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를 건드리면 벌어지는 일-191화 (191/252)

191화

“……바보?”

성현이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이서아가 입을 연다.

“바보 맞네요, 이런 식으로 가는 것 보면.”

“……어?”

“사람이 바뀐 게 없어.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뚝뚝 해가지고. 뚝배기야 뭐야?”

“서, 서아야…….”

“이럴 때, 감동적인 말 한마디라도 먼저 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모른 척했다고 그냥 가기가 어디 있어요?”

성현은 멍했다.

지금 이서아가 하는 말이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성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서아가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돌아왔습니다.”

“…….”

“돌아오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리고…… 혼자 하려고 하지 마세요. 플로르는 같이 막고 싶어요.”

성현이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혼자 할…….”

“저는 태초의 세계로 회귀하면서 어찌 된 일인지 권능은 그대로 지니고 있었어요.”

이서아의 권능은 예지다.

단순 미래를 보는 게 아니라 현재의 모든 상황을 종합해서 수천, 수만 가지의 변수를 읽어 낼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미래를 높은 확률로 맞혀 낼 수 있는 거다.

“제 능력을 써 주세요.”

“…….”

이서아는 상상할 수 없는 시간을 외롭게 보내왔다.

그리고 이제야 다시 현실로 돌아왔고 부모님을 만나게 됐다.

이 행복을 이어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마음이다.

하지만 지금 이 세상은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다.

플로르가 있는 이상 이 현실이 언제 망가질지 모른다.

플로르는 탐욕 그 자체.

“돕게 해 주세요.”

이서아는 간절했다.

성현이 플로르를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지르힐과 마법사의 권능을 갖게 되었지만 그 확률은 오르지 않았다.

이유는 그들의 병력.

플로르를 비롯한 어머니급의 존재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출산을 이어 왔다.

그것은 창조주의 저주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병력을 늘려 줬다.

태초의 전쟁을 기억하면, 당시 지르힐은 엄청난 숫자의 존재들을 상대했고 상당수의 존재를 박살 냈지만 결국 탑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 그 전쟁이 다시 벌어진다면…….’

지르힐은 그때보다 몇 배나 많은 존재를 상대해야 한다.

‘결과는 다르지 않을 거야.’

절대 이길 수 없다.

그나마 가능성을 올리려면 이서아가 성현의 곁에 있어야 한다.

이서아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 * *

왕좌에 앉아 있던 플로르는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올리비아가 홀로 수련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야지…….’

존재는 태어나면서부터 등급이 정해진다.

그리고 최상위 등급의 존재에 가까울수록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피곤하게 몸을 놀리지 않아도 충분히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비슷한 마력을 가진 성현에게 처참하게 깨졌다.

말 그대로 마력만 믿고 까불다가 단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팔이 뽑히고 갈빗대가 으스러졌으며 치아가 모두 뽑혀 버렸다.

그게 약이 된 것 같다.

올리비아는 지금 살육을 위한 기술을 익히고 있다.

물론 그 노력이 성현을 죽이려는 게 아니라 그 자매들을 타깃으로 한 것이지만 플로르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다.

그리고 알았다 해도 가만히 놔뒀을 거다.

그 자매들이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녀들 역시 올리비아에게 잡아먹힐지 모른다는 긴장을 느낀 거다.

“준비가 다 끝났다고 합니다!”

한 신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념에 빠졌던 플로르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또각또각, 높고 긴 계단을 내려왔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색 드레스, 그녀의 모습은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답다 할 수 있었다.

계단에서 내려온 플로르가 계속해서 앞으로 향했다.

그 뒤를 수백의 신하들이 쫓았다.

플로르의 뒤를 쫓는 신하들의 마력은 대단하다.

하급 군주였던 나모르 정도는 손쉽게 찢어 죽일 자들이다.

그들의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무서울 정도로 들려왔다.

플로르와 그들이 도착한 곳은 성에 마련된 공터.

아무것도 없으며 척박한 사막이 끝없이 펼쳐진 곳.

어둠 속에 파묻힌 그곳은 음산하기만 했다.

플로르는 잠시 그곳에 서서 주변을 살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곳에 있어야 하느냐?”

창조주의 노여움으로 플르로는 가장 극악의 땅에 머물러야 했다.

에느가인을 탐했던 죄로 억겁의 시간 동안 이곳에 갇혀 지낸 거다.

그리고 플로르만 그 죄를 어깨에 짊어진 게 아니다.

그녀를 따랐던 그 많은 신하와 백성 역시 이곳에 살아야 했다.

