데 신음을 내뱉으며 달려오는 그녀의 얼굴은 겁에 질려 있었다.
뒤에서 소름 끼치는 무엇인가가 쫓아오는 것처럼 두려워하는 중이다.
한참을 내달리던 그녀가 겁먹은 눈동자로 시선을 틀었다.
뒤에서 후우우욱, 플로르의 환영이 뒤를 쫓고 있었다.
“감히 나를 속여?”
방금까지 그 무엇보다 아름다웠고 선해 보였던 플로르의 환영.
하지만 지금은 끔찍할 정도로 변해 있다.
한아성의 동생을 찢어 먹을 것 같은 눈빛이다.
‘안 돼.’
한아성의 동생은 계속해서 발을 움직였다.
그리고 잠시 전 상황을 떠올렸다.
조금 전, 갑주가 박혀 있는 얼음 덩어리의 앞.
플로르의 환영이 입을 열었다.
“갑주를 내게 바치겠느냐?”
한아성의 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녀의 힘으로 얼음을 깰 수는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얼음을 부수려 시도했지만 언제나 실패.
그것은 무리.
하지만 앞에 선 존재의 힘을 빌리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그녀의 표정을 본 플로르가 살짝 미소 지었다.
플로르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머리에 손을 댄 것처럼 움직였다.
“지금은 내 본모습이 아니라 환영, 그래서 너를 쓰다듬어 줄 수 없구나. 하지만 소멸의 바다를 떠나 바깥세상으로 온다면 너를 한없이 안아 주겠다. 그동안 고생했다, 내 딸아…….”
“…….”
플로르는 환영을 보냈다.
환영이 할 수 있는 물리적인 일은 없다.
하지만 힘을 전달할 수는 있다.
플로르는 환영을 통해 한아성의 동생에게 힘을 전달하고 갑주를 얻을 생각이었다.
이윽고 플로르의 환영, 그 손에서 밝은 빛이 뻗어 나왔다.
따듯한 빛이 한아성의 동생을 감싼다.
순수한 플로르의 힘.
종말을 만들어 내는 지옥의 불꽃.
그 탐욕스러운 마력이 한아성의 동생에게 한껏 채워졌다.
한아성의 동생은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그동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력이 몸에 용솟음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
한아성의 동생이 감탄하며 플로르를 바라봤다.
플로르가 생긋 웃는다.
“지금은 내 계약자가 아니니 고작 그 정도의 힘이 전부이니라, 본모습이 아니라 환영을 통해 이어졌기 때문에 그게 전부이니라. 하지만 정식으로 계약자가 된다면 내 너에게 끝없는 사랑을 약속하겠노라.”
한아성의 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음을 향해 다가섰다.
그리고 플로르의 지시에 따라 얼음에 손을 댔다.
한아성의 동생, 그녀의 손에서 지옥의 불꽃이 펼쳐졌다.
화르르륵!
오랜 시간동안 단 한 번도 타격을 줄 수 없었던 얼음이 녹기 시작했다.
이어서.
쩌어어억!
거센 소리를 내며 얼음이 갈라졌다.
한아성의 동생은 갑주에 손을 댈 수 있었다.
플로르가 한아성의 동생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갑주를 품에 안거라. 그리고 하늘을 향해 마력을 쏟아라. 이곳을 벗어날 공간이 열릴 것이며, 내 본모습을 만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한아성의 동생, 그녀의 눈빛은 변해 있었다.
그녀는 어떤 말도 없이, 플로르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앞을 향해 내달렸다.
플로르의 환영은 잠시 황당한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방금까지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듣던 한아성의 동생을 떠올리며.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순간이었다.
“이년이!”
플로르의 환영이 몸을 틀었다.
그리고 한아성의 동생을 향해 빠르게 이동했다.
“하아, 하아, 하아…….”
한아성의 동생은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 무거운 것을 들어 팔의 근육이 끊어질 것 같은 아픔.
그녀는 모든 것을 참고 계속해서 달렸다.
쫓아오는 플로르의 환영이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다.
비록 어머니급의 존재 플로르라 해도 지금은 환영, 이곳에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플로르는 그 존재 자체가 두려움이었다.
게다가 그녀는 방금 플로르의 그 대단한 마력을 몸소 느꼈다.
만약 그 마력을 다른 마물에게도 준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을 게 분명하다.
