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하나?”
“완벽한 계획은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가 피해를 받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성현이 지연우를 죽이는 것은 일도 아니지만 그 뒤의 일이 문제다.
사람들에게 성현은 이제 막 유명해진 계약자, 하지만 지연우는 영웅과 같은 자.
성현을 지지하는 사람은 없고 지연우를 죽이는 동시에 플로르가 세상에 그 영상을 공개할 게 분명하다.
거짓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현은 모두의 원수가 될 거다.
그걸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하나.
“지연우의 본모습을 세상에 알리는 거예요.”
지연우의 속셈을 세상에 공개하면, 그리고 그 실체를 본 사람들은 지연우에게 등을 돌릴 것이란 계획.
하지만 이서아는 그것조차 완벽한 방법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던 것이 깨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특히 광적으로 지연우를 응원하는 자들, 그들이 문제다.
그들은 잘못된 증거, 그 완벽한 증거가 공개되어도 “조작이다.”, “편집이다.”며 믿지 않을 거다.
또 다른 의혹을 제기하며 성현을 악마로 몰아세울 수 있다.
“하지만 유일한 방법이에요, 모두가 다치지 않을…….”
“가능성은?”
“10%…….”
한참 동안 끌끌끌 웃던 성현이 무릎을 탁 치며 입을 열었다.
“무량대수 중의 하나는 아니네? 가능성이 많이 높아졌어.”
성현이 쭉 기지개를 켰다.
회귀 후 성현이 살아온 세상은 언제나 벼랑 끝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한 적도 많다. 그런데 10%라니.
“쉽네.”
성현에게는 쉬운 일이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이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는요?”
역시 문제는 어머니다. 하지만 성현은 이번에도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지연우가 죽지 않으면, 그래서 플로르가 그때처럼 이 땅에 강림하면, 그때가 되어 지연우를 죽였을 것이라고 후회하면, 날 다시 회귀시킬 거야? 아니잖아?”
“…….”
“할 수밖에 없어. 해야 하는 일이고. 인류를 구원한다는 거대한 사명감이 아니야. 내 주변 사람들이, 그리고 내가 살아갈 세상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는 거야. 그럼 해야지.”
“…….”
“우울한 얼굴 하지 마. 넌 계속 아이스크림을 먹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그런 삶을 살면 되는 거야.”
성현의 다짐에 이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못 먹을 수도 있는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먹기 시작했다.
이서아는 미래를 볼 수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미래를 보며 파멸의 끝을 예상하는 중이다.
두려울 게 분명하다. 가슴 떨리는 고통을 참아 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성현은 모른 척,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이겨 낼 수 있는 척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천천히 먹어. 또 사 줄게.”
“정말요?”
“어.”
* * *
-……그리고 소멸의 바다라고 있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여자가 있지. 한아진. 네 동료인 한지혁의 동생이다.
그 시각, 지연우는 플로르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성현을 박살 내기 위한 계획, 플로르의 정보를 들으며 그 뼈대에 살이 붙는 중이다.
“이용할 수 있겠네요.”
-그래, 너의 대업을 위해서라면 필요한 거짓이지.
지연우는 빙긋이 미소를 그렸다.
식물인간이었던 한아진, 그녀를 구한 게 성현이라고 한다.
하지만 상관없다.
소멸의 바다,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누가 알까?
성현이 자신이 했다고 주장한다 해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무도 없다.
지연우는 한아성을 통해 성현의 전투력을 깎으려 계획했다.
고등학교 동창이라는 이유로 이용하려 했는데, 그 일이 더 쉬워졌다.
지연우가 조용히 웃으며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지연우는 생각했다.
이제 성현이 자신을 이길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지는 중이라고.
지연우가 창가를 향해 걸어갔다.
곧 자신을 칭송할 사람들이 살아갈 서울이 눈에 들어왔다.
‘모두 내 것이다.’
