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성현은 내장이 파열되고 어깻죽지가 갈려도 이를 악물고 견뎌 냈다.
살벌한 마물을 상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죽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한 발, 한 발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서아를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잘못 봤나 싶어서 몇 번을 확인했지만 이서아가 맞다.
이서아는 양피지를 찢어 성현을 과거로 회귀시킨 자.
그 대가로 소멸됐고 회귀된 세상에서는 그 부모조차 이서아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 이서아가 성현의 앞에 서 있었다.
소멸의 바다, 그 관리자가 되어서.
하지만 생김새만 같을 뿐이다.
다정했던 눈빛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친절했던 목소리는 건조했다.
“인간…….”
이서아는 성현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대하듯 냉랭하게 바라보고 있다.
“서, 서아야…….”
성현이 입을 열었지만 이서아는 외면했다.
그녀는 사뿐히 땅에 내려오더니 성현을 신경 쓰지 않은 채 처참한 전장만 천천히 둘러봤다.
“살아 있는 생명이, 그것도 영혼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생명체가 이 바다에 흘러들어 왔다는 것, 각오는 했겠지?”
동시에 ‘파직! 파직!’ 하고 이서아의 온몸에 검은 마력이 일렁였고 주변의 공기가 마력에 닿으며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적대감.
심지어 마력의 파동은 나모르보다 강하다.
적어도 플로르의 아홉 딸에 비견될 정도다.
이것이 소멸의 바다를 관리하는 두 관리자 중 하나, 피를 마시는 성녀 이서아다.
그리고 그녀의 마력을 느낀 마법사가 다급히 외쳤다.
-뭐 하는 거야! 왜 가만히 있어? 피해! 공격 범위에서 벗어나!
마법사는 성현에게 도망치라고 외쳤다.
-네 몸이 멀쩡했어도 무리다. 네 수준으로 성녀를 감당할 수 없어! 심지어 지금 네 몸은 마물과 싸우며 한계에 몰린 상태다!
지금 상태로 싸우면 반드시 죽는다.
-피하라!
1초는 견딜까?
버티는 게 목적이라 해도 10초는 가능할까?
아니, 모든 게 불가능하다.
-갑주가 오는 방향으로 달려라!
마법사는 생각했다. 갑주만 손에 얹는다면, 그리고 자신이 성현의 의식을 차지하면.
-성녀 따위는 단숨에 숨통을 끊어 버릴 수 있다. 나에게 의식을 맡겨라!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마법사는 이서아를 죽일 생각만 한다.
마법사에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생명은 멸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성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마법사, 만약에 네가 이서아를 죽인다면…… 넌 정말 후회하게 될 거야.’
-뭐라?
‘뭐가 됐든, 내가 책임진다.’
-네 수준으로는 어려워!
‘내가 언제 빈말하는 것 봤어?’
-저 성녀와 인연이 있다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저 성녀가 이곳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지냈는지 상상이나 되는가? 저 성녀는 너를 잊었다. 그러니까…….
‘기억할 거야.’
-유성현!
‘잡소리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마법사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 성현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통하지 않는다.
저 성녀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지만 그저 고집불통으로만 여겨졌다.
마법사는 한숨을 내뱉으며 갑주가 어서 오기를 기다렸다.
적어도 200m 안으로만 들어오면 자신의 의지로 갑주를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사라지자 성현의 시선이 천천히 이서아를 향했다.
“다행이야, 이렇게 만나서.”
성현의 계속된 목소리에 이서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나를 알고 있는가?”
“어.”
“난 너를 모르겠는데?”
“괜찮아. 지금부터 기억나게 해 줄게, 내가 누군지.”
성현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솟구쳤다.
파지지지직!
성현의 온몸이 지르힐의 권능으로 덮이며 스파크가 일어났다.
동시에 수십 줄기의 전기가 공처럼 뭉쳐 떠오르기 시작했다.
