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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87화 (187/252)

187화

* * *

플로르의 성.

플로르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연기가 스르륵 걷혔다.

환영을 통해 소멸의 바다를 지켜보던 플로르의 시선이 현실로 돌아온 거다.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확인한 플로르가 눈을 감았다.

‘하…….’

아무리 플로르라 해도, 환영을 보냈다 해도 소멸의 바다와 이계는 시간의 밀도가 다르다.

이곳의 1초는 그곳의 1년.

뒤바뀐 시간을 적응할 순간은 필요했다.

잠시 후, 플로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그 움직임과 동시에 모든 신하가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시작될 명령을 기다렸다.

그런데 플로르의 명령은 그들이 듣기에 정말 뜬금없었다.

“올리비아에게 당장 돌아오라고 전하라!”

올리비아는 플로르의 여덟 번째 딸, 플로르의 지시를 받고 유성현을 죽이기 위해 왕가의 계곡에 막 도착했다.

그런데, 당장 돌아오라니.

신하들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리자 플로르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울렸다.

“뭐 하고 있는 게야! 당장!”

플로르는 소멸의 바다에서 지르힐과 마주했다.

비록 팔 한 짝이 자유로울 뿐이지만 그 경이로운 마력을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만약 성현이 돌아와 올리비아와 마주한다면, 그리고 성현의 몸을 지르힐의 의식이 차지하게 된다면, 올리비아는 반드시 죽고 만다.

그것은 전력의 약화.

조만간 있을 대전쟁을 생각한다면 지금의 후퇴는 당연하다.

다시 한번 플로르의 목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어서!”

그제야 눈을 깜빡이던 신하들이 다급히 허리를 굽혔다.

“뜨, 뜻을 받들겠습니다.”

신하들은 소멸의 바다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다.

지금 플로르의 지시는 단지 변덕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녀의 히스테리는 유명하니까.

하지만 신하들이 몸을 굽힌 이유는 하나다.

플로르의 지시는 그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

그게 이 성의 룰이다.

한 신하가 빠르게 올리비아와 연락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플로르의 지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이어진 플로르의 목소리는 올리비아에 대한 복귀 명령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나머지는 모든 어머니와 군주에게 전하라. 우리의 싸움을 그만두고 지르힐을 대비해야 한다고!”

“……!”

순간 모든 공간을 침묵이 지배했고 그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그저 멍하니 플로르를 바라보는 게 전부였다.

‘……지르힐?’

듣기만 해도 두려운 이름이며 절대 잊을 수 없는 단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수많은 어머니와 군주를 죽이며 잔인하게 웃던 지르힐의 얼굴은 지금도 그들의 눈에 선하다.

피범벅이 되어서도 좀비처럼 싸우던 지르힐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다.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가 긴박한 걸음으로 앞에 섰다.

“서, 설마 지르힐이 풀려나는 겁니까?”

신하들은 플로르가 농담을 내뱉는 스타일이 아니란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발 이번 한 번만큼은 농담이었으면 했다.

지르힐의 계약자가 유성현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 유성현이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강해진다는 것도 충분히 아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계약자만 까불고 다닐 뿐, 지르힐은 탑에 갇혀 있고 풀려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르힐이라니.

붉은 갑옷을 입은 신하가 다시 물었다.

“정말 지르힐이 풀려나고 있습니까?”

“아마도.”

“네?”

모든 신하는 ‘아마도’라는 단어에 다른 뜻이 있는지 생각해 봤다.

‘아마’라는 단어는 그저 가능성이 크다는 뜻. 확정이라는 뜻을 품고 있지는 않다.

“고작 가능성만으로 다른 어머니와 군주들에게 지르힐의 이름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플로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도 위험하다. 마법사가 단지 호칭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마법사는 의식을 갖고 있었고 창조주가 숨겨 둔 갑주마저 되찾았다!”

내부의 공기가 또 한 번 얼어붙기 시작했다.

