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마법사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지르힐의 철학적 호기심을 해결해 줄 시간이 아니다.
창조주고 뭐고 지금은 살기 위한 집념으로 발버둥 칠 시간.
성현이 모든 마력을 끄집어내서 성녀를 압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게 전부다.
곧 과부하가 걸린 몸뚱이는 비명을 지르며 한계를 맞이할 게 분명하다.
반면 성녀는 모든 힘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전력으로 덤비는 성현을 지켜보며 가지고 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지금 지르힐이 생각하는 개똥철학은 잠시 미뤄야 한다.
그런 것은 어떤 위험도 없을 때나 생각할 수 있는 사치다.
“지르힐, 그 생각은 나중에 하고 유성현이나 말리라고 했다!”
하지만 지르힐은 마법사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그녀의 질문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성녀는 어떻게 유성현을 알고 있을까?”
“……뭐라?”
“유성현과 성녀, 어떤 연관성도 없잖아?”
마법사의 눈에도 의문이 채워졌다. 그리고 잠시 멍하니 있던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마법사는 지금껏 갑주만을 생각했고 정작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었다.
성현이 성녀를 알고 있다.
성녀는 소멸의 바다를 관리하는 자.
소멸의 바다는 멀쩡한 인간이 들어와 살 수 없는 곳.
즉, 성현이 성녀를 알고 있는 것은 비상식적인 일이다.
문제는 성녀도 성현을 알고 있는 눈치.
아니, 수면 속에 가라앉았던 기억을 끄집어내며 유성현이라는 이름을 점차 기억해 내는 것 같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유성현이 뇌사 상태에 빠진 적이 있나? 그렇다면 말이 되는데…….”
“유성현의 과거사를 훑어봤지만 그런 일은 없어.”
“……그럼?”
마법사는 혼란에 빠졌고 지르힐이 자박자박 그를 향해 다가갔다.
“생각해 봐. 소멸의 바다에 갇혀 있던 성녀. 상식을 벗어난 인간 유성현, 억겁의 시간 동안 봉인되어 있다가 망령이라는 이름으로 깨어난 마법사. 그리고 다시 솟아나는 플로르의 에느가인에 대한 탐욕, 마지막으로 때맞춰 돌아오는 내 권능. 이 모든 게 우연과 필연이라는 이름의 톱니바퀴 속에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창조주는 우리를 왜 만들었을까?”
지르힐의 시선이 틀어졌다.
먼 곳에서 다가오는 플로르의 마력을 느낀 거다.
잠시 플로르의 광기를 느끼던 지르힐이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라면…… 전쟁이 일어날 거야. 멈춰 있던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
태초에 벌어졌던 전쟁, 마법사는 망령이 되었고 지르힐은 탑에 갇혔다.
각 존재는 승자를 가리지 않은 채 거짓된 평화를 누려 왔다.
하지만 그 거짓된 시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지르힐의 말을 듣던 마법사가 활짝 웃더니 지르힐을 향해 얼굴을 쑥 내밀었다.
“지르힐, 네 말은 예전부터 많은 게 들어맞았어. 그럼, 이번에도 맞을 수 있겠지?”
마법사는 모든 것을 멸하고 싶어 하는 자.
전쟁은 마법사에게 기회.
“난 창조주가 만든 이 세상을 반드시 없앨 거다. 어떤 생명체도 존재하지 않는 황무지로 만들 생각이다. 전쟁의 시간을 원하고 있다. 그 톱니바퀴를 움직이는 게 플로르라 해도 상관없다.”
“…….”
“그리고 멈춰 있던 시간, 승자가 가려지지 않은 거짓된 평화,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잖아?”
플로르가 가짜 에느가인을 만졌을 때, 지르힐과 마법사는 싸우고 있었다.
지르힐은 마법사의 광기를 막기 위해.
마법사는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지만 그 싸움의 결과는 나지 않았다.
마법사가 옛 일을 기억하며 지르힐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리의 시간도 다시 흘러가는가?”
지르힐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망령 주제에…….”
“마, 망령 주제?”
“시간이고 뭐고 육신이 없는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리고…… 지금은 마법사, 네 말대로 의문을 가질 시간이 아닌 것 같아.”
지르힐이 주변을 살폈다.
마력이 요동치고 있다.
