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85화 (185/252)

185화

이서아의 시선이 천천히 플로르를 향해 틀어졌다.

저 모습은 환영.

하지만 상관없다.

그게 무엇이든 플로르와 연관되어 있다면 죽이고 싶은 마음이 컸다.

“죽어!”

이서아가 플로르의 환영을 향해 달려들었다.

쉬이이이익!

이서아를 지켜보던 플로르의 눈이 부릅떠졌다.

플로르는 회귀 전 상황을 모르기에 이서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플로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서아는 지르힐과 싸우던 중이다.

아니,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상황이다.

그리고 플로르는 이서아를 도와 지르힐을 공격하려 했다.

당연히 이서아의 입장에서는 두 팔 벌려 환영해야 한다.

‘그런데…….’

이서아가 뜬금없이 플로르를 향해 분노를 쏘아 내더니 소름 끼칠 정도의 살기를 내뿜으며 달려드는 중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로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 다짜고짜 화를 내고 있으니 내심 억울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을 더 이어 갈 수는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이서아의 꽉 쥔 주먹이 플로르의 얼굴로 곧게 다가오고 있었다.

콰아아앙!

하지만 이서아가 내지른 주먹은 플로르에게 닿지 않았다.

어느새 나타난 마물이 이서아의 주먹을 막아서고 있었다.

이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물을 향해 입을 열었다.

“비켜.”

마물은 독수리의 머리를 가진 인간의 형체.

그 마물이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 이서아를 노려봤다.

“소멸의 바다를 관장하는 위대하신 성녀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신기하게도 마물은 정확히 인간의 언어를 내뱉었다.

그리고 노골적으로 이서아를 적대하고 있다.

이서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마물을 향했다.

지금껏 소멸의 바다에서 느껴 본 적이 없는 시선.

게다가 더러운 마력이 마물의 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게 보인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마력은 이서아도 기억하고 있다.

플로르의 것이다.

“……플로르의 손을 잡았어?”

마물이 기괴하게 웃었다.

“지랄 같은 소멸의 바다에서 떠날 수 있게 해 준다는데, 누구의 손을 잡든 무슨 상관입니까?”

마물의 손에서 검은 마력이 흘렀다.

그리고 콰앙, 마물의 몸에서 마력이 폭발했고 이서아는 물러서야 했다.

지금의 공격으로 확실해졌다.

마물은 이서아를 죽이려 한다. 폭력적인 마력을 쏟아 내며 저벅저벅 다가섰다.

이어서 이서아를 향해 다가가던 마물의 걸음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쉬이이이익!

마물의 주먹이 이서아를 향해 거침없이 휘둘렸다.

쩌어어억!

하나하나의 주먹질이 강렬하다.

이서아의 몸이 흔들릴 정도다.

방어는 하고 있지만 뼈가 으스러질 것 같다.

“무(無)라는 개념은 무섭지요! 그런데 계속 이곳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관리자의 장난감! 신의 의지! 내 의지는 없었습니다!”

“……!”

“애초에 우리는 이름 없는 마물! 내 발에 밟히는 흙먼지와 다를 게 뭐가 있겠습니까?”

콱! 콱! 콱!

이서아는 밀리고 있다.

조금 전까지는 가지고 놀 수 있을 마물이었는데, 플로르의 마력을 받은 것만으로 그 차원이 달라졌다.

이서아는 숨을 몰아쉬며 뒤로 피하는 게 전부였다.

하지만 이서아의 눈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녀는 성녀.

소멸의 바다를 관리하는 자.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성녀의 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서아의 시선이 힐끗 성현을 향했다.

‘내가 이 능력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 성현과 싸울 때 그리고 지르힐을 상대할 때, 이서아가 마음만 먹었다면 그 모든 것을 무(無)로 보낼 수 있었다.

그것은 관리자가 가진 특별한 스킬.

존재들도 소멸의 바다에 들어오는 것을 꺼리는 이유.

그런데 이서아는 성현을 상대로 그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마음 어디선가 성현을 무(無)로 돌리고 싶지 않아서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상대는 플로르이며 그녀와 계약한 마물이다.