광기 어린 마법사.

그 역시 다시 만나고 싶지 않던 존재.

창조주의 저주를 받아 갑주를 빼앗기고 망령으로 남아 버린 관리자.

“갑주를 찾았다는 것은 진실이고 조만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거다. 그리고 그놈의 목적이 무엇이겠느냐?”

마법사의 목적은 당연히 세상을 멸하는 것.

“가만히 있다가 잡아먹히겠느냐? 아니면, 싸우고 싸워서 진정한 자유를 손에 얻겠느냐?”

“……!”

“다시 전하겠노라. 너희들은 각 어머니와 군주를 찾아가 전하라. 지금은 그 옛날, 태초의 시대에 있었던 전쟁을 마무리해야 할 시간이라고.”

신하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히며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그 모습을 보며 플로르가 흡족하게 웃었다.

플로르의 신하들은 백전노장, 그 옛날부터 함께 있던 자들이다.

이들이 지르힐과 마법사의 이름에 몸을 가늘게 떨고 있다.

다른 어머니와 군주라 해서 다르지 않을 거다.

‘모두 겁을 먹겠지. 기겁할 수밖에 없지.’

플로르는 그들의 위에 설 생각이다.

지르힐과 마법사라는 강한 적을 앞에 두고 그들을 대표할 거다.

물론 그 전에 전제 조건이 있었다.

에느가인을 찾아야 한다.

플로르가 한 발, 두 발 계단을 내려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군주들에게 또 전하라. 지르힐과 마법사를 해결할 최후의 방법은 에느가인이라고. 그 정보를 모아 다 같이 공유해서 창조주의 힘을 얻자고!”

각 존재는 억겁의 시간 동안 에느가인을 찾아다녔다.

그 정보는 무수할 것이고 그 정보를 얻으면 에느가인을 손에 얻을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

“에느가인의 힘은 우리 모두가 평등하게 나눌 것이라고 전하라.”

물론 평등하게 나눈다는 말은 거짓말, 플로르는 그 모든 정보를 독식할 생각이다. 또 교묘한 방법으로 잘못된 정보를 나누어 줄 계획을 갖고 있다.

에느가인은 자신의 손에 들어와야 한다.

* * *

왕가의 계곡.

금빛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는 시체 더미 위에 앉아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발까지 까닥까닥 움직이며 오랜만에 나온 바깥나들이를 즐기는 중이다.

그런데 그녀에게서 즐겁게 흘러나오던 허밍이 갑자기 뚝 그쳤다.

그리고.

“3초 지났네.”

올리비아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그러자 ‘퍽!’ 소리와 함께 한 계약자의 머리가 터져 버렸다.

사방으로 뇌수와 뇌 조각이 징그럽게 튀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다.

이제 몇 남지 않은 계약자와 꼬마 그리고 서은서 마지막으로 열다섯의 존재, 그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 있었다.

올리비아는 생명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즐긴다는 표현을 넘어 그저 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그야말로 사이코.

성현이 돌아올 때까지 3초에 한 명씩 죽이겠다고 선언하더니 정말 칼같이 시간을 맞추고 있다.

그것도 콧노래를 부르다 말다 하면서.

다시 콧노래를 부르려던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돌아오라고?’

머릿속에 울린 플로르의 명령을 듣게 된 거다.

‘왜? 난 이제 막 이곳에 왔는데?’

-돌아오시랍니다. 어머니의 명령입니다.

‘하…….’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폴짝 땅으로 내려오며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자들을 둘러봤다.

‘좋아. 갈게.’

올리비아는 아쉬웠다.

유성현을 죽이고 플로르에게 확실히 인정받을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 거다.

“알았어, 간다고!”

올리비아가 허공에 대고 짜증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과 동시에 모두는 고개를 홱 들어 올리비아를 바라봤다.

‘간다고?’

분명 올리비아는 그렇게 말했다.

3초에 한 명씩 죽이던 존재가 떠난다고 하자 모두의 얼굴에는 자신도 모르게 화색이 돌았다.

