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 * *
“그건 알아.”
성현이 당면한 숙제는 지르힐을 구하는 것.
그렇기에 성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 아니에요. 이후에 전쟁을 준비해야 해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미래를 확인했는데…….”
“그래서, 뭐 있어?”
이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푼에 올라간 큼지막한 아이스크림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곳은 편의점의 파라솔, 이곳까지 아이스크림을 들고 온 이서아가 계속 말을 이었다.
“플로르가 병력을 모으고 있어요. 목표는…….”
당연히 지르힐과 마법사. 즉, 성현이다.
그리고 그 전장은 지구가 될 확률이 높다 했다.
물론 이서아가 본 미래가 전부 맞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본 미래는 확률.
붉은 눈의 권능을 사용하면 고정된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지만, 그 권능은 그녀의 의지대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전쟁이라…….”
성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회귀 전 기억을 떠올리면, 이 시기쯤 전쟁이 일어나는 것은 맞다.
문제는 그 전쟁의 양상이 달라진 거다.
당시는 존재끼리의 혈투였다.
거짓된 평화가 깨어지고 서로를 죽이고 죽이던 지옥.
그런데 이번은 그들이 손잡고 있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성현이 캔 맥주를 손에 들었다.
이서아가 눈을 반짝인다.
그녀의 표정을 본 성현이 물었다.
“왜? 마시고 싶어?”
“……네. 아시잖아요. 소멸의 바다에서 먹을 수 있는 것은 타이어 식감의 물고기밖에 없었어요.”
“그래도 안 돼. 너 미성년자야. 나이 먹고 마셔.”
“나이요? 살아온 삶은, 안 세어 봐서 확실하지 않지만 100억 살도 넘었을걸요.”
“한국에 왔으면 한국법을 따져야지.”
성현은 빙긋이 웃으며 잠시 긴장된 표정을 풀었다.
이서아가 한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야죠.”
성현이 캔 맥주를 내려 두며 말을 이었다.
“개조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그건 회귀 전보다 향상된 것 같아. 아직 모자라지만. 그걸 이용하면 승리의 확률은 어때?”
성현이 제대하던 날이다.
그 길에서 짐승의 피를 이용한 개조 인간을 마주했던 기억이 있다.
그들은 정부 소속, 존재와 계약자를 상대하기 위해 비밀스럽게 인간을 이용해 병기를 만드는 중이다.
지구가 전장이 된다면 자연스레 성현과 같은 편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서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하급 존재는 어떻게 할 수 있겠지만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어요.”
“지금보다 더 발전될 수 있게 우리가 도와준다면?”
“똑같겠지만, 가능성은 손톱만큼 올라가겠죠?”
“그 정도면 좋네.”
회귀 전, 이서아가 본 미래에서 성현이 승리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수억의 미래를 봤지만 언제나 성현이 비참하게 죽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손톱이라니.
그건 대단한 발전이다.
“다음은 존재 중에 플로르를 적대하는 놈들과 손잡아야 한다는 거네?”
“그것도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거예요. 때가 되면 자연스레 모일 테니까요.”
“내가 할 일은?”
이서아가 깊게 한숨을 내뱉은 후 입을 열었다.
“하나 있어요. 그런데…….”
“그런데?”
“악당이 되셔야 해요.”
“우린 악당이었잖아?”
“미움받을 거예요. 모두에게…….”
성현은 미움받는 것 따위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회귀 전, 토벌대까지 마련될 정도로 악당이 된 경험이 있어서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했고 욕했다.
그 경험을 다시 한다 해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머니가 계시잖아요.”
“…….”
이서아의 말대로다.
성현 혼자 욕을 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어쩌면 그 미움의 화살이 어머니에게 향할지도 모른다.
성현이 다시 맥주를 마신 후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 보자. 무슨 짓을 해야 하는데, 악당이 되고 미움을 받는다는 거야?”
“지연우를 죽여야 해요.”
“……!”
지연우는 성현이 회귀한 목적 중 하나.