손 속에 사정을 둘 필요가 없다.

후우우우욱!

이서아의 손에 검은 마력이 휘감겼다.

“원한다면 보내 주마.”

동시에 플로르의 눈이 찌푸려졌다.

‘저건?’

플로르는 이서아의 손에 흐르는 마력이 어떤 스킬인지 알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이냐?’

플로르는 지금도 이서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르힐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사용하지 않았던 스킬을 마물 따위에게 쏘아 내려 하다니.

‘대체 왜 그러는 게지?’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됐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몰라도 된다.

어차피 가벼운 의문이다.

신이 되면 알 수 있는 것, 그때가 되면 세상 모든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지금 하찮은 의문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필요가 없다.

지금은 적대하는 모든 것을 죽여야 한다.

‘가라. 스킬을 사용하기 전에 목을 잘라 버려라. 내 너에게 그만큼의 힘은 줄 수 있느니라.’

플로르의 지시를 받은 마물이 이서아를 향해 튀어 나갔다.

물론 플로르는 마물 따위가 저 스킬을 이겨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보고 싶었다.

존재의 세상에 두려움을 줬던 스킬.

풍문으로만 알려졌던 무(無)에 대한 진실.

그 스킬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려 했다.

‘만약 별것 아니라면…….’

플로르는 소멸의 바다도 집어삼킬 생각이다.

모든 것을 뒤집고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거다.

그리고 이서아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마물을 바라봤다.

‘무(無)로 돌아가라.’

이서아의 손에서 마력이 번쩍였다.

이제 이서아의 손에서 마력이 쏘아질 거다.

그 마력은 밧줄처럼 마물을 묶어 영혼을 태워 버리는 저주와도 같은 것, 그 어떤 것이라 해도 벗어날 수는 없다.

이 스킬은 창조주가 직접 전해 준 것.

피한다 해도 세상 끝까지 쫓아간다.

그런데.

‘……어?’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다.

마력의 움직임조차 없다.

이서아는 다급히 몸을 살폈다.

그런데 몸 어디서도 성녀의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계약자.

보통의 인간과 다를 바 없다.

갑자기 힘을 잃어버린 이유.

그 이유를 모르겠다.

기억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일까? 그 어떤 것도 알 수 없지만 이서아는 피를 마시는 성녀에서 인간 이서아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그 순간 어느새 다가온 마물의 주먹이 이서아의 복부를 가격했다.

콰직!

그게 시작이었다.

콰직! 콱! 콰작!

마물은 이서아의 몸을 난타했다.

이서아의 입술이 터졌고 코에서는 피가 흘렀다.

급기에 검은 핏물이 목을 타고 내뱉어졌다.

“쿨럭!”

마물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성녀라 해서 조금은 겁을 내고 있었는데, 이렇게 손쉽게 두들길 수 있다는 것에 흥분을 느낀 거다.

“내가! 내가 성녀를!”

마물이 이서아의 다리를 걷어차고 바닥에 넘어뜨렸다.

놈의 손에 단검이 나타났다.

이서아의 목을 베고 그 피를 마시려 하는 거다.

“당신을 죽이기만 하면!”

어디선가 들었다.

성녀의 피를 마시면 영생할 수 있다고!

“나도 이름을 가질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이름! 보잘것없는 마물이 아니라 관리자가 될 수 있겠죠!”

마물은 거침없이 이서아의 목을 향해 단검을 쑤셨다.

그 찰나의 순간.

이서아는 시선을 틀어 성현을 향했다.

성현은 아직 검은 갑주를 착용 중이다.

투구 속 눈빛이 기이하게 빛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서아는 생각했다.

‘보고 싶었는데…….’

이서아의 손이 성현을 향해 천천히 뻗어졌다.

그녀는 날아오는 단검, 곧 죽을 마지막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보고 싶었어요.’

마지막 날, 세상은 시간을 역행했다.

과거의 기억을 갖고 돌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

그 주인공은 성현이었고 이서아는 그 대가로 소멸되어야 했다.

그런데 이서아도 과거로 돌아갔다.