방금 전의 파도 같은 느낌이 아니다.
마력이 무의식의 공간을 균열 낼 것처럼 사방으로 날뛰고 있다.
성현의 몸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뜻.
그리고 마력이 성현의 몸을 장악하려 한다는 것.
지르힐이 눈을 감고 낮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대…… 위험하다. 이건 아니다. 피하라.”
성현에게 던지는 말이다.
하지만 예상대로의 대답이 흘러왔다.
-미안.
“지금 그대의 마력이…….”
성현의 몸에 든 마력은 여러 존재의 것으로 뒤섞여 있다.
처음 그 마력은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고 개별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무의식의 공간이 개방되고 시간이 지나며 하나의 집합체가 되었다.
지르힐이나 마법사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의 인지 능력까지 지닌 채.
평소에는 마력이 어떤 상태가 되었든 상관없다.
문제는 지금 같은 상황이다.
신체와 의식이 한계에 치달으면 놈들은 언제든 성현을 집어삼키려 한다.
하지만 지르힐은 뒷말을 줄이며 더 말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들을 성현이 아니다.
어차피 듣지도 않을 사람에게 말을 걸어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다.
지금은 차선을 생각해야 한다.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으며 마법사에게 말했다.
“만약에 유성현의 의식이 끊기면 내가 움직일게.”
“……네가?”
“알잖아, 한 손은 자유로운 거. 그리고 한 번 바깥 공기도 마시고 싶고. 성녀라는 것과 플로르의 얼굴도 직접 보고 싶고.”
마법사가 고개를 저었다.
“갑주가 오는 중이다. 그것은 내 것이며…….”
“유성현은 내 계약자야.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들어.”
마법사는 지르힐의 눈빛을 봤다.
자세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르힐은 두들겨 맞고 있는 성현을 보며 알 수 없는 분노를 눈으로 쏘아 대고 있다.
“뭐…….”
마법사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어떤 것도 없던 허공에서 검은 연기가 일렁이며 칼이 만들어졌다.
이서아가 그 칼을 손에 쥔다.
하지만 휘두르기에는 늦었다.
성현이 몸을 바짝 낮춘 채 이서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넌 근접전을 가장 싫어했어.’
이서아의 권능은 예지.
근접전투의 빠른 공방에서 순간의 예지는 불필요한 것.
하지만 이서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성현의 움직임은 지금껏 봤던 마물에 비해 엄청나게 빨랐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서아의 예지는 인간이었을 때와 달랐다.
지금의 그녀는 짧은 시간에 성현의 모든 공격과 생각을 읽어 낼 수 있었다.
살짝 발을 트는 것만으로 성현의 사각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성현의 등을 때렸다.
쩌엉!
“끕!”
성현은 균형을 잃고 땅에 처박혔다.
이서아가 뒤로 물러서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인간, 언젠가 너와 내가 만났었던 것은 인정하지. 내 기억 속에도 너의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연에 얽매이는 것은 여기까지다.”
이서아는 관리자의 운명을 따르기로 했다.
창조주의 지시는 절대적인 것.
기억조차 희미한 인간과의 인연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은 그만뒀다.
그런데, 성현은 웃었다.
“그래도 기억은 하나 보네? 말했잖아. 내가 네 기억 되돌려주겠다고.”
이서아는 냉랭한 시선으로 성현을 노려보며 땅을 발로 찼다.
그러자 파괴적인 기운이 성현을 덮쳐 왔다.
그리고 성현이 있던 자리를 쓸어버렸다.
꽈아앙!
소형 핵폭탄이 터진 것 같은 버섯 모양의 흙먼지가 하늘까지 치솟았다.
주변에 숨어 싸움을 지켜보던 마물들은 ‘이제 저놈이 죽었나?’ 생각하며 마른 입술을 핥았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은 틀렸다.
흙먼지 속에서 성현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이서아와 거리를 좁히며 주먹을 꽉 쥐었다.
성현의 주먹이 검은 마력에 회오리처럼 감기는 것 같았다.
이서아가 눈을 반짝일 때, 성현의 몸은 더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이서아는 성현의 주먹에 맞지 않았다.
아무리 휘둘러도 허공만 스칠 뿐이다.
휙! 휙! 휙! 휙!
이서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성현의 공격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었다.