* * *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언니가 다 가져다줄게.”
그날 저녁, 한아진의 병실.
한아진은 동그란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그녀는 얼마 전 성현이 소멸의 바다에서 끄집어낸 한아성의 동생.
앞에는 그녀의 언니 한아성이 보였다. 친절한 눈으로 문제집을 꺼내는 중이었다.
“문제집?”
“검정고시 봐야지. 차근차근 공부하면 어렵지 않을 거야.”
한아성은 동생이 식물인간으로 살아온 게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고 깨어난 동생에게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동안 못 했던 공부, 그리고 잠들어 있는 동안 채우지 못한 추억, 그 모든 것.
그런데 동생은 관심 없다는 눈빛과 함께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보인다.
여느 때처럼 화려한 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우울하게만 보였다.
“언니, 세상이 이런데 공부를 해야 해?”
“어?”
“공부가 필요할까?”
한아진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잖아?’라는 말을 하려다가 말았다.
하지만 한아성은 그 뜻을 이해했다.
대한민국에서 인간이 사는 땅은 이제 많지 않다. 대부분은 짐승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문제는 이곳 역시 언제 짐승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
지금도 번화가 한복판에 짐승이 나타났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동생의 절망적인 목소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걱정하는지 알겠는데, 네가 잠들기 전이랑은 달라. 최근에 군대가 땅을 되찾고 있어. 얼마 전에는 이계로 가서 군주도 토벌했대. 이제 좋아질 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한아성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전했지만 동생의 눈빛은 여전히 우울하다.
“……그래?”
분명 그녀는 소멸의 바다에서 있었던 일을 잊었다.
하지만 뭔가 찝찝했다.
뭔가 거대한 것들의 싸움이 시작될지 모른다는, 그래서 이 세상이 그 혼란에 휩싸일 것이란 예감.
“괜찮을 거야. 깨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혼란스러운 거야. 의사 선생님도 그랬잖아, 아직 뇌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불안하고 무서운 감정이 많아질 거라고.”
한아성은 계속해서 위로했고 동생은 애써 그 감정을 외면했다.
“그렇겠지?”
“어.”
벌어지지 않은 일에 감정을 소모하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 거다.
그리고 그녀는 한아성이 가져온 문제집을 손에 들었다.
“알았어. 해 볼게.”
“진짜?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봐. 내가 공부 잘했던 것은 기억하지? 다 가르쳐 줄 수 있어.”
한아성의 얼굴이 밝아졌고 동생은 문제집을 착착 펼쳤다.
하지만 동생의 눈동자에 문제집의 글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벌어질 일이 불안하기만 했다.
한아성은 그런 동생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힘내. 곧 좋아질 거야.”
말을 하는 도중이었다. 한아성의 휴대폰이 벨을 울렸다. 발신 번호는 그녀의 오빠 한지혁.
한아성이 반갑게 웃으며 휴대폰을 손에 들었다.
“오빠다. 올 때 치킨 사 오라고 할까?”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문제집에 집중했다. 그런데 언니 한아성의 목소리가 뭔가 이상했다.
“지금? 지연우? 그 사람이 나를 왜? 어……? 그게 정말이야? 알았어. 갈게.”
한아성이 통화를 종료하며 다시 동생을 바라봤다. 그리고 미안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빠가 잠깐 볼 사람이 있다고 나오라네. 미안, 갔다가 금방 올게. 치킨 사 와?”
동생이 손을 저었다.
“집에서 쉬어. 언니 매일 오느라 힘들잖아.”
“아니야. 금방 올게.”
한아성이 병실 밖으로 떠났다.
그녀의 동생 한아진은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다가 문제집을 테이블에 던져뒀다.
그 테이블에 음료가 보인다.
지난번, 성현이 사 왔던 것.
한아진은 한참 동안 그 음료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 * *
한아성은 바쁜 걸음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그게 정말이야?’