그리고 지금의 지연우는 성현과 비교할 수 없다.
지연우 정도는 단번에 찢어 죽일 수 있을 거다.
물론, 플로르가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서.
그만큼 성현은 성장했고 강해졌다.
인간 중에 성현을 넘어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다.
문제는 지연우가 가진 배경이다.
놈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계약자.
랭킹 1위보다 사람들은 지연우를 더 아낀다.
지연우는 가장 위험한 곳에 가장 먼저 나타나 마지막까지 남아 싸운다.
언제나 사람들을 생각하며 죽은 자가 나타나면 눈물까지 흘린다.
자신의 탓으로 피해자가 발생하면 가진 재산도 선뜻 내민다.
돈에 욕심이 없고 권력에도 별 다른 관심을 내보이지 않으며 오직 사람들을 위해 싸우는 자.
사람들에게 지연우는 절대 선과 같다.
물론 지연우가 기획했고 언론이 만들어 낸 이미지.
그 뒷모습을 추악하다.
놈은 모든 사람들의 위에 서기 위해 발버둥 치는 탐욕의 결정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뒷모습을 모른다.
그놈을 죽이면 성현은 악인이 될 게 분명하고 빌어먹을 연좌제로 어머니까지 비난을 받을 거다.
“몰래 죽이면?”
아무도 모르게 몰래 죽이는 것.
암살.
하지만 이서아는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플로르는 지연우를 자신의 그릇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모든 것을 눈에 담으려 하죠. 암살을 한다면, 그래서 성공한다면, 플로르는 자신이 본 것을 우리가 보는 영상처럼 만들어 공개할 거예요. 지연우를 누가 죽였는지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서요.”
성현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치며 생각에 빠졌다.
지연우는 죽여야 한다.
놈은 플로르의 그릇.
그리고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의 추종자를 끌고 존재에게 붙어 버릴 놈.
그놈이 살아 있다면 전쟁은 불리하다.
‘방법이…….’
방법을 찾아야 한다.
플로르의 눈에 띄지 않고 지연우를 죽일 수 있는 방법.
* * *
한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고급 주상 복합 아파트.
지연우는 그곳에 서 있었다.
언론에 모습을 보일 때와 달리 차가운 눈으로 세상을 내려다보는 중이다.
조금 전, 플로르에게 들었다.
곧 대대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준비하라고.
‘전쟁?’
발아래에 놓인 한강, 너머에 있는 강남의 불빛.
전쟁이 일어나면 저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되고 말 거다.
신분을 상징하는 이 고가의 건물 역시 무너질 테고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갈 게 분명하다.
말 그대로 지옥.
지금껏 지연우 앞에 뻗대고 있던 정치인도 처음부터 지연우를 응원했던 사람들도 발발발 떨 미래.
믿었던 계약자는 벌레처럼 쓰러질 거다. 거리에는 시체가 가득, 인간 대신 거리를 활보하는 짐승과 존재.
그 앞에 인간은 평등하다.
지배자와 피지배자, 부자와 빈자는 없다.
공포 앞에 몸서리치는 게 인간이며 죽음을 벗어날 수 없는 게 운명이다.
그런데 그 생각을 이어 가던 지연우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지연우는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지구상 모든 인류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구원자를 기다릴 거라고.
‘그게 내가 된다면?’
지연우는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고 여겼다.
플로르는 존재의 세상을, 지연우는 인간의 세상을 차지하는 그 기쁜 날.
누가 죽든 말든 상관없다. 앞으로 일어날 비참한 미래도 지연우에게는 기회일 뿐.
문제는.
‘……유성현?’
플로르는 말했다.
-유성현, 그놈은 나와 반대 세력의 존재와 계약했다. 해서 널 죽이러 올지도 모른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게 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지. 전쟁이 일어난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계약 존재를 따를 게 분명하고 유성현 역시 마찬가지일 게다.
“…….”
-하지만 암살 같은 것은 없을 거다. 그런 성격은 아니야. 암살이 가능한 스킬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 성격 그대로 너를 찾아오겠지.