신체는 비명을 지르고 있는 게 분명한데, 성현은 더욱 마력을 끌어 올리고 있다.
‘어떻게?’
급기야 주먹이 이서아의 얼굴을 스치기까지 한다.
휘이이익!
예지력을 통해 예측한다 해서 모든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초근접전의 전투는 좁은 시야 안에서 이뤄지는 공방.
게다가 예지력은 모든 미래를 맞히는 게 아니다.
갈래갈래 뻗어 나간 상황 중 하나를 고심해서 고르는 게 예지력.
짧은 시간에 뻗어 나간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둘 수는 없었고.
‘지금!’
드디어 성현의 주먹이 이서아의 복부를 향해 갔다.
이서아가 빠르게 양손을 뻗어 성현의 팔을 막으려 했다.
‘거기가 아니야.’
성현이 이서아의 팔목을 잡아챘다.
이서아가 ‘어?’ 하는 찰나 성현은 그녀의 손목을 꺾으며 발목을 걷어찼다.
쾅!
균형을 잃은 이서아가 바닥에 넘어졌고 성현이 그 위에 올라탔다.
이어서 주먹을 꽉 쥐며 입을 열었다.
“넌 근접전도 싫어했지만 그라운드는 더 싫어했어.”
치열한 공방 중에 친절한 설명.
이서아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함이다.
“이태산이라고 기억해? 그놈은 또 계약자가 돼서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더라. 아, 이유미는 기억하나? 너하고 많이 친하게 지냈었는데. 소멸의 바다에 오면 자기 아기를 찾아 달라는 부탁을 했거든.”
기억나지도 않는 이름을 듣던 이서아는 가슴이 욱신거림을 느꼈다.
육체의 통증이 아니라 마음의 통증이다.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말 못 하게 그리운 이름.
이서아는 지금 그 감정이 싫었다.
인간 따위가 자신의 위에 올라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인간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것은 더더욱 짜증 났다.
이서아가 분노했다.
“왜!”
동시에 꽈아아아앙! 검은 마력의 구체가 성현의 명치를 때렸다.
“컥!”
성현의 몸이 허공에 올라 수십 미터를 굴렀다.
“이제 봐주는 것은 없다, 인간!”
그런데, 몇 바퀴를 구른 후 일어선 성현이 달려오는 이서아를 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성현이 입을 열었다.
“왜 울어? 눈물부터 닦아.”
“헛소리하지 마!”
이서아는 비명을 지르며 주먹을 내질렀고 성현의 얼굴을 가격했다.
콰직!
“크윽!”
성현은 이를 악물며 버텨 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두개골이 모두 으스러졌지만 웃어야 했다.
지금은 견뎌야 한다.
조금이지만 이서아의 기억이 돌아오는 게 느껴진다.
이서아는 말없이 성현을 향해 폭력을 이어 갔다.
그때였다.
꽈아아앙!
성현의 주먹이 이서아의 얼굴에 제대로 꽂혔다.
예지 능력으로도 볼 수 없을 정도의 공격. 예상 밖의 휘두름.
자신도 모르게 “악!” 소리를 내뱉으며 주춤주춤 물러선 이서아가 자신의 코에서 떨어지는 피를 느꼈다.
‘피?’
그리고 이서아가 입술을 씹으며 앞을 바라봤다.
“인간!”
그런데, 이서아는 느꼈다.
순식간에 성현의 분위기가 싹 바뀌었다. 지금껏 싸우던 것과 다르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얼어붙을 것 같은 냉기.
세상 모든 것을 차갑게 보는 시선.
지르힐이었다.
성현의 의식이 끊기자 지르힐이 나타난 거다.
천천히 눈동자만 움직여 주변을 살피던 지르힐의 시선이 이서아에게 꽂혔다.
눈빛만 해도 살벌하다.
이곳의 관리자라는 이서아가 긴장된 숨을 들이마실 정도다.
그리고 지르힐은 이서아를 바라보며 성현의 얼굴을 손으로 만져 봤다.
움푹 들어간 광대와 눈두덩이, 부서진 콧대와 부어오른 입술.
그 상처를 만질 때마다 그렇잖아도 살벌했던 지르힐의 눈빛이 식겁할 정도로 변해 갔다.
그리고 지르힐이 마른침을 삼키는 이서아를 향해 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내 계약자를 건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