“그 시간 동안 여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창조주는 우리를 버렸다!”

플로르의 목소리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우리의 죄가 무엇이더냐! 고작 에느가인을 탐했다는 이유? 그럼 처음부터 에느가인을 만들지 말았어야지!”

“……!”

“창조주는 마법사라는 미치광이를 관리자로 만들어 놨다. 우리는 그놈이 멸하려 했던 세상을 지키려 했을 뿐이다!”

물론 마법사가 미쳐 버렸던 것은 플로르의 계략 중 하나였다.

마법사의 아내를 죽이도록 유도했으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플로르는 억울했다.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신인데, 위대하다는 마법사가 더러운 천민을 선택한 게 이해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기회가 왔다!”

지르힐과 마법사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이용한다면.

“우리는 다시 광활한 대지를 밟을 수 있을 거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놓인 밝은 성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플로르가 천천히 몸을 틀었다.

그녀의 앞으로 무릎 꿇은 신하들이 보였다.

“조금만 더 참아라. 내 너희에게 진정으로 사랑을 전하는 신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노라.”

플로르는 아직 신이 될 꿈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고 플로르는 꿈꾸고 있다.

지르힐이라는 파괴적인 관리자, 마법사라는 미치광이 관리자, 자극적인 것만을 원하던 로안과 게히얼이라는 신이 아닌 진정으로 존재를 사랑하는 신.

창조주처럼 책임감 없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끝까지 존재들을 아끼는 그런 신!

“내가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다.”

플로르의 목소리가 마치자 신하들이 한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를 따르겠습니다!”

플로르가 만족한 미소를 그리며 몸을 틀었다. 그리고 다시 척박한 땅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라.”

그 말과 동시에 땅에서 꿈틀대며 무엇인가가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땅에서 환영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각 군주와 어머니 그리고 여왕과 각 귀족급의 존재, 태초의 시대부터 있던 자와 새롭게 태어난 자.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플로르는 조용히 그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폈다.

‘그리피네는 오지 않았고…….’

그리피네, 유르라헬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로 플로르와 비슷한 권능을 가진 자.

꼬마가 그녀의 피를 가져다가 지르힐의 사슬을 끊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지 않았다.

‘카디르버는 왔고…….’

카디르버, 서은서의 계약 존재로 태초의 시대에 플로르와 적이었고 지금도 껄끄러운 관계다.

그렇게 모인 존재만 수십만이다.

“더 안 올 것 같은데, 시작하지?”

한 존재의 환영이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고 다른 존재들이 동의했다.

그러자 플로르가 화사하게 웃으며 그들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이렇게 모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계의 땅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 이후로 처음이니까, 못해도 수억 년은 지났겠지요? 긴히 말씀드릴 게 있어 여러분을 모시게 됐습니다.”

플로르가 허리를 굽혔지만 모두의 시선은 냉랭하다.

위기가 있다는 말만 듣고 찾아왔을 뿐, 아직 플로르의 의도를 모르기 때문이다.

플로르가 그들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인간 세상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알고 계실 겁니다. 지르힐이 계약자를 선택했다는 것을요.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어요. 지르힐이 권능을 회복하고 있습니다. 그 계약자는 그릇, 그러니까 지르힐은 빙의할 수 있는 인간의 그릇을 찾았습니다.”

지르힐이 그릇을 찾았다는 말에 분위기가 술렁였다.

처참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군주와 어머니들이다. 그들은 지르힐의 이름만 들어도 겁을 내고 있다.

하지만 태초 이후 탄생한 자들은 달랐다.

“지르힐이 어때서?”

“계약자를 갖는 게 잘못된 것은 아니잖아?”

“그래, 그게 룰 아닌가?”

플로르는 빙긋이 웃었다. 그들이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은 처음부터 예상해서다.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그릇이 마법사의 호칭을 얻었다는 것도 알고 계실 겁니다.”

“하……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마법사의 호칭 때문에 우리를 호출한 겁니까?”

태초부터 있던 한 군주의 투덜거림이었다.

분명 기분 나쁠 만도 했지만 플로르는 조용히 웃으며 대답 대신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공간이 일렁이며 거대한 스크린이 만들어졌다.

그곳에서 플로르가 소멸의 바다에서 봤던 것이 영상화되어 나타났다.

마법사의 갑주를 입은 성현이다.

그 영상만으로도 태초부터 있던 자들의 입은 꾹 닫혔다.

‘마, 마법사의 갑주를 얻었어?’

‘호칭이잖아? 호칭이 어떻게?’

