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성현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한아성의 동생을 구해 냈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다.
하지만 한아성은 성현의 그 건조한 행동을 보며 확신을 가졌다.
잠시 후, 병원 앞 벤치.
한아성이 성현에게 캔 커피를 내밀었다.
“더 좋은 거 주고 싶은데, 지금은 마땅한 게 없어. 미안. 나중에 내가 맛있는…….”
“부탁할 게 있어서 왔어.”
“어떤 거? 뭐든 말해.”
한아성은 힘차게 대답했다. 그녀 역시 계약자, 성현만큼은 아니지만 꽤 강해졌다고 자부할 수 있었고 성현은 그녀에게 은인이다.
어떤 난감한 부탁이라도 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현은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물끄러미 한아성을 바라보며 이따금 손에 쥔 캔 커피를 마시는 게 전부다.
하지만 한아성은 성현의 눈빛에서 여러 감정이 스치는 것을 봤다.
미안함, 안타까움, 걱정 그리고 두려움과 망설임.
“괜찮아. 말해. 죽으라는 것 빼고는 다 도와줄게. 죽기는 싫거든, 이제 막 동생도 만났고 행복해지려고 해서.”
한아성이 분위기를 바꾸려고 배시시 웃었지만 성현은 여전히 굳은 표정이었다.
그렇게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성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네가 계약한 존재가 지금 너를 보고 있어?”
“어? 아, 아니. 내 계약 존재는 계약자가 많아. 나한테 집중할 만큼 시간이 많지 않을걸.”
“병원에서 나를 만난 것도 모르나?”
“음…… 시선이 느껴지지는 않았어.”
성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아성을 만나고 바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이유가 이거다.
지금부터 해야 할 이야기는 존재의 귀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한아성과 계약한 존재가 플로르에게 쪼르르 달려간다면 모든 게 허사가 될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마법사의 권능을 통해 한아성의 주변에 존재의 기운이 느껴지는지 확인했고, 그녀에게 질문하며 마지막으로 안전을 더한 거다.
성현의 딱딱한 얼굴을 보며 한아성이 어색하게 웃었다.
“왜 그래? 무슨 부탁을 하려고…….”
“지연우.”
* * *
강남의 고급 소고기 전문점, 프라이빗한 공간으로 인기가 좋은 곳.
1인분에 1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그곳에 앉은 한아성은 긴장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봤다.
앞에는 정말 착한 사람으로 여겨지는 지연우가 직접 고기를 뒤집으며 서글서글 웃고 있었다.
그리고 지연우가 한아성의 앞 접시에 고기를 올려 두며 입을 열었다.
“지혁이, 너랑 안 닮았어.”
“하긴, 제가 좀 잘생겼죠.”
한아성의 오빠 한지혁이 너스레를 떨자 지연우가 황당한 표정으로 하하, 웃었다.
“아니, 그 말이 아닌데…….”
“그럼요?”
“네가 좋은 인상은 아니잖아.”
지연우는 한아성의 긴장을 풀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이어 갔다.
한아성의 대학 생활을 물어보기도 하고 앞으로 진로에 대한 질문도 가볍게 던지기도 하며 “대단한데?”, “그 나이에 그런 생각 하는 사람 없지 않아?” 등의 칭찬을 계속해서 이어 갔다.
호감을 사기 위한 전략, 한아성을 손에 얻어야 성현을 박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고 생각했을 때, 지연우는 한아성을 불러낸 이유를 꺼내기 시작했다.
“동생은 괜찮아? 이름이 아진? 그렇게 들었던 것 같은데. 소멸의 바다에서 우연히 찾아낸 게 지혁이의 동생이라니, 깜짝 놀랐어.”
“가, 감사합니다.”
한아성은 지연우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녀는 지연우를 믿지 않는다.
성현을 만났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에 대해 들어서다.
그렇기 때문에 한아성의 눈에는 지연우의 선한 미소가 정말 악마처럼 여겨졌다.
