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하고 싶은 말은 다했고?”
지르힐의 건조한 목소리에 플로르의 환영이 입술을 씹었다.
“지르힐, 언제까지 건방을 떨 수 있나…….”
“자신 있어?”
“뭐?”
“자신 있는지 물었는데.”
지르힐이 플로르를 향해 한 발 더 다가섰다.
그리고 냉랭한 눈으로 플로르를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자신 있으면 해 봐. 그런데, 이번에도 혼자 안 올 거지? 또 우르르 끌고 올 거니? 내가 겁나서?”
지르힐은 분명 플로르를 비웃고 있다.
먼 옛날, 태초의 시대.
지르힐 하나를 잡기 위해 수만의 어머니와 군주가 달려들었던 일.
지르힐의 입꼬리가 비틀어졌다.
“설마…… 그 몇만과 함께 날 가뒀다고 해서 네가 이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
플로르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려 왔다.
이런 취급을 받는 것은 그 시대 이후로 처음.
하지만 플로르는 어떤 말도 못했다.
지르힐의 말에 틀린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르힐이 계속 말했다.
“그때는 내가 마법사와 싸우느라 컨디션이 안 좋았는데, 이번에는 어떨까? 내가 정상이라면 네가 수만을 끌고 와도 안 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
“더 할 말 없으면 가라. 찝쩍대지 말고.”
지르힐은 플로르의 환영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게 끝이었다.
둥글게 모인 마력이 환영을 향해 쏘아지며 ‘퍽!’ 소리와 함께 플로르의 환영이 사라졌다.
아직 살아남은 마물과 한아성의 동생은 모두 눈만 껌뻑거렸다.
상대는 플로르였다.
환영이라 해도 상상할 수 없는 마력을 갖고 있다.
그런데…… 한 방이라니.
그들은 지르힐이 성현의 몸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기에 ‘내가 저런 놈과 싸우려 했던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마른침을 삼켰다.
적막 속에서 지르힐의 시선이 이서아를 향했다.
이서아는 마물의 칼에 베일 뻔했던 자신의 목을 더듬는 중이었다.
지르힐이 이서아를 향해 다가갔다.
이서아가 시선을 들자 지르힐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하루 정도는 휴식을 취해야 할 거야. 그때까지 옆에서 간호 잘 해.”
“네?”
“내가 할 수는 없어서.”
이서아를 상대하며 성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거기에 지르힐까지 들어와 버렸으니 인간의 몸이 버텨 내기란 어려웠다.
이대로 지르힐이 성현의 몸을 계속 사용한다면 심장마저 멎어 버릴 게 분명하다.
“알아들었지?”
이서아는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르힐이 엷은 미소를 보이며 눈을 감았다.
동시에 성현의 몸을 뒤덮고 있던 갑주가 걷히며 피부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이어서 성현은 비틀거리다가 곧 무너지듯 쓰러졌다.
이서아가 다급히 성현의 몸을 받쳐 안았다.
* * *
성현의 무의식.
지르힐의 모습이 그곳에 나타났다.
마법사가 눈을 반짝이더니 지르힐을 향해 다급히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땠지?”
“뭐가?”
마법사의 눈빛에는 기대가 가득했다.
갑주를 사용한 그 느낌을 듣고 싶어서다.
하지만 지르힐은 심드렁했다.
관심 없는 시선으로 마법사를 힐끗 본 후, 한쪽에 누워 있는 성현을 향해 걸어갈 뿐이었다.
마법사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지르힐을 향해 다가서서 물었다.
“내 갑주, 어땠냐고 물었다.”
지르힐이 한숨을 내뱉으며 천천히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솔직히 말해 줄까? 인간이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
“뭐라?”
“갑주 자체에서 일어나는 처참할 정도의 살기, 의식을 무너뜨리는 광기, 심연을 들여다보는 자체의 의식…… 그건 말 그대로 혼돈. 아무리 유성현이라 해도 버틸 수 없을 거야.”
“그래서?”
마법사의 눈이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르힐은 지금도 무심하다.
“‘그래서’라니?”
“유성현에게 갑주를 입히지 않을 텐가!”