아무리 성현이라도, 성녀라도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그 전에 이 갑주를 성현에게 건네고 싶었다.
이 갑주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가 봐도 뭔가 대단한 게 숨어 있을 거란 것은 예상할 수 있었다.
“하악, 하아, 하악!”
그녀가 토해 내는 숨결이 극도로 거칠어졌다.
원래 그녀의 체력이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약하다고 하지만 그녀 역시 이 섬의 주인.
마음만 먹으면 섬의 끝과 끝을 오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체력은 바닥났다.
방금 플로르의 마력을 사용하는 순간 몸에 과부하가 걸렸기 때문이다.
‘달려야…….’
그때 플로르의 환영이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섰다.
플로르의 환영이 냉랭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따스한 시선은 증발했다.
지금은 세상을 얼려 버릴 것처럼 그녀를 노려보고 있다.
그리고 플로르의 환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높낮이가 없이 건조했고 사무적이었다.
“내가 지금 너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은 너도 알 것이다.”
“…….”
“하지만 바깥으로 나오는 순간 넌 내 타깃이 될 것이야. 방에 숨어도 세상의 끝으로 도망쳐도 난 너를 찾아낼 것이다.”
“…….”
“하지만 그 전에 하나 궁금한 게 있구나.”
한아성의 동생이 긴장된 시선으로 플로르의 환영을 향했다.
플로르의 환영이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
“왜 나를 속인 거지?”
“믿는 게 멍청한 거잖아?”
한아성의 동생은 플로르가 무서웠지만 억지로 웃었다.
플로르의 환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믿는 게 멍청한 거라고?”
“멍청한 거지!”
플로르가 억겁의 시간을 살아왔다고 하지만 한아성의 동생 역시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이곳의 1년은 바깥세상의 1초.
한아성의 동생은 끊임없는 시간 속을 지내 왔고 지옥과 비교되는 소멸의 바다에서 섬의 주인까지 되었다.
섬의 주인은 땅따먹기로 되는 게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모든 것을 익혀야 가능했다.
그리고 그녀가 이곳에서 가장 크게 배운 것은 하나.
‘착한 척하는 것을 경계하라.’
이곳의 성녀는 피를 마신다.
이곳의 천사는 악마처럼 여겨진다.
이곳에서 봤던 모든 착한 것들은 착해 보이는 만큼 더러웠다.
그런데 플로르는 완벽한 선처럼 보였다.
그럼 그 반대로 완벽한 악이 될 수 있다는 거다.
한아성의 동생은 성현을 선택했다.
적어도 성현의 모습에 위선은 없었다.
* * *
성현이 기침을 하자 검은 피가 한가득 쏟아졌다.
“지르힐한테 혼나겠네.”
성현의 몸에는 깊은 상처가 여럿 보였다.
오른쪽 어깨가 갈라져 있고 허벅지에도 칼이 스치고 간 상처가 명확하다.
커스터마이징으로 상처를 가릴 수 있다 해도 이건 좀 심각한 상태다.
하지만 성현은 웃었다.
이제 남은 마물은 여섯.
그동안 10마리가 성현의 손에 무(無)로 돌아갔고 4마리는 성녀라는 존재가 뿜어내는 불꽃에 타 죽었다.
“계속할까?”
성현은 창을 휘두르며 자신 있게 말했다.
하지만 허세다.
지금 상태로 놈들이 달려들면 10초도 견디기 어려울 거다.
그런데 그 허세가 통했다.
놈들이 움찔거리고 있다.
20마리로도 성현을 죽이지 못했는데 남은 것은 고작 여섯.
이 숫자로 성현을 죽일 수 없다고 판단한 거다.
놈들이 가늘게 떠는 게 성현의 눈에 보였다.
‘됐어.’
이제 시간을 끌며 한아성의 동생이 오기를 기다리면 된다.
그때.
꽈아아아앙!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졌다.
지금껏 성녀가 떨어뜨리던 불꽃, 그 위에 성녀가 둥실 떠 있었다.
동화 속 선녀처럼 나풀거리는 옷을 입은 성녀, 그녀가 성현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하찮군.”
살기 어린 눈빛과 목소리에 마물들이 다급히 몸을 낮춰 성녀를 맞이했다.
그런데 그녀를 본 순간 성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려 왔다.
“……이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