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하지만 올리비아는 성현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플로르의 성에 있을 때 지켜봤던 성현은 갑주를 입고 있지 않은 상태였고 지금처럼 엄청난 마력도 뿜어낼 수 없었다.
물론 당시의 성현도 강하기는 했지만 생명체의 범주 안에 속해 있었을 뿐.
“……넌 누구지?”
게다가 성현은 소멸의 바다를 다녀왔다.
향하는 길에서 지체한 시간을 따져도 성현이 되돌아온 것은 5분이 되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이 정도로 증폭된 마력을 갖고 나타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
거기에 투구까지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누구냐고 물었다!”
올리비아가 다시 한번 벼락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큰 목소리는 초조함을 나타낸다. 난데없이 나타난, 자신과 비슷한 마력을 지닌 성현에게 긴장을 느껴서다.
하지만 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투구 속 건조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필 뿐이었다.
성현의 입장에서는 수십 년 만에 돌아온 거다.
오랜만에 마주한 서은서와 꼬마가 반가웠지만 상황을 보면 반가움을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
머리가 폭발해 죽은 시체, 내장을 흘리고 있는 시체, 사방은 핏물과 뇌수 그리고 찢어진 뇌로 가득했다.
그 많았던 계약자들의 대다수가 죽어 있고 서은서가 노예로 삼았던 열다섯의 최하급 존재는 겁에 질려 있다.
‘하…….’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이계가 위험한 곳이란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살육이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리고 조금만 지체했더라면 소중한 인연을 잃어버릴 뻔 했다.
그렇게 성현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멎은 곳은 올리비아였다.
“다 네가 한 일인가?”
금빛 드레스를 입은 올리비아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럼, 누가 했겠어?”
“올리비아, 맞지?”
“……나를 알아?”
올리비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이곳에 와서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벌레를 죽이면서 이름까지 밝힐 필요성을 못 느껴서다.
그런데 처음 보는 생명체, 그것도 자신과 비슷한 힘을 가진 것이 와서 자신의 이름을 거론한다는 게 뭔가 섬뜩했다.
“누구냐고 물었잖아!”
올리비아의 입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하지만 성현은 올리비아와 달리 여유롭게 대답했다.
“유성현.”
“……!”
그 말에 올리비아는 물론이고 이곳에 있는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서은서 그리고 꼬마까지도.
특히 열다섯의 최하급 존재와 살아남은 몇 명의 계약자는 몸까지 바르르 떨었다.
“진짜? 정말 유성현이라고?”
“도대체 뭘 한 거지? 뭘 했기에 저렇게 변한 거지?”
“아이템발인가?”
“저거, 그 카심이라는 왕이 준 거야?”
“그렇겠지!”
그들은 성현이 갑작스레 뒤바뀐 분위기를 아이템에서 찾았다.
이곳은 왕가의 계곡, 최상급의 아이템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다.
성현은 카심과 함께 어디론가 떠났었고 그 카심이 강력한 아이템을 줬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템 하나로 저런 식으로 강해진다고?”
“그게 말이 돼?”
계약자들은 혼란스러웠다.
아이템의 중요성은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프다.
하지만 올리비아급의 존재와 비슷할 정도로 마력을 증폭시켜 주는 아이템에 있다는 것은 들어 보지 못했다.
창조주가 직접 만든 아이템이라 생각하는 자는 이곳에 없었다.
“유성현?”
올리비아가 활짝 웃으며 성현을 바라봤다.
그리고 성현을 향해 한 발을 내디디며 말을 이었다.
“반갑다. 내 너를 만나고 싶었다. 네가 나를 어떻게 아는지 몰라도 상관없다. 내 오늘 너를 죽여 주마.”
올리비아의 머릿속에는 복귀하라는 메시지가 계속해서 들어오는 중이었다.
-어머니의 지시입니다. 돌아오세요! 유성현과 싸우지 말고 어서 오십시오!
하지만 올리비아는 가볍게 무시했다.
성현을 죽이면 플로르의 사랑을 독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플로르는 꽤 오랜 시간 유성현을 관찰했고 최근에는 눈엣가시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런 유성현을 내가 직접 처리하면 예쁨받는 것은 당연하지! 어쩌면 언니들을 제치고 최고 서열을 부여받을 수도 있어.’