‘누군가 했던 말이 있어.’
악마가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을 거라고, 그래야 사람들이 믿고 따를 테니까.
그러나 그 껍데기를 벗겨 내면 인간을 잡아먹기 위한 흉측한 모습의 괴물이 존재할 게 분명하다고.
지금 지연우가 그랬다. 저 가식적인 미소와 목소리는 끔찍하기만 했다.
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하지만 한아성은 참아 냈다. 감정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사무총장님 덕분에 다시 행복을 찾을 수 있었어요.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지연우가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겸손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 감사 인사를 받으려고 이야기한 거 아니야. 그리고 지혁이 동생이면 나한테도 동생이고, 지혁이 가족이면 나에게도 가족이야. 그러니까, 마음 편히 가져.”
“아, 네.”
지연우가 술병을 손에 쥔 후 ‘한 잔은 괜찮지?’라고 입을 열며 한아성의 잔을 채웠다.
이후 이어진 대화는 다시 가벼운 농담이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지연우가 한아성을 불러낸 게 단지 친분의 목적처럼 느껴질 정도.
하지만 지연우는 질문을 던지며 교묘하게 성현의 이름을 끄집어내는 중이었다.
“계속 이 동네에서 살았어? 고등학교는 어디 나왔어? 내가 천산 고등학교 나왔는데, 내 후배 아니야?”
계획된 질문에 반응한 것은 오빠 한지혁이었다.
“얘는 거기 안 나왔어요. 맞다, 너 유성현이랑 같은 고등학교 나왔지?”
동시에 지연우가 어떤 것도 모른 척 물었다.
“……유성현? 같은 학교 나왔어? 정말?”
* * *
“한아성이 우리를 도와줄까?”
성현의 질문에 이서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확실해?”
“99%요.”
“그럼 확실하네.”
소고기 전문점의 맞은편, 성현과 이서아는 그곳에 서 있었다.
이서아가 핫도그를 야무지게 먹으며 소고기 전문점을 빤히 바라보자 성현이 물었다.
“왜? 먹고 싶어?”
“아뇨. 전 지금 이 핫도그가 제일 맛있어요. 그리고 지금은 배가 불러서 더 먹을 수도 없고요.”
성현은 픽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하루, 이서아는 쉬지 않고 먹었다. 그런데 이제야 배가 부르다는 게 놀랍기만 했다.
이서아가 방긋 웃으며 성현을 향해 허리를 굽혔다 폈다.
“어쨌든, 오늘 일은 잘됐으니까, 전 이만…….”
“가자.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버스 타면 금방이에요.”
“그럼 정류장까지만.”
성현도 맥주 한 잔을 입에 댄 상태다. 차를 가지고 왔지만 운전은 어려웠기에 정류장까지 이서아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정류장으로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방금 전까지는 플로르와 지연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한 이야기가 주제였다면 지금은 회귀 전 동료들에 대한 것.
“이태산은 한번 볼 수 있을 수도 있겠어. 계약자가 되어서 여기저기 까불고 다니는 모양이야.”
“진짜요? 멀리서라도 한 번은 보고 싶어요.”
이서아도 이제 그들과 인연을 맺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회귀 전, 수년 동안 토벌대를 피해 다니며 생사를 함께했던 동료들을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기 어려운 모양이다.
그녀의 눈동자는 과거의 추억으로 물들었다.
그리고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성현과 이서아의 대화는 다시 플로르와 지연우에게 맞춰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과거를 추억하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게 인간이니까.
“조만간 오즈가 대장의 앞에 나타날 거예요.”
“오즈?”
성현은 이계의 땅에서 오즈와 싸웠던 것을 떠올렸다.
오즈의 성격은 위험하고 사납다.
이번에 만난다면 반드시 숨을 끊어 놓아야 안심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서아의 입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흘렀다.
“오즈가 우리 편에 설 수도 있어요.”
“……응?”