마법사의 계획은 간단하다.
성현에게 갑주를 입히는 것.
성현이 광기 어린 마력에 의존하다가 결국에는 마력 없이는 살 수 없게 만드는 것.
즉, 미쳐 버리게 하는 것.
그래서 성현의 몸을 차지해 세상을 멸하는 것.
그런데 지르힐은 마법사의 계획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갑주를 사용하지 못하게 막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사는 지르힐이 자신의 계획을 망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지르힐, 하나만 묻자. 너 역시 이 세상을 무너뜨리고 싶을 텐데, 아니었나? 나와 같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너한테도 있지 않은가? 넌 그저 룰을 지키려 했을 뿐임에도 존재들에 의해 셀 수 없는 시간을 갇혀 있었다. 저놈들의 이기적인 생각으로 네가 희생해야 했다. 그런데 왜 나를 방해하려 하는 거지?”
“…….”
“설마, 내 예상이 맞는 거냐? 수십억, 어쩌면 수백억 년을 살아온 네가, 고작 100년, 그 찰나의 순간도 살 수 없는 인간에게 정을 느낀 거냐? 그 대상이 저 유성현이고? 지르힐, 넌 존재다. 생명체 따위와…….”
지르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마법사를 향해 시선을 틀었다.
“대꾸하기 싫은데, 계속 두면 어떤 더러운 말이 나올지 모르겠네.”
“나와 생각이 다른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라고? 그 이유를 말하라.”
“난 지금도 룰을 따를 뿐이야. 어긋난 존재의 세상을 멸하고 룰을 따르는 생명체를 내버려 두는 것, 그게 관리자야.”
“관리자?”
“어, 관리자.”
지르힐의 말에 마법사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끌끌 웃던 목소리가 공간을 울릴 정도로 터져 나왔다.
지르힐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 마법사의 웃음소리는 처참할 정도의 살기로 변하기 시작했다.
“하! 룰을 따라? 고작 룰? 이 세상은 창조주가 버렸다! 장난감처럼 만들고 쓰레기처럼 던졌다! 관리자라 만들어 둔 난 망령이 되었고! 넌 탑에 갇혀 있다는 게 그 증거지! 그런데…… 그 가증스러운 룰? 이 세상에 룰이 지켜지는 곳이 어디에 있지?”
마법사의 눈은 어느새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다.
시뻘건 눈동자로 지르힐을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다.
하지만 지르힐은 달랐다.
안쓰러운 눈으로 마법사를 바라볼 뿐이었다.
“마법사, 난 룰을 지키라고 만들어졌어. 그런데, 그걸 지키지 않으면 내 존재의 이유가 어디에 있어?”
“……!”
“우리는 룰을 지키라고 만들어진 존재다.”
교과서적인 답변에 마법사의 입가에 고소가 띄워졌다.
곧이어 마법사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역시, 너와 나는 함께할 수 없을 것 같구나.”
그게 끝이었다.
지르힐과 마법사는 어떤 말도 없이 서로를 노려봤다.
살기 넘치는 눈빛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억겁의 시간 동안 풀리지 않은 복잡한 감정이 얽히고설켰다.
지르힐과 마법사는 느꼈다.
눈앞의 존재와 언젠가 반드시 싸워야 한다는 것을.
한때 마법사와 지르힐은 서로를 남매처럼 아꼈다.
하지만 관계는 어긋났다.
그 모든 시작은 플로르였지만 이제 그것은 상관없다.
어긋난 관계를 메꾸기에는 서로의 뜻이 너무도 달라졌다.
평행선을 달린다면 언젠가는 서로를 향해 칼을 겨눠야 했다.
그때였다.
“끔.” 소리와 함께 성현의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지르힐은 마법사에게 그만 말하라는 신호를 보낸 후 성현을 향해 다가갔다.
성현은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성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지르힐이 마법사를 상대할 때와는 달리 친절히 입을 열었다.
“그대, 이곳은 무의식의 세계다. 그대는 아직 이곳에 있어야 한다. 신체를 움직이려면 조금의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구나.”
“나…… 기절했었나?”