그녀는 방금 오빠 한지혁이 전화로 말한 것을 상기하고 있었다.
-지연우라고 알지? 그래, 계약자 연맹 사무총장. 하…… 나도 지금 들었는데, 지연우 총장님이 소멸의 바다에 갔다 왔대. 아진이가 깨어난 것, 그래, 총장님 덕이었어. 부탁할 게 있다고 하는데, 잠깐 이쪽으로 와. 세상을 위한 거라고 하니까…….
한아성의 머릿속에는 의문만이 가득했다. 그리고 지금껏 있었던 모든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계약된 존재로부터 한아진이 깨어나려면 소멸의 바다에 가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지연우가 다녀왔다고?’
지연우는 명백한 ‘선(善)’.
‘하지만 뭔가 이상해.’
지금껏 한아성은 지연우를 지켜봤다. 아니, 관심을 갖지 않으려 해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지연우는 자신이 한 일을 모두 드러내는 사람, 절대 숨기지 않는다.
자신의 선행을 따라 하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며 미디어와 SNS를 통해 세상 모두에게 밝히기를 즐겨한다.
지난번 군주 나모르를 토벌하러 갔을 때를 기억해도 그렇다.
지연우는 토벌대를 구하는 과정부터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순간을 공개했다.
‘그런 사람이 소멸의 바다에 다녀왔다는 것을 지금껏 숨기고 있었다고?’
정말 소멸의 바다에 갔다면, 처음부터 공개했을 거다.
게다가 그곳에서 동생 한아진을 구했다면, 그게 사실이라면, 오랫동안 식물인간이었던 한아진이 깨어나 언론에 관심을 받을 때, ‘짠’ 하고 등장했을 게 분명하다.
지연우는 그런 사람이라고 한아성은 생각했다.
‘하지만…….’
지연우의 말을 믿지 않기도 어렵다.
지연우는 소멸의 바다를 거론했다.
직접 구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일.
복잡한 생각을 이어 가며 복도를 지나던 한아성의 걸음이 점차 느려졌다.
‘잠깐만…….’
며칠 전, 동생의 병실에서 본 것.
낯선 사람이 찾아와 줬다는 음료.
당시 동생은 말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어. 그런데, 어딘지 모르게 낯이 익었어. 그래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음료만 놔두고 나가 버렸어.”
생각을 이어 가던 한아성의 발걸음이 완전히 멎었다. 그리고 지나온 길을 향해 시선을 틀어 동생의 병실을 향했다.
음료를 찾아 들고 온 손님, 그 사람이 지연우라면 동생도 알아봤을 거다.
‘설마 그 사람이…….’
소멸의 바다에서 동생을 살려 준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연우가 동생을 구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도대체 뭐야?’
한아성은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껏 생각한 모든 것은 가설, 확실한 것은 없다.
하지만 한아성 역시 거짓된 세상을 살아가는 계약자, 지연우의 말을 순순히 믿을 만큼 쉽게 살아오지 않았다.
“오랜만이다.”
동생의 병실을 바라보던 한아성은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에 다시 시선을 틀었다.
앞에 성현이 보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보는 모습, 키도 꽤 컸고 몸도 단단해졌지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유성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는 것 같네?”
“어?”
한아성의 눈동자가 떨려 왔다.
그녀는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지금 성현의 말투, 동생 한아진이 말했던 그 말투.
동생은 음료를 놔두고 갔던 사람의 목소리를 따라 하며 말했었다.
“그 사람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어. ‘기억 못할 거야. 어릴 때 봤으니까.’, ‘건강하면 됐어. 그거 확인하러 온 거니까.’. 웃기지? 나이도 얼마 차이 안 나는데, 인생 다 산 사람처럼 건조했다니까.”
한아성이 입을 열었다.
“……너였구나?”
그 상대가 성현이라면 모든 퍼즐이 맞춰진다.
언제나 기적 같은 일을 벌이는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