“이유까지는 모르겠는데, 오즈가 지연우와 대적하는 장면이 보여요.”
오즈는 지연우의 호위 무사 같은 것, 만약 두 사람이 싸운다면 정말 팝콘이라도 준비해 놔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성현이 끌끌 웃을 때, 이서아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다가왔다.
“저 이제 갈게요. 그리고요, 제가 붉은 눈으로 본 것은 아닌데요. 100% 확실한 사실 하나를 알고 있어요. 부모님은 제가 학원에 간 줄 알거든요. 그런데 아마 학원에서 전화했겠죠? 전 혼날 거예요. 도대체 공부가 뭐라고…….”
이서아가 우울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버스에 올랐다.
* * *
늦은 밤.
지연우는 집에 도착했다.
지연우는 불이 모두 꺼져 있지만 켜지 않는다. 소파에 앉아 조용히 한강 너머 서울을 바라볼 뿐이다.
그러다가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오늘 한아성과의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그녀는 전폭적으로 지연우를 돕겠다고 했고 유성현은 한발 더 지옥에 다가섰다.
“조만간…….”
지연우는 저 모든 불빛을 자신의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응원해 주는 단순한 인기를 초월한 진정한 권력.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거야.”
그 과정은 괴롭겠지만 끝은 영광으로 빛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창고로 오라.
플로르의 메시지가 들리며 지연우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래, 할 일이 있지.’
어쨌거나, 성현의 목을 치는 것은 지연우 본인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실력까지 완벽한 지도자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
플로르는 지연우를 훈련시켜 주겠다 했고 지연우는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금 가겠습니다.’
지연우는 눈을 감고 창고로 이동했다.
창고에서는 플로르의 도움을 받아 또 다른 공간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은 백사장, 바닷물이 넘실거리지만 그 어떤 생명도 느껴지지 않는 곳.
그곳에 플로르의 환영이 나타났다.
검고 긴 생머리, 세상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얼굴.
플로르의 옆에는 금빛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내 딸 올리비아라 한다.”
성현에게 팔이 뽑혔던 올리비아가 지연우의 앞으로 나섰다.
완벽한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상처는 아물었고 뽑혔던 팔도 회복된 상태다.
플로르의 시선이 올리비아에게 향했다.
“넌 마력을 사용 말고 싸우거라.”
올리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인간 따위를 상대로 마력을 쓸 생각은 없었다.
오로지 기술, 그동안 익혔던 전투 능력만으로 지연우를 제압할 생각이다.
플로르의 시선이 지연우에게 닿았다.
“넌 내 마력을 받아들이는 연습을 할 게다.”
플로르는 지연우를 그릇으로 생각했다. 플로르는 얼마 전 성현을 봤고 인간의 신체가 지르힐의 마력을 견디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니 지연우 역시 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아니, 견뎌야만 한다. 그래야, 그릇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올리비아와 싸우게 한 이유는 정말 단순하다.
성현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버티기 위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단련시키려 하는 거다.
올리비아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지연우는 플로르의 생각을 모른 채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플로르의 손가락에서 검은 구체가 둥실 떠올랐다.
“내 마력의 0.1%도 되지 않는다. 아플 테지만 견뎌라.”
구체는 정말 작았다. 지름이 0.5mm도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계약에 따라 오가는 마력이 아닌 플로르의 순수한 힘이다.
그 안에 담긴 파괴력은 달랐다.
마력이 닿았을 때, 지연우의 눈에 핏발이 섰다. 온몸의 심줄이 터질 것처럼 솟아올랐다.
참으려 했지만 자신도 모르게 비명이 터졌다.
“끄아아아악!”
“견뎌라! 견뎌야 한다! 신체 모든 곳을 개방해서 마력을 받아들이려…….”
하지만 플로르의 목소리는 이어지지 못했다.
툭, 소리와 함께 지연우는 의식을 잃은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플로르가 고개를 저었다.
“한심한 놈.”