그들은 마법사의 귀환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긴장했을 뿐, 태초 이후에 태어난 자들은 여전히 심드렁했다.

그들은 갑주가 무엇인지 모르고 마법사나 지르힐은 동화 속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래서 플로르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영상에 올리비아의 모습이 나타났다.

“제 딸아이입니다. 이름은 들어 봤을 겁니다. 올리비아.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아이죠.”

플로르의 아홉 딸에 대한 소문은 자자했다.

하급 군주 정도는 단번에 씹어 삼킬 마력을 가진 자들.

그녀의 이름에 존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화면에 집중했다.

그런데, 이어진 영상에서 모두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태초 이전의 존재는 물론이고 그 이후에 태어난 존재들마저도.

“……저게 뭐야?”

성현의 일방적인 구타.

올리비아는 팔이 뽑혔고 짓밟혔다.

물론 갖고 있는 마력은 비슷했지만 영상으로 그것을 판별하기는 어려웠다.

영상으로 볼 때는 성현이 압도적인 마력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영상이 끝났을 때, 플로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느꼈습니까? 저놈은 올리비아를 상대하며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어요. 오직 갑주가 가진 힘으로만 싸웠을 뿐입니다.”

“……!”

“저 힘이 누구를 노릴 것 같죠? 지르힐과 마법사는 복수를 계획하고 있어요! 그 복수의 대상은 바로 우리!”

플로르가 힘주어 말하자 한 존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잠깐만요. 저놈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저 한 명이 우리를 상대한다고?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지나치게 무서워하는 것 아니야?”

“닥쳐!”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 있던 한 군주가 입술을 씹으며 외쳤다. 그리고 앞서 나오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듣고 자란 지르힐의 이야기는 동화 속 이야기나 신화가 아니다! 나모르가 죽었어! 그리고 갑주를 찾았다는 것은 소멸의 바다까지 뒤흔들었다는 거다. 만약 우리가 어떤 대비도 하지 않고 있다면, 조만간 끔찍한 현실을 마주하게 될 거다.”

“그, 그래도…….”

“지르힐과 마법사의 앞에서 우리는 개미 떼와 같다. 짓밟으면 짓밟히는 대로 죽고 말 거다.”

“그, 그게 말이 돼?”

“지르힐 하나에게 수만의 존재가 죽었다! 그것도 너희 같이 2세대 존재가 아니라 코어를 막 얻은 순수한 존재들이 불나방처럼 죽은 거야! 그런데 이번에는 지르힐만이 아니다! 마법사까지 경계해야 한다는 게다!”

“태초의 시대보다 우리의 힘이 떨어진다는 것은 인정하겠어요! 그런데 숫자는 그때보다 많아졌잖아요?”

“개미는 모여 봤자 개미! 그걸 모르나?”

논쟁이 시작됐다.

하지만 플로르는 어떤 말도 없이 그들의 대화를 지켜봤다.

공포란 전염병과 같은 것.

대화가 이어질수록 짙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 공포는 이곳에 모이지 않은 자들에게도 퍼질 거다.

그리고 모두의 머릿속을 공포가 짓누를 때, 플로르는 그들의 앞에 설 예정이다.

진정한 왕으로서.

플로르는 웃고 싶은 것을 참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 * *

아이스크림 가게.

이서아는 아이스크림을 한 입 떠먹으며 눈을 감았다.

“……이런 맛이었네요.”

이서아는 그 맛을 음미하는 것처럼 즐거워했다.

“또 먹어?”

성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먹은 양이 얼마인지 모른다.

삼겹살을 시작으로 냉면, 자장면, 팥빙수, 커피숍에 가서는 아메리카노와 라테, 마키아토. 그리고 지금은 아이스크림, 그것도 세 종류나.

“죄송해요. 진짜 먹고 싶었어요.”

“그래……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 사 줄게.”

“아.”

그냥 해 본 말인데 눈이 반짝인다.

“……설마, 또 있어?”

“곱창하고 순댓국이요.”

“또 들어갈 배가 있어?”

“네.”

성현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학생이 된 이서아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생기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래, 돌도 씹어 먹을 나이지.”

이서아가 삽질하는 것처럼 아이스크림을 크게 뜨며 방긋 웃었다.

입에 넣고서는 뭐가 좋은지 또 웃는다.

“며칠 동안 계속해서 미래를 확인했거든요?”

“그래서, 뭐 있어?”

이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푼에 올라간 큼지막한 아이스크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지르힐 님이 풀려나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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