문제는 그 과거가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던 그 태초의 시기였던 것.

창조주는 그녀에게 소멸의 바다를 지킬 것을 명했다.

그 이유까지는 모른다.

창조주의 생각을 인간이 상상할 수는 없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계속해서.

그녀는 계속해서 성현과 과거의 사람들을 잊지 않으려 했지만 기억은 희미해졌다.

어느새 창조주가 만든 이 세상의 룰 역시 잊었다.

인간의 셈으로 셀 수 없는 시간은 다른 기억으로 덮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성현이 찾아올 날을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이렇게라도 봤으니 다행일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듣고 싶었는데.

다른 동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는데.

이서아는 씁쓸히 웃으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다.

곧 이서아의 얼굴이 서러움으로 뒤덮였다.

살고 싶었다.

조금 더.

어떻게 만났는데, 한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떠나야 할까.

“싫어!”

이서아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그 순간 ‘퍽!’ 소리가 울렸다.

이서아는 자신의 목을 더듬더듬 만졌다.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서아가 조심스레 눈을 떴다.

‘어…….’

앞에 선 검은 갑주.

이서아의 앞에 성현이 서 있었다.

아니, 지르힐이다.

갑주를 입은 지르힐이 마물의 단도를 우그러뜨리고 있었다.

마물은 자신도 모르게 물러섰다.

무(無)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조차 이기며 이서아에게 달려들었던 마물이다.

하지만 지금 지르힐의 앞에서 근원적인 공포를 느꼈다.

소멸의 바다를 관리하는 관리자를 넘어선 초월자.

마물은 지르힐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퍼억!

단 한 방이었다.

지르힐의 주먹질에 마물의 머리가 터졌다.

뇌수와 핏물 그리고 쪼개진 두개골의 뼈가 사방으로 튀었다.

지르힐이 고개를 틀어 이서아를 바라봤다.

“약속한 10초는 넘겼지만 특별히 감안해 주겠다.”

“……!”

이서아는 성현의 의식을 다른 존재가 채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존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10초, 그 안에 기억해 내지 못하면 죽이겠다던 말.

지금의 권능을 보면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죽음보다 더 두렵게 느껴지는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지르힐이 마른침을 삼키는 이서아를 보며 말을 이었다.

“유성현에게 소중한 자는 내게도 소중하지. 거기서 쉬고 있거라. 기억이 돌아와서 다행이다.”

지르힐의 시선이 플로르의 환영을 향했다.

그리고 이서아를 상관하지 않은 채 자박자박 플로르를 향해 걸었다.

플로르의 환영과 눈을 마주한 지르힐이 반갑게 입을 열었다.

“플로르 맞지? 이렇게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지금도 룰을 위반하고 다니나?”

그 말을 끝으로 지르힐과 플로르는 서로 어떤 말도 없었다.

찬찬히 훑어볼 뿐이다.

태초의 전쟁, 그 이후 첫 만남.

서로의 권능을 확인하는 거다.

플로르는 환영이었고 지르힐은 성현의 의식을 차지했기 때문에 본모습의 전투력은 가늠할 수 없지만 예상할 수는 있다.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강한지.

그리고 지르힐이 가볍게 웃었다.

“여전히, 별것 아니네?”

플로르가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르힐의 비웃음에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갑주를 입은 지르힐, 그 몸에서 풍겨지는 힘은 경외감을 느낄 정도였다.

아직 봉인된 상태이기 때문에 예전의 힘에 미칠 수는 없지만 존재의 세상에는 충분한 위협이다.

‘봉인이 풀리면 안 돼. 절대 안 돼. 막아야 해. 어떻게든 그 안에서 죽여야 해.’

플로르의 머릿속에서는 지르힐을 죽이고 마법사를 소멸할 계획이 떠올랐다 사라지고 있었다.

어차피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

추하게 발버둥 치더라도 이기면 된다.

플로르가 억지로 웃었다.

“조만간…… 정말 마주하게 될 거야. 그릇이나 환영이 아니라 너와 나, 얼굴을 마주 볼 거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