올리비아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력을 끌어 올렸다.
“죽여 주마!”
성현은 올리비아의 주변에서 마력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 움직였다.
목에서 두두득 몸이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올리비아…… 딱 팔 한 쪽만 빼앗아 주마.’
성현은 올리비아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널 죽이는 것은 다음이다. 아직은 아니야.’
이곳에서 죽은 계약자를 생각하면, 그들을 장난감처럼 여기며 터뜨린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죽여도 모자라다.
하지만 성현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올리비아를 이용해야 해.’
올리비아, 플로르의 여덟 번째 딸.
성현은 잠시 회귀 전을 떠올렸다.
존재와 존재들의 전쟁이 일어나던 때, 그 처참하던 날은 산 자가 죽은 자를 부러워하던 날이었고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편하게 죽을 수 있을지 고민하던 날이었다.
피 냄새가 가실 줄 몰랐고 함께 아침 식사를 했던 동료가 점심에는 시체가 되어 쓰러져 있는 게 이상하지 않았던 때였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달랐다.
올리비아는 전쟁을 혼란의 기회로 여겼다.
‘언니들을 죽일 수 있는 타이밍이라 생각한 거지.’
올리비아는 플로르가 전해 주는 사랑에 목마른 존재.
플로르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이코.
언니들이 없으면 플로르에게 관심과 사랑을 독점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언니들을 도륙했다.
‘그렇게 올리비아의 손에 죽은 언니가 셋.’
올리비아는 자신을 아군이라 생각하고 방심하던 언니들의 등을 찔렀다.
그리고 플로르에게 달려가 가증스러울 정도로 눈물을 흘리며 언니들이 적에게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올렸다.
전장의 혼란을 틈타 노린 악행이었다.
‘물론 최후에는 비참했어.’
결국 플로르는 그 사실을 알게 됐고 올리비아를 잔혹할 정도로 찢어 죽였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
성현은 잠시 방금 전, 세트리아니와 싸우던 때를 떠올렸다.
세트리아니는 플로르의 막내딸.
세트리아니가 나타났을 때 모든 계약자는 얼어붙은 것처럼 멎어 있었다.
‘하지만.’
올리비아의 계약자이며 세계 랭커인 유리 안 드레이만이 세트리아니에게 달려들었고 처참하게 죽었다.
‘유리 안 드레이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세트리아니 같은 존재를 처음 마주하면 움직일 수 없는 게 일반적인 일.
‘그런데 움직였다는 것은 올리비아의 손길이 있었겠지.’
올리비아의 플로르를 향한 독점욕은 회귀 전과 다르지 않다.
성현은 그 미친 성격을 이용하고 싶었다.
조금만 컨트롤한다면 올리비아는 플로르의 딸들을 죽여 주는 고마운 존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런 고마운 존재를 지금 없앨 수는 없어.’
그래서 성현은 올리비아를 살려 둘 생각이다.
팔 한 짝만 뽑아 버린 채로.
그때였다.
“가라!”
올리비아의 목소리와 함께 옆에 있던 거대한 뱀이 하늘로 솟구쳤다.
공중에 오른 놈이 이무기가 되어 꽈리를 틀자 번쩍거리는 빛과 함께 우르르르 먹구름이 몰려든다.
성현은 무심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저 이무기는 번개를 만들어 내려 한다.
번개의 상징인 지르힐의 계약자를 앞에 두고.
저런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두면 안 되는 일.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창으로 변하는 동시에 성현은 번쩍거리는 하늘을 향해 성현이 뛰어올랐다.
쿠르르르릉!
이무기의 힘에 의해 하늘이 요동쳤다.
천둥과 번개, 이어서 사막을 적시는 거센 빗줄기가 쏟아진다.
그리고 이무기의 시선이 성현을 향했다.
벌건 눈동자로 성현을 노려보던 놈이 아가리를 벌렸다.
-카아아아악!
하늘이 찢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성현을 향해 번개가 쏘아졌다.