성현이 상체를 일으키며 지르힐과 마법사의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운을 눈치챘다.
성현이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야, 둘이 싸웠어? 좀 친하게 지내.”
분위기를 풀기 위해 가볍게 던진 농담인데, 지르힐과 마법사는 시선도 주고받지 않았다.
* * *
그 시각.
지르힐의 마력을 맞아 사라졌던 플로르의 환영이 다시 나타났다.
플로르가 또 보낸 거다.
물론 가까이 다가서지 않고 먼 하늘, 그곳에 서서 성현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히 가까이 다가섰다가 지르힐의 힘에 또 박살 나고 싶지는 않았다.
플로르의 시선이 천천히 성현을 향했다.
‘다시 만난 지르힐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어.’
플로르는 지르힐의 힘을 인정했다.
지르힐은 비록 팔 한 짝만 자유로운 상태였지만 그 마력은 두려울 정도였다.
‘물론 내가 본신으로 현신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게야.’
플로르도 환영에 많은 마력을 보낼 수 없는 상태였다.
만약 본신을 현신해서 지금의 지르힐과 싸우게 된다면 가볍게 없앨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본신을 현신하는 것은 어려운 일.’
플로르는 창조주의 저주를 받았다.
벗어날 수 없는 성에 갇힌 채 계속해서 출산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하지만 그곳 역시 곧 벗어날 수 있다.
플로르는 지르힐을 통해 그릇을 통해 마음껏 마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문제는…….’
문제는 따로 있다.
플로르는 태초의 전쟁, 그 마지막 순간 지르힐과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그것은 지금 생각해도 악몽.
코어를 몸에 받으며 강해진 존재 수만이 달려들었지만 불길로 달려드는 나방들처럼 타 죽어야 했다.
‘그래서…….’
플로르는 지르힐이 자유롭게 되었을 때, 모든 힘을 회복하게 될 그날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막을 수 있을까? 지르힐을? 마법사를? 저 두 존재의 힘을?’
플로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했다.
만약 지르힐과 마법사, 두 존재가 힘을 합치면 전쟁은 더 끔찍해질 터였다.
‘정말 존재의 세상이 끝날 수도 있어.’
플로르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이 위기를 벗어날 방법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곧바로 유성현을 죽이면 될까?’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다.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지르힐이 또 다른 그릇을 찾을 수도 있어. 그럼 소멸의 바다에 가둬 버릴 수는 없을까?’
그것 역시 힘들 것 같다.
지르힐이라면 소멸의 바다를 관리하는 관리자 정도는 언제든 잿더미로 만들 테니까.
‘그것도 어려워…….’
플로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 생각 저 생각을 해 봤지만 방법이 없는 듯했다.
모든 게 다 벽에 가로막힌다.
그런데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 가던 플로르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어쩌면.’
플로르는 지금껏 위기 상황만을 떠올렸다.
그런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지금의 위기는 큰 기회가 될 수 있어.’
존재의 세상을 통합할 수 있는 기회.
그들의 왕이 될 수 있는 순간.
다시 말해, 모든 존재에게 존경받는 신이 될 가능성.
지르힐과 마법사라는 존재를 이용하면 그 모든 게 가능하다.
위협적인 적이 나타나면 존재들이 손을 잡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순간 에느가인만 찾아낸다면?’
물론 에느가인은 아직 베일에 감춰져 있다.
하지만 신하들을 통해 그 베일이 점차 벗겨지는 중이다.
플로르는 곧 에느가인을 손에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기회야.’
지금껏 플로르는 지르힐을 생각하며 겁을 먹고 있었다.
아니, 분노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지르힐은 예전과 똑같이 자신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자신은 그때와 달리 엄청난 존재가 되었는데, 탑에 갇힌 지르힐 따위가 아직도 자신을 깔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고맙다, 지르힐.’
지금 이 세상에도 플로르의 앞에 선 강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르라헬, 그리고 빌어먹을 어머니급의 존재들.
하지만 지르힐이 나선다면, 그리고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들 모두는 플로르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려야 할 거다.
플로르가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누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
플로르는 자신만을 우선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