마법사가 버럭 외쳤다.
-한계다. 마력을 더 사용하지 마라. 마력에 잠식될 수도 있다!
성현은 마법사의 목소리를 외면하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이서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인간이 뽑아낼 수 있는 마력은 이서아에게 위협도 안 되는 수준이다.
그녀가 자박자박 성현을 향해 다가서며 입을 열었다.
“꿈틀하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죽을 것, 꿈틀은 해 봐야지. 그게 이 지옥에서 살아가는 법이라며?”
회귀 직전,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던 성현에게 이서아가 했던 말.
그 말에 이서아의 걸음이 멎었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법’. 그 말은 그녀가 종종 내뱉는 말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눈을 가늘게 뜨고 성현을 바라본다.
“넌 누구지?”
“네가 졸졸 쫓아다녔던 남자. 이름도 말해 줄까? 유성현. 넌 나를 대장이라고 불었어.”
“하!”
이서아는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성현은 그 말을 끝으로 이서아를 향해 달려 나갔다.
꽈아아아아앙!
이서아의 마력과 성현의 마력이 부딪쳤다.
공기가 흔들렸고 그 파동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이서아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가소로운 인간이 자신에게 정면으로 부딪치다니.
게다가 도망치거나 무릎을 꿇는 게 아니라 싸움까지 걸고 있다.
“감히!”
이서아가 손을 휘둘렀다.
쩌어어엉!
성현은 집어 던진 돌멩이처럼 날아가 바닥을 굴렀다.
콰콰콰콱!
성현은 몇 그루의 거대한 나무들을 부순 후에야 멈출 수 있었다.
“쿨럭!”
성현의 입에서 검은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성현은 비틀대지 않고 당당히 일어섰다.
“제법이야. 많이 늘었어.”
성현의 허세로 가득한 목소리에 이서아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덤벼 봤자 고기 조각이 되어 끝날 뿐이다. 얌전히 목을 내놓아라. 그럼 네 시신은 보존해 주마. 언제 나를 만났는지 몰라도 옛 인연에 대한 배려라 생각해도 좋다.”
성현이 끌끌끌 웃기 시작했다.
“할 수 있으면 해 봐. 그런데 우리 중 제일 약했던 너한테 내가 지는 것은 모양이 좀 이상하잖아?”
“끝까지…….”
“그러니까 입 다물고 와라.”
성현이 이서아를 향해 손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이서아가 활짝 웃었다.
“얼마든지.”
이서아가 성현을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쉬익!
엄청난 속도.
성현은 모든 능력을 집중력에 쏟아부었다.
극한의 집중.
그 덕에 공기가 움직이는 것까지 살갗에 느껴진다.
바닥에 튀는 작은 돌멩이의 움직임도 눈에 들어온다.
이서아의 움직임도 마찬가지.
성현이 그 움직임을 똑똑히 지켜보며 창을 휘둘렀다.
회귀 전, 이서아의 수련을 도와줄 때 흔히 사용하던 공격.
직선으로 달려오는 이서아가 피할 수 없을 찌르기.
그런데 ‘어?’ 하는 순간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고 어느새 성현의 뒤에 서 있었다.
이어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행동은 모두 알고 있다.”
“……!”
성현이 창을 휙 돌리며 뒤에 선 이서아를 향해 창을 쑤셨다.
그런데 이번에도 이서아는 가볍게 피했다.
“무슨 짓을 해도 날 이길 수 없다.”
성현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하지만 찌르고 휘두르고 주먹을 내질러도 번번이 실패.
후우우웅!
성현은 허공을 스치는 창을 회수하며 눈을 찌푸렸다.
‘저것은…….’
지금 이서아의 몸짓은 마력이 우위에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본능적으로 성현의 창을 보고 피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성현이 행동할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즉, 그녀의 권능이다.
성현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에 이서아는 성현이 미쳐 버렸나 싶었다.