콰르르릉!
번개에 닿은 성현의 몸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을 정도로 번쩍였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그 빛은 곧 전등이 꺼진 것처럼 사라졌다.
대신 성현의 손에 작지만 엄청난 스파크를 내뿜는 공이 나타났다.
이무기의 힘이 성현의 손에 흡수된 거다.
“끝인가? 더 없어?”
성현의 느긋한 목소리에 이무기가 눈을 깜빡였다.
성현의 공격이 시작되기도 전이었지만 승패는 이미 갈렸다.
이무기는 곧 성현의 창에 썰려 죽을 운명이다.
그리고 성현이 이무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였던 번개가 응축된 힘으로 이무기에게 닿았다.
꽈아아앙!
하늘을 바라보던 올리비아는 한숨을 내뱉었다.
올리비아 역시 이무기가 토막토막 잘려 땅으로 떨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이무기를 올려 보낸 것은 성현의 실력을 가늠하기 위해서였는데.
‘마력만 낭비했네.’
올리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실패한 계획에 신경 쓰고 있을 필요는 없다.
‘메인 디시를 준비해야지.’
올리비아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계약자와 최하급 존재가 보인다.
‘이놈들을 죽이면 유성현은 분노할 거야.’
올리비아 역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존재, 그동안 많은 인간을 지켜봤기에 분노한 인간이 평상시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인간은 분노하면 이성을 잃는다.
울분을 토하며 마구잡이로 공격한다.
‘그 공격은 허점투성이야.’
올리비아는 그 빈틈을 노릴 생각이었다.
“너희부터 죽여 줄게. 걱정하지 마. 단숨에 죽일 생각이니, 아프지는 않을 게야.”
하지만 올리비아는 곧바로 공격을 시도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 또 메시지가 울렸기 때문이다.
-돌아오시랍니다! 지르힐과 마법사가 나타날지도 모른답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이번에도 메시지를 외면했다.
올리비아는 태초의 전쟁 이후에 탄생한 존재.
지르힐과 마법사의 악명을 동화 속 이야기처럼 들어왔다.
먼 옛날, 악당이 살았지만 어머니와 군주가 힘을 합쳐 몰아냈다는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
올리비아에게 지르힐은 존재의 세상에서 추방된 자, 마법사는 망령일 뿐이었다.
‘지르힐이 뭐? 마법사가 뭐?’
그리고 올리비아는 지금껏 진정한 강자와 싸워 본 적이 없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경험한 적도 없다.
유성현을 처리하고 플로르에게 달려가 예쁨받을 생각만 가득했다.
올리비아가 그들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콰아아아앙!
올리비아는 모든 마력을 개방한 상태였고 그 한 걸음만으로 지진이 난 것 같았다.
모랫바닥이 움푹움푹 패며 중력이 역전된 것처럼 모래가 하늘로 떠올랐다.
또 한 걸음.
콰아아앙!
이번엔 공간이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일그러졌다. 엄청난 마력에 공기가 반응한 거다.
올리비아가 겁먹은 자들을 보며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들었다.
저 손이 튕기면 이곳에 있는 모두는 죽고 말 거다.
“걱정하지 마라. 아프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서 그녀의 손가락이 딱, 소리를 냈다.
파아아앙!
모래 폭풍이 훅 하고 일어났다.
그런데 죽은 자가 느껴지지 않는다.
자신의 마력이 이동한 곳에 모든 생명이 살아 있다.
“어?”
올리비아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모래바람이 잦아들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앞에 검은 갑주를 입은 성현이 서 있었다.
올리비아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다른 목숨까지 생각하며 나와 싸울 수…….”
올리비아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 그녀의 눈앞에 어느새 성현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성현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으며 무거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팔 하나로 끝내자. 어차피 너는 도마뱀처럼 재생할 수 있잖아?”
“……뭐?”
재생할 수 있어도 아픈 것은 아픈 거다.
올리비아의 눈이 떨려 올 때, 성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입 꽉 다물어라. 비명 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으니까.”
“뭐라는 거야!”
동시에 성현이 올리비아의 팔을 뽑아 버렸다.
콰드득!
“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