살 수 있다.

목숨은 구한 거다.

다시는 이계에 발을 들이지 않을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지만 그냥 가면 섭섭하고.”

올리비아의 낭랑한 목소리에 모두의 표정이 식겁해졌다.

얼굴이 창백해지고 눈동자가 붉어졌으며 팔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겁에 질린 저 모습은 올리비아가 가장 좋아하는 얼굴이다.

올리비아가 그들의 그 표정을 즐기며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당연하지만 그녀의 손바닥이 향한 곳은 무릎을 꿇고 앉은 자들.

“죽여 줄게.”

유성현을 볼 수 없다면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자들을 죽이고 가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중에 만났을 때, 유성현의 분노하는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억울해? 너희도 내 동생 죽였잖아.”

“……!”

“내 동생 죽일 때 어땠어? 신났지? 즐거웠지? 너희가 뭐라도 된 줄 알았지?”

올리비아의 손에 검은 기운이 회오리처럼 모여들었다.

험악한 마력에 무릎 꿇은 모두는 삶의 의지를 버리고 있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릴 뿐이다.

올리비아가 깔깔깔 웃었다.

“너희도 똑같이 죽여 준다는 데 왜?”

모두 고개를 숙였다.

죽음의 순간을 애써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서은서는 달랐다.

그녀는 입술을 잘근 씹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그런데 인간으로 태어나서 하염없이 성현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화가 났다.

그리고 어차피 죽을 것, 꿈틀거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도 강해졌잖아?’

서은서가 튀어 나갔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다.

지금껏 고개 숙이고 있던 계약자들, 그들 역시 누군가 움직이기를 바라고 있었나 보다.

공포에 질려 있던 그들도 고양이에게 덤비는 쥐처럼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올리비아가 활짝 웃었다.

“그래야지, 그래 줘야지.”

올리비아는 벌레 같은 인간들이 덤비는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야 재밌지!”

올리비아가 즐기는 것은 학살.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막을 울렸다.

그리고 퍽, 가장 앞서 달려오던 사내의 머리가 터졌다. 뇌수와 함께 핏물이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어서 후우우우웅! 그녀의 옷깃이 펄럭이며 주변으로 수백 개의 검은 구체가 만들어졌다.

그 하나하나에 담긴 마력이 끔찍할 정도다.

바닥에 있던 모래가 중력을 역행하듯 검은 구체를 향해 떠오르고 있었다.

콰콰콰콰콱!

올리비아의 손짓에 따라 구체가 쏘아졌다.

퍽!

계약자의 상체가 사라지고 하반신만 남았다.

퍽!

한 계약자는 기껏 피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구체가 지나가고 난 자리에 옆구리가 텅 비어 있었다.

‘어…….’

자신의 텅 빈 옆구리에서 내장이 흘러내렸다.

후드드득.

“끄아아아아악!”

그 비명 소리를 들으며 올리비아는 눈을 감았다.

“이게 선율이지.”

끔찍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계약자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저마다의 병장기를 들고 올리비아를 향해 도약했다.

“죽어어어!”

순간 모래가 들썩거리더니 거대한 뱀이 튀어나왔다. 그리고 도약한 계약자들을 향해 아가리를 쩌어억 벌렸다.

콰득!

계약자가 그 이빨에 씹혔다.

허리가 꺾이며 사방에 피가 튄다.

뱀은 계약자를 한 번에 삼킨 후 소름 끼치는 눈빛으로 계약자들을 살폈다.

올리비아가 뱀의 비늘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가야, 네 먹이다. 오랜만에 포식을…….”

올리비아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느껴지는 마력.

생소한 느낌.

이 정도 힘이면 자신과 비견될 정도.

‘……뭐지?’

올리비아의 시선이 천천히 마력이 나타난 쪽으로 틀어졌다.

그곳에 거무튀튀한 갑주를 입은 성현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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