하지만 성현이 웃음을 뚝 그치며 입을 열었다.
“미안, 솔직히 조금은 의심했거든?”
“의심?”
“얼굴만 똑같은 게 아닐까 했어. 그런 거 있잖아? 가까운 사람의 얼굴을 만들어 놓고 마음을 뒤집는 놈들. 그런데 넌 진짜 이서아네.”
붉은 눈의 마녀와 계약했던 이서아.
그녀의 권능은 미래 예지.
수천, 수만 가지의 미래를 읽고 회피하는 능력.
물론 예지가 만능은 아니다.
언제나 변수는 있고 결정된 미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현이 다시 자세를 낮췄다.
“넌 날 못 이겨.”
“…….”
“네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난 네 약점을 알고 있거든.”
“…….”
“조금 아플 거야. 그리고 네가 한 말, 또 한 번 전해 주지. 네 기억을 되돌리는 것. 무량대수라는 숫자 중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난 한다.”
이서아의 눈이 찌푸려졌다.
계속해서 기억을 헤집는 목소리.
그런데 기억이라는 것은 검고 깊은 물속에 파묻힌 조각과 같다.
성현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내려 했지만 이서아의 기억 조각은 답답할 만큼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간다.”
콰아아앙!
성현이 땅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창을 들어 올렸다.
-마력에 잠식될 수도 있다고 했다!
마법사가 다급히 외쳤다.
성현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마법사는 느꼈기 때문이다.
지금 상태로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
망가진 신체로 운영할 수 없는 지르힐의 권능.
“저주받은 섬광.”
하늘에 먹구름이 일더니 번개가 떨어져 내린다.
세상을 뒤덮을 만큼의 많은 번개…….
콰르르릉!
성현의 입에서 검은 피가 주르륵 흘렀다.
머리는 기억 못해도 몸은 기억한다는 말이 있다.
성현은 자신을 알릴 수 있는 모든 권능을 이서아에게 퍼부을 생각이다.
그렇게 해서 이서아의 기억을 회복시켜 함께 이 빌어먹을 바다를 벗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억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관리자든 뭐든 상관없다.
때려눕혀서라도 끌고 갈 거다.
‘난 너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서아는 눈을 부릅뜬 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를 바라봤다.
세상을 부숴 버릴 듯, 공기를 가르며 내려오는 악의 불꽃.
이서아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건 알 것 같아.”
그리고 그녀를 번개가 덮쳤다.
꽈르르르릉!
* * *
“넌 알고 있나?”
무의식의 공간.
마법사가 분노한 눈동자로 지르힐을 바라봤다.
지르힐 역시 성현이 회귀자란 것을 모르기에 지금 성현이 저렇게까지 반응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다.
마법사가 지르힐을 향해 저벅저벅 다가섰다.
“왜 말리지 않는 거지?”
“…….”
“말려야지! 네 계약자잖아! 지금, 이 마력이 요동치는 게 안 보이는가!”
마법사의 목소리가 쩌렁거리며 울리자 지르힐이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 물처럼 발목까지 채워진 마력이 미친 것처럼 요동치는 중이다.
그런데 지르힐의 눈빛은 마법사와 달리 다급하지 않았다.
마력이 파도를 치는 중인데도 평온하다.
마법사가 다시 외쳤다.
“지르힐! 지금 당장 유성현을 말려라!”
마법사는 성현과 계약하지 않았다.
성현을 말릴 능력이 없다.
하지만 지르힐이 말한다면 다를 거다.
성현과 지르힐은 계약된 관계, 서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지르힐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금빛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말 안 들어. 말린다고 들을 남자가 아니야.”
“뭐?”
“계약한 뒤로 내 말을 들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을걸.”
마법사는 지르힐의 입에서 나온 ‘남자’라는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르힐은 생명체를 성별로 판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르힐은 마법사의 시선을 뒤로한 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법사, 창조주는 우리를 왜 만들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