그 목소리를 떠올리며 지연우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머릿속에는 몇 년 전, 성현과 처음 만났을 때가 스치고 있었다.
당시의 성현은 약했다.
가볍게 던진 마력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하고 뒤로 밀렸었다.
그때였다면 손쉽게 죽일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성현은 경악할 정도로 강해졌다.
‘……이길 수 있을까?’
지연우는 성현이 군주 나모르를 찢어 죽이는 것을 봤으며 그 이후의 행보도 플로르에게 들어 알고 있다.
왕가의 계곡과 소멸의 바다, 아홉 번째 딸 세트리아니를 죽이고 여덟 번째 딸 올리비아를 극한으로 밀어붙였다는 이야기.
그건 인간이 가진 한계를 초월했다는 뜻.
‘……이길 수 없어.’
지연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옆에 오즈라도 있었다면 가능성이 보였겠지만 혼자서는 무리다.
‘잠깐만…… 오즈?’
지연우의 눈이 부릅떠졌다.
오즈는 지연우의 호위 무사로 그 누구도 실제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알려진 계약자.
지난번 성현과 싸운 후 모습을 감췄다.
그 뒤로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래, 오즈!’
평소의 실력으로 따진다면 지연우보다 아래로 평가받지만 그것은 봉인이 풀리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
봉인이 풀리면 오즈는 지구상 존재하는 것 중 가장 흉포한 마력을 지니게 될 거다.
‘물론 유성현에게는 안 되겠지.’
성현은 인간을 초월한 자다. 오즈의 봉인이 풀려도 성현을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치명상은 입힐 수 있어.’
인간을 초월했다고 해도 결국 생명체.
베이면 피가 나고 쑤시면 아픈 살덩이로 이뤄져 있다.
봉인이 풀린 오즈와 싸워 멀쩡할 수 없다.
‘그때 내가 나타나면…….’
지연우의 머릿속에 성현을 박살 낼 계획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S급 짐승을 소환하고 지연우와 함께 있는 모든 계약자를 갈아 넣는다.
그들을 통해 유성현의 체력을 갉아먹은 후 마지막에 오즈를 내보낸다.
오즈의 역할은 유성현을 위기로 몰아넣는 것.
‘그 뒤에 오즈는 죽어도 괜찮아.’
마지막에 지연우가 나타나 힘이 다 빠진 유성현의 목을 자르기만 하면 되는 거다.
‘좋아.’
지연우가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저벅저벅 거실을 걸으며 계속해서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 역시 확률은 50%야. 확실하게 하려면…….’
예로부터 확실하지 않은 승부는 하는 게 아니라고 들었다.
전쟁은 이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이긴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라고 했다.
50%가 아니라, 90%, 100%의 확률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렇게 깊은 생각을 이어 가던 지연우가 걸음을 뚝 멈추며 조용히 웃었다.
‘있어.’
또 하나의 계략이 떠올랐다.
지연우와 함께하는 계약자 중 한지혁이라고 있다.
그 동생의 이름이 한아성.
‘유성현과 고등학교 동창이라고 했지?’
지연우가 몸을 틀었다.
이어서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린 서랍, 그 안에 있는 것은 투명하고 작은 봉투. 흰색 가루가 담겨 있다.
‘전투 전에 이걸 먹이면?’
지연우의 입술이 뒤틀렸다.
승률은 100%로 올라간다.
‘됐어.’
모든 계획은 세워졌다.
이제 망설일 시간은 없다.
지연우가 습하게 웃으며 플로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즈를 찾고 싶습니다.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 * *
편의점 앞, 파라솔.
성현과 이서아는 한참 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성현은 말 그대로 어떻게 하면 피해 없이 지연우를 죽일 수 있을지 생각하는 중이었고, 이서아는 수십 가지의 미래를 예상하며 골똘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서아가 눈을 반짝이며 눈을 떴다.
“있어요!”
드디어 지연우를 몰아세울 방법을 찾아낸 거다.
성현의 시선이 닿자 이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